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품에서 영생하는 애국의 삶
ㅡ 애국인사 홍동근 ㅡ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 참된 삶을 빛내인 인간의 생은 민족사와 더불어 영생하게 된다.

위대한 태양의 품에서 참된 삶의 보람을 찾고 영생하는 수많은 유명무명의 애국인사들속에는 홍동근선생도 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사람은 자기 개인의 리익보다 조국과 민족의 리익을  귀중히 여기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서 삶의 보람과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홍동근선생은 남조선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 조국의 통일, 해외동포들의 단합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애국인사이다.

홍동근목사는  1926년 평안북도 피현군에서 출생하여 남조선과 일본, 미국 등지에서 그리스도교목사로 활동해왔다. 그는 일찍부터 나라의 독립을 위한 길에 나섰던 아버지의 영향속에서 애국, 애족의 마음을 간직하고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의 혁명활동을 적극 도와나섰던 애국인사였다. 

1921년에 처음으로 김형직선생님을 알게 되였던 홍동근의 아버지는 1923년부터 피현군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모금사업을 책임지고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가 1937년에 세상을 떠났다. 평안북도 피현군에서 의사로 일하던 그의 아버지는 환자들을 치료해주고 번 돈을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김형직선생님에게 보냈다고 한다.

당시 어린 홍동근선생은 자기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일을 도와 자주 외투주머니에 돈(군자금)을 넣고나가 은행에 보내던 일들과 집에 자주 드나드는 김형직선생님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뒤바라질을 하던 일들을 목격하게 되였다. 그때 어머니는 이에 대해 그들이 집에 와서 하는 일이란 자는것(밤에만 활동한다는 의미에서)과 생쌀을 먹는것뿐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 문학에 뜻을 두고있었던 홍동근선생은 1943년에 중학공부를 마치고 대학 문학과를 지망하였으나 학도병에 걸려들어 그것을 피한다는것이 그리스도교에 입교하게 되였고 나중에는 목사가 되였던것이다.

목사로서 해외에서 활동하던 홍동근선생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애국, 애족의 뜻이 간직되여있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 남조선에서 《유신》독재를 반대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하였으며 통일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그러던 그가 조국의 따사로운 품에 안기게 된것은 1980년대 초였다.

당시 서유럽자본주의사회에서 살고있던 적지 않은 해외동포들이 공화국에로의 방문을 말그대로 《대용단》으로 여긴것처럼 홍동근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자본주의사회에서 우리 공화국에 대한 악의에 찬 비방선전만을 해왔기때문에 해외동포들에게 있어서 공화국의 사람들이 한혈육으로 인식된것이 아니라 티끝만한 인정도 없고 겨레도 모르는 《빨갱이》, 《악한》으로 간주되여있었던것이다.

하기에 해외동포들은 우리 공화국에로의 방문의 길에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한번은 고향에 있는 선친들의 산소에 술이라도 부어야겠다는 생각만은 지울래야 지울수 없었다. 그러기에 처음 《대용단》을 내리고 공화국에로의 방문길에 나선 해외동포들가운데는 유서까지 써놓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홍동근선생도 이러한 사람들중의 하나였다.

그가 고향을 방문해야겠다는 말을 꺼내자 그의 안해 홍정자는 북에 가면 죽는데 제정신인가고 무작정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십년세월 부모님들께 자식의 효도를 못하였다는 죄책감을 항상 안고 살던 그로서는 안해의 말에 흔들릴수 없었다. 조국으로 떠나기 전날 안해는 온밤 눈물을 흘리며 생리별이나 당하는것처럼 통곡하면서 그를 만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기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태평양을 날아넘는 비행기안에서 전날밤을 밝힌 그였으나 눈한번 붙여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공화국북반부에서 자기를 어떻게 대해주겠는가 하는 근심과 기대, 망설임이 엇갈린 불안한 심정이 그를 그토록 긴장시켰던것이다. 비행기가 중국 베이징비행장에 내려 수속을 하는 동안 그는 드디여 내가 《공산국가》에 들어섰구나 하는 공포감으로 하여 도저히 마음의 안정을 이룰수 없었다. 비행기가 압록강을 날아넘을 때 그는 시창아래로 10대에 떠나 수십년세월 한시도 잊어본적이 없는 정든 고향 피현땅을 눈물속에 찾느라고 애를 썼다.

