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일  성

 항일혁명렬사유자녀와 한 담화

 

1994년 6월 2일

 

오늘 량귀동녀와 이렇게 만나니 매우 반갑습니다. 량귀동녀와 1936년에 청구자밀영에서 헤여졌으니 우리는 58년만에 만난셈입니다.

나는 량귀동녀를 잊지 않고있었지만 소식이 없다보니 어디에서 살고있는지 알수 없었고 또 늘 사업이 바쁘다보니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량귀동녀가 조국이 해방된 다음 나에게 편지라도 하였더라면 우리는 인차 만날수 있었을것입니다. 량귀동녀를 너무 늦게 찾은것이 가슴아픕니다. 량귀동녀가 지금까지 나를 만나지 못한것이 자기의 잘못이라고 하는데 량귀동녀를 제때에 찾지 못한데는 우리 일군들의 잘못도 큽니다. 한때 우리 당안에 기여들었던 반당종파분자들은 나와 연고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나를 만나지 못하게 방해하였습니다. 당력사연구소가 조직된지 오래 되였지만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전원회의가 있은 다음에야 혁명력사자료발굴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와 연고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제때에 찾아낼수 없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량귀동녀를 만나고보니 량성룡의 생각이 납니다. 량귀동녀의 아버지 량성룡은 항일혁명투쟁시기의 나의 혁명전우입니다. 나는 1926년에 화전에서 우리의 첫 혁명조직으로 타도제국주의동맹을 내오고 그 성원들을 핵심으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준비를 적극 벌려나갔습니다. 《ㅌ.ㄷ》의 성원들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투쟁의 앞장에서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희생되였습니다. 《ㅌ.ㄷ》시절부터 나와 함께 투쟁하여온 동지들이 이제는 없습니다. 나는 1931년 12월에 연길현 명월구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열고 유격전의 형식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할데 대한 방침을 내놓았습니다. 그 회의에 량성룡과 김중권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참가하였습니다. 명월구회의는 우리자체의 힘으로 무장을 해결하여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할것을 결정한 력사적인 회의였습니다. 나는 명월구회의후 전반적인 유격대조직사업을 지도하면서 안도에서 직접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1932년 4월 25일에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세상에 선포하였습니다. 그후 연길, 왕청, 훈춘, 화룡을 비롯한 동만의 다른 지방들에서도 유격대들이 련이어 조직되였습니다. 왕청에서는 량성룡이 주동이 되여 유격대를 조직하고 화룡에서는 김일환이 주동이 되여 유격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왕청유격대를 조직하는데서 리광, 김중권, 최춘국도 핵심적역할을 하였습니다. 김중권은 1934년에 적들과 싸우다가 희생되였는데 그때 그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김중권의 아들이 지금 인민군대의 중요한 위치에서 사업하고있습니다.

나는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선포한 다음 1933년 봄에 투쟁무대를 안도로부터 왕청으로 옮겼습니다. 그때 왕청에 가보니 량성룡이 유격대를 조직하였는데 그 력량이 70∼80명정도 되였습니다. 량성룡은 유능한 유격대지휘관이였습니다. 그는 1935년에 왕청현에서 있은 한 전투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습니다.

우리는 항일혁명투쟁시기에 귀중한 동지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량귀동녀가 조국에 와서 혁명렬사릉에 세운 아버지의 반신상을 찾아가보았다고 하는데 우리 당에서는 희생된 항일혁명렬사들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하여 대성산에 혁명렬사릉을 건설하였습니다. 마음같아서는 희생된 항일혁명렬사들을 모두 혁명렬사릉에 안치하고싶었지만 그렇게 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희생된 항일혁명렬사들가운데서 핵심적인 지휘관들의 유골만 거기에 안치하고 그들의 반신상을 해세웠습니다.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되면서 나에게 앞으로 조국을 광복한 다음 자기의 가족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유언을 잊지 않고 해방후 림춘추동무를 비롯한 항일혁명투사들과 일군들을 중국과 국내의 여러지방에 파견하여 혁명가유자녀들을 모두 찾아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쏘련은 사회주의나라였으므로 우리 혁명가들의 유자녀들을 잘 돌봐주리라고 믿고 거기에 가있는 유자녀들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해방직후 나라의 형편이 몹시 어려웠지만 나는 만경대혁명학원을 세우고 여러곳에서 데려온 유자녀들을 공부시켰습니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유자녀들로 친위중대를 조직하여 그들을 나의 곁에 두고 늘 돌봐주었고 전쟁이 끝날무렵에는 그들을 쏘련을 비롯한 사회주의나라들에 류학을 보내여 공부시켰습니다. 우리 당의 품속에서 수많은 유자녀들이 당과 국가, 군대의 핵심간부로 자라났으며 그들가운데는 지금 정무원총리를 하는 동무도 있고 부총리를 하는 동무들도 있으며 도당책임비서를 하는 동무들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당력사연구소 부소장동무도 해방후 우리가 키운 유자녀입니다. 이 동무의 아버지가 바로 화룡유격대 조직자의 한사람이였던 김일환입니다. 이 동무의 어머니 리계순도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하여 잘 싸우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희생되였습니다. 일제놈들은 리계순에게 다시는 일본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겠다고 군중들앞에서 말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리계순은 일제놈들의 회유기만책동에 응하는척하면서 수많은 군중을 모이게 한 다음 그들앞에서 김일성장군은 건재해있으며 멀지 않아 김일성장군이 령도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광복할것이라는 연설을 하고 장렬하게 희생되였습니다.

