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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제의 교활한 책동

 

지금으로부터 126년전인 1895년 10월 8일 일본침략자들은 정규무력을 위주로 한 대살인집단을 뭇고 조선왕궁을 습격하여 조선봉건정부의 국왕 고종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고있던 권력자 명성황후를 가장 야수적인 방법으로 무참히 학살하는 특대형범죄를 저질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의 국정을 한손아귀에 거머쥐고있던 민비가 친로파의 수괴가 되여 일본세력을 반대하는 립장에 서게 되자 이에 당황망조한 일본의 통치자들은 조선주재 자국공사 미우라를 돌격대로 내세워 수비대무력과 경찰무력, 지어는 깡패들과 불량배들까지 포함한 살인집단을 뭇고 그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습격하게 하였다.

일본도로 민비를 란도질한 미우라의 하수인들은 범죄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시체를 화장하고 남은 그의 유골까지도 못속에 집어던지였다.》 

력사에 을미사변이라고 불리우는 명성황후살해사건은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란폭하게 침해한 력사상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천추에 용납 못할 특대형 테로행위였다.

일본은 을미사변직후 저들의 죄행을 흑막속에 덮어버리고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온갖 교활한 책동을 다하였다.

을미사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본의 교활한 책동은 첫째로, 이 사건이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조선군인들을 부추겨 발생한것처럼 내외의 여론을 기만하려고 책동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일본은 명성황후살해사건으로 하여 혼란과 좌절에 빠져있던 조선봉건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사건의 책임을 조선군인들에게 넘겨씌울수 있는 증거물을 받아내는 강도적행위를 감행하였다.

명성황후살해직후 일본은 철면피하게도 조선봉건정부의 내무대신 박정양을 강박하여 이 사건은 《무기를 회수하고 훈련대를 해산하자는 의론》에 《격동》된 《병사들이 궁내에 란입하여 원통함을 호소》한것과 관련하여 발생하였다는 《내부고시》를 각지에 살포하게 함으로써 마치도 명성황후가 조선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된것처럼 꾸미려고 하였다.

10월 10일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봉건정부에 《외부에서 본월 8일 훈련대병사들이 궐내에 돌입하여 원통함을 호소할 때에 일본옷을 입은 일본사람 몇명이 참가하여 행패를 하였다고 전해지고있으나 이것은 거꾸로 된것으로써 믿을바가 못된다.》는 강도적인 서한을 보내고 그것을 인정하는 답서를 일본공사관에 발송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굴복하여 부패무능한 봉건정부가 《당일 새벽에 호소하기 위하여 갈 때에 훈련대와 시위대가 돌연 충돌하게 되면 어느것이 훈련대병사인지를 분간할수 없어 훈련대원 호상간에 충돌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으므로 선두 몇명으로 하여금 일본인의 옷을 입게 한것이며 …그들 모두가 일본인이 아니였다.》라는 외곡된 회답을 어쩔수없이 보내오자 미우라는 그것을 책임회피의 증거물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것도 성차지 않아 미우라는 또다시 조선봉건정부를 협박하여 《일본인은 살해 등 란폭한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궁내에서 폭행을 하고 사람을 죽인것은 모두 조선인의 소위》였다는 인증을 받아놓았다. 이것은 내외의 이목이 일본에 쏠리게 되는 경우 발뺌을 하기 위한 증거를 미리 마련해놓으려는 일제의 교활한 술책이였다.

일본은 사건의 책임이 전적으로 조선군인들에게 있는듯이 신문지상을 통하여 주장하는 파렴치한 행위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당시 서울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한 신문인 《한성일보》 10월 9일부는 미우라의 지령에 따라 《대원군은 어제 아침에 돌연 병사들을 인솔하고 왕궁에 들어가 일대 소란을 일으켰다. …왕궁은 훈련대를 해산하고 그 무기를 빼앗으려고 하였으므로 훈련대병사들이 격분하여 대원군에게 호소하자 나라의 정치를 우려하던 대원군이 단연 병사들을 인솔하고 입궐하게 된것이다. 대원군이 강화문으로 들어갈 때에 시위대와 몇분간 작은 싸움이 있었으나 국왕과 황태자는 무사하고 황후만은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이 당시에 광화문앞에 있던 일본수비대는 궁중에서 일어나는 총소리를 듣고 국왕페하의 안녕을 기하고저 즉시 출동하여 훈련대와 시위대의 교전을 막았다.》라는 허위기사를 실었다.

이것은 일제가 사건의 책임이 일본인들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조선군인들에게 있다는것을 기정사실화하고 그것을 만천하가 그대로 믿게 하려는 허위날조였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기마련이다.

당시 일본깡패무리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것을 직접 목격한 한 외국인은 《일본인들은 방 한구석에 숨은 몸집이 작은 녀인을 발견하자 머리채를 휘여 잡은채 왕후가 아닌가고 따졌다.

그 녀인은 이를 부인하면서 몸을 빼 마루로 탈출하려고 하였다. 그 순간 불의에 타격을 받은 녀인은 비명을 질렀다. 그 옆에 있던 왕세자는 세번씩이나 자기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을 듣기는 하였으나 더 이상 소리를 내기 전에 일본인들은 녀인을 살해하고말았다.