 그의 이런 불안감과 망설임을 약간이나마 풀린것은 평양비행장에 내린 그때부터였다. 평양비행장에서는 해외교포총국(당시)에서 일한다고 자기 소개를 한 사람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띠우며 《목사님의 조국방문을 열렬히 환영한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고려호텔에 려장을 풀고 다음날부터 계획된 방문일정에 따라 평양시와 그 주변을 참관하면서도 홍동근의 심중에는 고향 피현에 가고싶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겠는가 하는 근심이 떠나지 않았다. 드디여 어느날 안내원에게 자기의 속생각을 조심히 내비치게 되였다. 그런데 안내원은 너무나도 선뜻 인차 고향을 찾아가자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평생소원이다싶이 하였던 고향방문이 실현되게 되였다. 며칠후 고향으로 가는 차안에서 홍동근은 이제 자기를 맞아줄 일가친척들은 대체 누구누구이며 그들이 자기를 어떤 낯으로 대할것인가 등 가지가지의 근심과 우려, 기대, 희망 등으로 마음의 안정을 이룰수가 없었다. 그런데 승용차는 피현쪽이 아니라 어느 탄광지역으로 들어가는것이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피현에 있던 그의 집이 구장으로 이사하였던것이다.

 그는 구장에서 천만뜻밖에도 정정하게 살아계시는 늙은 어머니를 만나게 되였다. 이제는 세상을 떠났을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는데 수십년세월 문안인사 한번 변변히 올리지 못한 불효막심한 자식인 그가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떤 심정이였겠는가.

늙은 어머니는 몇십년동안 자기의 품을 떠났던 아들이였지만 반가움보다도 50이 넘은 그를 어린 아이처럼 무릎을 꿇게 하고는 장시간 욕부터 하였다고 한다. 글을 배우지 못한 어머니인지라 처음하는 꾸짓음이란 가서 살데가 없어서 우리와 제일 원쑤진 나라에 가서 사느냐 하는것이였다고 한다. 죄를 지은 자식인지라 홍동근선생은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예》, 《잘못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어머니가 욕을 하면 다시 머리를 숙이기를 몇십번이나 반복하였다.

그러나 그런 죄의식은 순간에 사라지고말았다.

멀리 미국땅에서 사는 아들이 어머니를 찾아왔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탄광마을에 퍼져 동네사람들이 닭알이며 감자 등 소박한 음식들을 가지고와서 어머니와 아들의 수십년만의 해후를 진심으로 축하하였으며 어떤 늙은이들은 홍동근의 손을 잡고 눈물을 떨구며 울기까지 하였다..

홍동근으로서는 상상밖의 일이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의 참뜻을 문자그대로 페부로 체험하는 그런 일들이 매일 매시각 벌어졌다.

다음날 아침부터 탄광마을의 청신한 공기를 마시면서 조카들의 손목을 잡고 산보길에 나선 홍동근은 자기가 옳은 결심을 하였다는것과 다시는 내 조국, 어머니품을 버리지 말고 고향의 어머니와 조국동포들앞에 떳떳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였다. 후날 그는 그때 자기가 받은 충격을 평생 잊을수 없노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파란만장의 이역살이를 하던 홍동근선생은 드디여 조국의 품에 자신을 맡기에 되였다.

홍동근선생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품에 안기에 되였는가에 대해서는 그 후에야 똑똑히 알게 되였다.

당시 홍동근선생이 그리스도교목사로서 해외에서 벌린 애국활동에 대해 보고받으신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김일성종합대학의 초빙교수로 활동할데 대한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그리하여 그는1990년대 초부터 2001년 초까지 김일성종합대학의 초빙교수로 활동하게 되였으며 비로소 인생의 참다운 길을 걷게 되였다.