우리가 애지중지 키워온 유자녀들이 이제는 모두 50살, 60살, 70살이 되였으며 그들의 자녀들이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하고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혁명의 대는 든든합니다. 세계에는 우리 나라처럼 혁명의 대를 튼튼히 이어가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혁명적당들과 진보적인민들이 우리 인민이 대를 이어 사회주의를 굳건히 지키고있는데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습니다. 이전 쏘련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진 다음 다시 공산주의적정당들이 많이 조직되였는데 이 당들도 한결같이 우리 당의 로선과 정책이 정당하다고 하면서 우리 혁명위업에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오고있습니다.

우리는 항일혁명투쟁시기에 부득이하여 량귀동녀를 쏘련에 들여보냈습니다. 내가 1936년 2월에 남호두회의를 끝마치고 백두산지구로 진출하면서 액목현 청구자밀영에 들렸는데 거기에서 부상자들과 부모잃은 어린이들이 나를 기다리고있었습니다. 그때 량귀동녀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나는 부상자들과 어린이들을 모두 데리고 백두산지구로 진출하고싶었지만 그때의 형편에서는 그렇게 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쏘련에 들여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량귀동녀와 헤여지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와 떨어지지 않겠다는 량귀동녀를 청구자밀영에 남겨두고 백두산지구로 떠났는데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량귀동녀의 말을 들어보니 그때 쏘련으로 가면서 고생을 많이 한것 같습니다.

나는 청구자밀영에서 북만원정에 데리고갔던 최춘국부대를 비롯하여 동만의 부대들을 북만의 부대들에 떨구어놓고 20명도 못되는 경위대원들을 데리고 백두산지구로 진출하였습니다. 내가 무송지구에 나와보니 그곳 형편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거기에는 100여명의 《민생단》혐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고있었습니다. 마안산아동단원들도 병마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추위에 떨고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불우한 처지를 보고 가슴이 아파 견딜수 없었습니다.

나는 《민생단》혐의자들을 대담하게 믿고 그들로 새로운 부대를 조직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민생단》혐의자들을 다 모이게 한 다음 그들이 보는데서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불태워버렸습니다. 나는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불태우면서 그들에게 《민생단》은 일제놈들이 만든것인데 지금부터 이 자리에는 《민생단》에 든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 동무들이 실지로 《민생단》에 들었다면 무엇때문에 지금까지 일제놈들에게 투항하지 않고 산에서 고생하면서 우리를 따라다녔겠는가, 동무들이 오늘부터 《민생단》이 아니라는것을 선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을 믿어주는것이 너무 고마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나는 《민생단》혐의자들로 새로운 부대를 조직하였습니다.

나는 마안산아동단원들에게 옷도 해입혔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어머님께서 주신 돈 20원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돈 20원으로 무송시내에 내려가 천을 사오게 하였는데 그 천을 가지고서는 아동단원들에게 옷을 다 해입힐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송에 있는 장울화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장울화는 나의 편지를 받고 많은 량의 천을 사서 보내주었습니다. 나는 그 천으로 아동단원들뿐아니라 《민생단》혐의를 받았던 대원들에게도 옷을 다 해입혔습니다.

장울화는 중국사람인데 우리의 투쟁을 목숨으로 도와준 나의 혁명동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무송에서 이름난 큰 부자였습니다. 나는 장울화가 유격대에 들어와 싸우겠다고 하는것을 만류하고 아버지가 큰 부자라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무송에서 지하공작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송에 《형제사진관》을 차려놓고 사진업을 하면서 혁명사업을 하였습니다. 나는 장울화를 1932년에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다음 남만원정을 할 때 만났고 1936년에 무송현 묘령에서 만났습니다. 그후 대영온천마을에서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대영온천마을에서 나를 만나고 간 장울화는 그해 가을 갑자기 헌병대에 끌려갔습니다. 적들에게 그를 밀고한것은 한때 백산청년동맹 무송현지회 회장으로 활동한 일이 있는 정학해였는데 그는 나의 소학교시절의 동창생이였습니다. 정학해는 초기에 혁명바람을 피우면서 얼마간 돌아다니다가 일제놈들에게 체포된후 변절하여 《귀순공작대》에서 주구노릇을 하고있었습니다. 어느날 정학해는 장울화를 찾아와 자기가 지금 김일성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장울화는 정학해가 이전에 나의 지도를 받으면서 청년운동을 한 사람이라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에 그를 의심하지 않고 나를 만난 사실을 다 말하였습니다. 그후 인차 장울화는 정학해의 밀고로 헌병대놈들에게 체포되였습니다.