그리고 아마도 채 절명되지 않았을 왕후를 홑이불로 싸서 얼마 멀지 않은 록산의 소나무수림으로 운반하여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얼마후 거기에는 뼈 몇쪼각밖에 남은것이 없었다.》고 고발하였다. (맥캔지 《조선의 비극》)

또한 조선봉건정부고문이였던 이시즈까는 일본법제국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 명성황후학살범인들인 데라자끼(본명 다까하시 겐지)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참살한 왕비를 끌어내여…기름을 들씌워 불태웠다.》고 하였다.

후날 로씨야검사는 《명성황후유해가운데서 땅속에 약간 묻힌 머리앞면 뼈와 한쪽손목이 발견되였는데 이것은 명성황후가 칼에 맞아 부상당하였지만 목숨이 붙어있는것을 그대로 불에 태워죽였다는것, 불에 타죽으면서 머리와 한쪽 손을 땅속에 묻어 불을 피하면서 필사적으로 모지름을 썼다는 예측을 확증해주고있다.》고 증언하였다. (《조선문제에 관한 로씨야자료》)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명성황후살해사건의 책임을 조선군인들에게 넘겨씌우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던것이다.

을미사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본의 교활한 책동은 둘째로, 조선주재 외국대표들의 규탄과 비난을 무마하고 그들의 주의를 조선사람들에게 돌리기 위하여 갖은 술책을 다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당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각축전에 열을 올리면서 날로 강화되는 일본의 조선침략을 주시해오던 유미렬강들은 명성황후살해사건을 구실로 일본의 조선진출을 저지시키고 저들의 침략적지위를 보다 강화하려고 하였다. 특히 짜리로씨야와 미국은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살해사건을 매우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공포에 떨고있는 조선국왕을 저들에게 끌어당겨 조선침략의 유리한 환경과 조건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렬강들의 움직임에 바빠난 일본침략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명성황후살해사건과 관련하여 자그마한 약점도 외국인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발광하였다. 명성황후살해사건직후 일본외상 무쯔는 《이 사건에서 주의할것은 로씨야와 기타 각국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것을 탐지함에 있다. 따라서 짜리로씨야 등의 행동이 명백하게 되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형세에 따라 방책을 강구하는것이 옳다.》라고 현지 살인자들에게 지시하였다.

이것은 일본정부가 살인범죄자들에게 사건변명에 주동적으로 나서면 오히려 의심을 더 받을수 있으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것과 외국대표들의 주의를 조선사람들에게 돌리는 방향에서 사건처리를 하라는것을 암시한것이였다.

일본정부의 이와 같은 지시에 따라 공사 미우라는 《외국공사들이 일본인이 관계한 사실을 비난할 우려가 없지 않다.》고 하면서 일본령사를 비롯한 관계자들에게 언론통제를 강화하고 각국 외교관들과 신문기자들의 전보발신을 취급하여주지 말라고 지시하였으며 조선국왕을 찾아가서는 《페하는 각국 공사가 접견을 바라더라도 결코 허가하지 말라.》고 강요하였다.

이것은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목격자인 조선국왕의 발설을 미리막고 나아가서 사건의 진상이 사실그대로 세상에 공개되는것을 방지하려는 일본침략자들의 교활한 수습책이였다.

미우라는 또한 사건당일에 주조 짜리로씨야공사 웨베르가 일본공사관에 찾아와 사건진상을 해명할것을 요구하자 《이번 사건은 훈련대를 반대하는 당파가 훈련대를 해산시키려고 하였으므로 훈련대병사들이 대원군을 앞세우고 일으킨것으로써 일본수비대가 충돌한것은 국왕의 요구가 있었으므로 그 사건을 진압하기 위한것이였고 대원군의 가마를 호위한것은 결코 일본인이 아니다.》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하였다.

이것은 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조선사람들에게 넘겨씌움으로써 짜리로씨야의 비난과 국제적인 여론을 무마시키려는 일제의 술책에서 나온 파렴치한 행위였다.

명성황후살해사건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본침략자들의 책동에는 현지의 살인배들뿐아니라 일본정부도 가담하였다.

10월 10일 짜리로씨야정부가 《심한 위험하에 있는 국왕의 신변을 보호》한다는 명목밑에 20명의 해군을 조선왕궁에 끌어들이고 일본정부에 사건책임을 캐기 시작하자 일본외무성 대신대리 사이온지는 주일 짜리로씨야공사에게 접근하여 책임변명에 급급하는 한편 짜리로씨야주재 일본공사 니시에게 《로씨야정부의 량해를 구하기 위하여 가능한 방도를 다 강구할것》을 지시하였는데 이것은 일본정부가 짜리로씨야의 비난을 무마하고 사건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얼마나 미쳐돌아갔는가를 잘 보여준다.