동포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면서 조국에 오게 된 그는 남다른 책임과 의무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때 그는 자기가 초빙교수가 되였다는것을 소개한 해외동포사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을 보여주면서 《김일성주석과 김정일비서님의 하해같은 은덕에 보답해야겠는데 힘이 자라겠는지 걱정》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는 우리 당의 크나큰 믿음과 신임에 보답하고저 정력을 다하여 우리 공화국의 현실을 해외에 널리 선전하였으며 공화국에 대한 글들을 많이 발표하여 동포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초빙강사로서 강의를 통하여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위인상을 선전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한번은 그가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김일성주석은 참 성서적인 분이예요.》 라고 말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그가 어떠한 심정으로 숭상하고있는가를 충분히 리해할수 있는 말이였다. 수령님을 성서적인 분이라고 한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언제나 인민대중속에 계시면서 자신의 모든 심혼을 인민을 위한데 바치신다는것이라고 그는 설명을 하였다.

또 한번은 그가 강좌선생들에게 다음날에 할 강의안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조선의 모세 – 김일성주석》이라는 글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목사로서 이것은 우리 수령님에 대한 최대의 존칭이였다.

 (※ 모세는 유태교의 조상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교신자들이 하느님의 예언자로 보고있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오늘 유태교신자들은 말할것도 없고 그리스도교신자들까지도 모세를 유태민족을 구원한 영웅으로, 하느님의 뜻을 가장 완벽하게 체현한 리상적인 존재로 보고있다.)

그가 공화국에 와서 강의를 하고있을 때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이 출판되여 우리 인민은 물론 온 세계의 진보적인민들로부터 폭풍같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있었다.

회고록을 받아안은 홍동근목사는 흥분된 마음으로 밤을 밝히면서 단숨에 그 책을 다 읽었다. 며칠후 그가 자기가 본 회고록을 선생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너무나도 많은 페지들에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밑줄이 그어져있었다.

그가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에서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았는가 하는것은 회고록의 한구절을 읽어주고난 다음에야 매번 강의를 시작한데서도 잘 알수 있다. 그는 수령님의 회고록이 《민족의 지평을 길이 보여주며 미래를 전망케 하는 성서같은 책으로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군 하였다.

(※ 그리스도교에서는 설교를 할 때 언제나 그 주제가 되는 성경의 구절을 읽고 시작하는것이 관례이다. 목사가 회고록을 읽어주고 강의를 시작한것에 대해서는 이러한 리해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에 그는 밤을 새워가면서 수령님의 회고록 1, 2권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담은 독후감을 써서 해외동포원호위원회에 보내고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잡지에도 실었다.

 그후 어느 해인가 조국을 방문한 그는 뜻밖에도 자기가 쓴 글을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아주시고 잘 썼다는 치하의 말씀을 하시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달받게 되였다. 너무나도 감격한 그는 꿈이 아닌가 하면서 의심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그후에도 조국에 오는 기회에 회고록 3, 4권에 대한 자신의 격동된 심정을 담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와 《백두산의 노래》를 집필하여 해외동포들과 우리 인민들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94년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시였다는 비보에 접한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것만 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그는 그때 공화국에 와서 받은 감상에 대해 그후 여러 기회에 자기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는 영결식장에서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고, 인민의 마음속에 수령님께서 화인을 찍어놓으시여 우리 인민이 수령님을 잊지 않는다고 하면서 미국의 카터대통령도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뵈옵고 그 인품에 완전히 매혹되였었다, 수령님께서 서거하셨다는 비보를 듣고는 카터가 장의식에 가겠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카터의 심장속에  주석의 령이 도장찍혀졌다는것을 의미한다,  주석의 령이 카터의 심장속에 들어간것이라고 격정에 넘쳐 말하였다. 그리고 미국 CNN이 6시간동안이나 어버이수령님과 영결하는 조국인민의 모습을 TV로 방영하였는데 이것도 그 주최자들의 심장속에 주석의 령이 들어갔기때문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애도기간 홍동근선생은 어버이수령님의 령전을 찾는 기회에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뵈옵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그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먼곳에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의 격정을 자주 이야기하면서 그는 김일성주석께서 비록 세상을 떠나셨지만 자기는 조국인민들이 김정일장군님을 잘 받들어서 주석의 뜻을 꼭 실현하리라고 믿는다는것과 자신도 그것을 위해 계속 기도하겠다고 맹세했다.

