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5조약》의 원안이 《코레아 데일리뉴스》에 류출된 문제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일제의 조선강점을 전후한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종 형태의 반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여왔습니다.》

일제가 1905년 11월 17일 국권강탈을 규정한 《을사5조약》을 날조하였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조선인민은 비분강개하여 그것을 반대배격하는 전인민적인 항쟁을 개시하였다.

《을사5조약》을 반대하는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은 조약이 날조되기 직전인 17일 오전에 영문신문 《코레아 데일리뉴스》의 호외가 조약내용을 폭로한것을 계기로 벌어졌다. 그러나 이 력사적사실에 대하여서는 오늘까지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코레아 데일리뉴스》는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으로 발행된 이후 1905년 8월 11일부터 분리되여 따로 영문지로 발간된 일간신문이다. 창간자는 조선인민의 반일운동을 동정하면서 긍정적으로 활동한 영국인 베델(조선이름은 배설)이다.

《코레아 데일리뉴스》호외에 《을사5조약》원안이 류출된것과 관련한 자료로서 현재까지 알려진것은 주조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께가 일본외무대신 가쯔라 다로에게 보낸 1905년 11월 18일 전보문뿐이다. 여기서 하야시는 《<코레아 데일리뉴스>는 어제(11월 17일) 지상에 지난 15일 이또대사가 한황(황제 고종)에게 내알현(왕궁에서 국왕과 회견)하였을 때의 정보인 대사가 일본의 요구라고 하여 제시한 4개 조항을 실었다.

1. 황제아래 전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일본인통감을 임명할것.

2. 각 개항장에 일본인행정관을 임명할것.

3. 한국외교사무를 도꾜에 옮길것.

4. 일본의 승낙없이 어떠한 교섭도 다른 나라와 할수 없게 할것.》이라고 하였다.

하야시가 가쯔라에게 보낸 전보문을 보게 되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제기된다.

그것은 첫째로, 《을사5조약》조항은 모두 5개 조로 구성되여있으므로 《코레아 데일리뉴스》에 실린 4개 조는 《조약》조작과정의 어디에서 제시된 초안인가 하는것이다.

이것은 《을사5조약》조작경위를 따져보면 알수 있다. 원래는 1905년 4월 8일 일본정부에서 결정한 《한국보호권확립의 건》의 4개 조가 《조약》의 기본원안이였다. 그후 10월 27일 《한국보호권확립실행에 관한 각의결정의 건》에서 그 4개 조의 내용이 수정구체화되였다. 이어 11월 17일 《일한협약안 문장수정개소에 관하여》에서 1개 조항이 첨부되였으며 모두 5개 조항으로 조작날조되여 그해 12월 16일 《관보》를 통하여 세상에 공포되였다. 그러니 《코레아 데일리뉴스》에 실린 4개 조항은 10월 27일 《한국보호권확립실행에 관한 각의결정의 건》에 기재된 4개 조항을 반영한것임을 확인할수 있다.

그것은 둘째로, 《을사5조약》공포전까지 극비로 간주되던 《조약》원안이 어떻게 《코레아 데일리뉴스》에 류출되였겠는가 하는것이다.

일본정부는 1905년 11월 2일 추밀원 의장 이또 히로부미에게 황제 고종과 만나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그를 굴복시켜 《조약체결》을 기어이 성사시키도록 전권을 위임하고 조선에 파견하였다.

11월 15일 고종과 이또사이에 면담이 벌어졌다. 여기에는 주조일본공사관 서기관 고꾸부 쇼다로와 통역 박용화가 참석하였다.

박용화는 고종과 이또간의 약 4시간에 걸친 면담을 통역한 사람으로서 누구보다도 면담내용을 잘 알고있었다. 바로 그가 이또가 고종에게 제시하고 강박한 조약원안 4개 조를 신문사에 투고한 당사자였다. 이에 대하여 공사 하야시가 《이 기사는 통역관 박용화외 루설하는자가 없을것이니 그를 엄중히 취조할것이다.》고 떠벌인데서 그것을 확정할수 있다.

박용화는 황제의 측근인물로서 이미전부터 일제의 음모책동을 간파하고 고종의 반일운동을 추동하고있었다. 이에 대하여 하야시가 《박용화는 … 황제와 어떤 비밀교환이 있었다고 보아도 틀림없다.》고 한데서 잘 알수 있다.

박용화는 조선침략의 괴수 이또가 고종을 협박하고 국권을 일본에 넘길것을 강박하는 광경을 직접 보고 민족적울분을 참지 못해 이또가 제시한 조약원안을 대담하게 세상에 발표한 32살의 반일애국청년이였다.

그것은 셋째로, 《코레아 데일리뉴스》의 기사가 국내외에 어떤 영향을 주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현재까지 《코레아 데일리뉴스》기사가 국내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단정할수 있는 자료는 아직 찾아볼수 없다. 그러나 《을사5조약》이 날조된 11월 17일직후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을 통하여 일제가 국권강탈을 규정한 《조약》을 날조하였다는 소식들이 련일 폭로된 사실, 11월 18일부터 30일까지 40여통의 《을사5조약》을 반대배격하는 상소문이 올라 황제를 《을사5조약》무효화투쟁에로 고무추동한 사실들은 《코레아 데일리뉴스》의 영향을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특히 11월 20일 베를린에서 발간된 신문 《로깔 알쯰이겔》지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이란 표제아래 《… 한제국은 장래에 있어서도 의연히 그 명칭으로서 존재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일본국의 한개 주로 되였다.》고 그 침략적본질을 예리하게 밝혔다.

이 기사는 《을사5조약》이 날조된지 3일만인 20일에 실린것이다. 그런데 《을사5조약》의 내용은 극비문건으로 취급되여오다가 미국을 비롯한 유미렬강들에 공식 통보된것이 11월 23일이후였다.

그러므로 도이췰란드신문 《로깔 알쯰이겔》기사는 그 통보에 앞서 《코레아 데일리뉴스》 호외의 기사내용에 기초하여 발표되였다고 볼수 있는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야시는 《본관은 기사(<코레아 데일리뉴스>)와 같은 오해를 한국대신들이 가져 동요하는것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있다. 신문통신원들이 우의 기사에 기초해서 전보를 발신하는자가 있을수 있다.》고 한데서 그것을 방증할수 있는것이다.

이와 같이 《을사5조약》원안이 《코레아 데일리뉴스》에 류출된 자료를 통하여서도 우리는 일본이야말로 비법적이고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조선봉건정부의 국권을 강탈한 조선민족의 천년숙적임을 다시한번 잘 알수 있다.

박사 부교수 리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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