일본이 각국 외교대표들을 기만하기 위하여 갖은 발악을 다하였으나 사태는 놈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난감한 처지에 빠진 일본침략자들은 할수없이 외교적경험이 풍부하다고 하는 전 조선주재 일본공사 이노우에를 조선에 파견하여 형세를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조선에 이노우에를 파견할 때 일본정부가 《귀하는 한국주재 각국 사신들과의 오랜 교재를 리용하여 그들과 상담하라. 귀하는 조선의 사정에 밝음으로 해당한 대책을 세우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외국인들의 비난과 여론을 무마하고 어떻게 하나 사건의 책임을 조선사람들에게 넘겨씌우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할것을 지시한것이였다.

서울에 기여든 이노우에는 조선봉건정부에 《사건을 도발한 조선인들을 속히 처벌하라.》는 강도적인 요구를 들이댄 후 친일주구들을 사촉하여 박선, 리주회, 윤석우 등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혐의자》로 체포하여 특별법원에서 심의하도록 강요하였다.
이것은 사건의 책임이 조선사람들에게 있다는것을 실지 증명해보임으로써 조선주재 외교대표들의 이목과 여론을 기만하기 위한 일제의 교활한 책동이였다.

을미사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본침략자들의 교활한 책동은 셋째로, 명성황후살해사건에 참가한 범죄자들을 《체포》하여 일본으로 빼돌렸다가 《무죄》로 석방한 사실에서 찾아볼수 있다.

일본침략자들이 명성황후살해사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사건이 마치도 조선사람들의 소행인듯이 선전도 하고 외국대표들에게 납득도 시켜보려고 각방으로 발악하였으나 진실은 절대로 가리울수도 감출수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침략자들의 교활성과 강도적론리는 낱낱이 까밝혀지게 되였다.

교활한 일본침략자들은 살인범죄자들을 일단 《체포》하였다가 《무죄》로 석방하는 방법으로 사건을 무마하려고 꾀하였다.

《히로시마옥》이라고 하는 이 연극은 미우라와 오까모도 등 40여명의 범죄자들을 《체포》하여 일본의 우지나항에 도착시킨 때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일본정부는 범죄자들이 서울을 떠나자마자 어용선전기관들을 동원하여 미우라 일행이 《애매》하고 《무고》한 사람들이기때문에 처벌을 받을것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야 한다는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을뿐아니라 그들이 일본의 우지나항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요란한 군중환영까지 조직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한 출판물은 《당시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국민의 감정은 절대하였으며 심후하였다. 피고 등이 우지나부두에 도착하자 각지에서 모인 환영자들은 연도에 줄을 짓고 피고일행에 대하여 심대한 동정과 열정적환영을 표시하였다. 그 광경은 흡사 개선군을 환영하는것과 같았다.》라고 전하였다. 여기에는 살인범죄자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태도와 립장이 그대로 반영되여있었다.

사실 일본정부는 이때 애당초 범죄자들을 법에 따라 처벌하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고있었다.

히로시마현 예심당국은 내외의 여론을 기만하기 위하여 처음에 범죄자들을 《수감》하고 엉터리조서를 꾸며 그들의  《무죄》를 공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취조》행정에서 일부 범죄자들이 사건의 진상에 대하여 사실대로 고백하였기때문에 예심조서를 모두 거짓으로 꾸밀수 없었다. 예심조서에는 《피고 미우라 고로는…피고 스리무라, 오까모도와 공사관에서 회합하고 …모의한 끝에 장년배들을 리용하여 비밀리에 서울의 우리 수비대와 함께 왕후페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들에게 《왕후페하를 살해할 취지를 알려주고 위임하였다.》라고 기록되여있었다.

이것은 사실그대로 미우라가 명성황후살해사건의 직접적인 선동자, 조직자, 집행자였다는것과 기타의 일본인들이 거기에 직접 가담하였다는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것이였다.

법적문건인 이 예심조서가 진실을 부정하지 못하고 사실그대로 작성된것만큼 일본정부는 응당 범죄자들에게 형벌을 주어야 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예심조서를 제쳐놓고 미우라를 비롯한 살인마들을 《증거불충분》이라는 구실을 붙여 전원 《무죄》석방하였으며 그들을 《공로자》로 찬양하면서 중요한 직무에 등용하여 다시 조선침략에 내몰았다.

이처럼 일본침략자들은 기만적인 연극을 통하여 명성황후살해사건의 책임을 조선사람들에게 넘겨씌우려고 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을미사변의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교활한 권모술수를 다 썼으나 명성황후살해의 범죄적인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

오늘도 일본반동들은 19세기말에 있은 명성황후살해의 대범죄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고 성근하게 반성할대신 과거 저들의 침략력사를 전면외곡부정하고 그 책임과 배상에서 벗어나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고있다.

북과 남, 해외의 전체 조선민족은 지난날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우리 민족에게 참을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강요한 천년숙적 일본침략자들의 침략력사를 한시도 잊지 말고 일본반동들의 재침야망책동을 단호히 짓부셔버리며 조선민족에게 끼친 피해의 대가를 기어이 받아내기 위하여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할것이다.

 

 

 

김일성방송대학 리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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