1994년 겨울 다시 조국을 방문한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만수대동상을 두번 순례하면서 받은 감상은 우리 수령님과 장군님은 한분이시라는것, 주석께서는 비록 몸으로는 가셨지만 민족목표의 뜻으로는 우리와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느낌이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남다른 흠모의 감정을 가지고있었기에 그의 안해 홍정자도 여러차례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재미예술단을 이끌고 와서 수령님을 흠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되였던것이다.

언제인가는 안해가 자기에게 총련의 학생들이 원산부두에 내리는데 그들모두가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있더라고 하면서 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이말을 하면서 해외에서 사는 동포들에게 그처럼 성스럽고 거룩한 땅이 바로 조국이라고 말하였다.

홍정자는 조국을 여러차례 방문하는 기회에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고 받은 충동을 금할 길이 없어 다음해  어머님을 칭송하는 글을 써서 출판하였다.

이와 같이 홍동근선생은 우리 수령님과 장군님에 대한 남다른 흠모의 정과 조국인민들에 대한 뜨거운 동포애적인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10여년을 정력적인 집필과 조국에서의 강의로 민족의 통일과 우리 나라 사회주의에 대한 선전을 진행하여왔다.

재미동포전국련합회 고문이였던 홍동근선생은 생의 마지막시기에도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위업에 이바지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왔다.

이미 도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와 《백두산의 노래》를 집필하여 만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그는 어버이수령님탄생 90돐을 맞으며 《김일성주석 덕성일화 100》을 쓰기로 결심하고 불철주야로 집필활동을 벌리였다. 그 나날에 선생은 방대한 자료작업을 마치고 초고를 탈고하였으며 마지막 마무리작업을 하기 위하여 조국을 방문하였다.

선생은 오랜 기간의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2001년 11월 조국에서 글을 집필하던 중 책상을 마주한채 세상을 떠났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생을 애국애족의 마음과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열렬한 흠모심을 간직하고 살아온 그의 삶을 길이 빛내여주시기 위하여 뜨거운 은정을 돌려주시였다.

주체90(2001)년 11월 11일 재미동포 홍동근선생이 조국에 체류하던중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에 접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며 미국에서 그의 가족이 조국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례를 치르도록 하여주시였다.

11월 17일 홍동근선생의 가족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친 그의 삶을 길이 빛내여주시기 위하여 뜨거운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의 애국충정을 높이 평가하시여 《통일신보》에 부고를 내도록 하시고 조의식장을 해외동포영접국에 꾸려놓고 조의를 표시하며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여주시였다.

선생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는 영결식은 11월 19일에 진행되였다.

 이렇게 되여 고인과의 영결식은 근 10일간이나 늦어져 수륙만리 이국땅에 있던 유가족들이 고인의 령전에 도착한 다음에야 거행되였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한없는 은정에 접한 선생의 안해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돌려주신 배려에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홍목사는 늘 말하기를 자기가 죽으면 조국땅에 묻어달라고 하였는데 그 소원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풀어주시였습니다. 저의 주인은 〈래세의 천당〉이 아니라 현세의 천당인 장군님의 품에서 영생하게 되였습니다.》라고 격정에 넘쳐 말하였다.

참으로 홍동근선생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에서 애국의 길에 들어서고 참된 삶을 산 애국인사이다.

홍동근선생의 애국의 삶은 해내외 애국적인 종교인들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당의 품이야말로 애국, 애족, 애민을 지향하는 민족성원모두를 안아주는 대하와 같은 품이라는것을 말해주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을 모시여 온 겨레가 이 위대한 품에 안겨살 그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것이다.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신계호

김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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