적들은 장울화를 통하여 우리 사령부의 위치와 무송지구지하조직망을 알아내려고 그에게 온갖 악행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들에게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울화는 적들의 고문이 심해지면 정신을 잃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헛소리로 나의 위치와 조직선을 루설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며칠간만이라도 집에 나와있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장울화의 아버지는 헌병대놈들에게 돈과 뢰물을 먹이고 아들을 병보석으로 집에 내왔습니다. 장울화는 집에 나와있으면서 나에게 적들이 특무를 파견하여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찾고있으니 사령부의 위치를 빨리 옮기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 다음 사진현상약을 먹고 자결하였습니다. 장울화는 나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나는 해방후 장울화가족들의 소식을 모르고있다가 1985년에야 그의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장울화의 아들 장금천이 보낸 편지를 받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우리 나라를 방문한 기회에 그에게 장금천을 만나려고 하니 우리 나라에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장금천이 우리 나라에 오게 되였습니다. 장울화의 아들 장금천이 아주 똑똑합니다. 장울화의 유가족들이 우리 나라를 여러번 방문하였습니다. 장울화의 안해는 이미 세상을 떠났기때문에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최근년간에 장울화의 유가족들이 자주 우리 나라에 오는데 그의 손자와 외손녀는 평양에 있는 국제관계대학에서 공부하고있습니다.

량귀동녀가 전문진동무를 쏘련에 같이 들어갈 때 알게 되였다고 하는데 전문진동무의 70돐생일상과 80돐생일상을 김정일동지가 다 차려주었습니다. 전문진동무는 왕청에 있을 때 나에게 군복을 지어주었습니다. 내가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한 다음 부대를 거느리고 왕청에 가니 그곳 재봉대원들이 청년장군이 왔는데 좋은 옷을 지어드리자고 하면서 군복과 외투를 일식으로 성의껏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때 전문진동무가 바느질을 제일 곱게 하였습니다. 전문진동무가 젊었을 때에는 몸이 약했는데 지금은 앓지도 않고 몸도 났다니 좋은 일입니다.

량귀동녀에게 아들 3명, 딸 3명과 손자, 손녀 11명이 있으면 자손들이 많습니다. 량귀동녀의 아들딸들은 이국땅에서 살지만 조국을 잊지 말고 외할아버지처럼 훌륭한 혁명가가 되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합니다.

량귀동녀는 이번에 조국에 온 기회에 병치료를 받고 가야 하겠습니다. 먼저 이를 해넣는것이 좋겠습니다. 이를 해넣자면 한달가량 시일이 걸려야 합니다. 우리 의사들이 량귀동녀를 진찰해보고 영양부족으로 몸이 쇠약해졌는데 영양을 보충하고 몸관리를 잘하면 인차 건강이 회복될것이라고 합니다.

량귀동녀의 남편이 백내장에 걸렸다고 하는데 빨리 고쳐주어야 하겠습니다. 백내장을 제때에 치료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눈이 못쓰게 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백내장을 수술하고 인공수정체를 해넣는것이 좋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인공수정체를 만드는데 백내장을 수술한 다음 그것을 넣으면 일생동안 일없습니다. 얼마전에 우리 의사들이 100살난 로인의 두눈을 수술하고 인공수정체를 해넣었는데 앞을 잘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로인이 아주 좋아한다고 합니다. 량귀동녀의 남편을 조국에 데려다 치료해주어야 하겠습니다. 량귀동녀의 남편이 지금 살고있는 까자흐스딴에서 눈치료를 받을수도 있겠지만 거기에서는 사회주의가 무너져 국가병원이 개인병원으로 되였으므로 백내장을 수술하고 인공수정체를 해넣는것과 같은 치료는 돈이 많이 들기때문에 받기 곤난할것입니다. 량귀동녀가 건강을 회복한 다음 돌아가 남편을 조국에 데리고오게 할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시일도 오래 걸리고 려비도 많이 들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까자흐스딴에 있는 우리 나라 대사관일군들에게 과업을 주어 량귀동녀의 남편을 조국에 빨리 데려내오도록 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량귀동녀의 남편을 조국에 데려내오는 문제를 당에 보고하고 대책을 세우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량귀동녀의 남편에게 다른 병은 없다고 하므로 눈만 치료하면 앞으로 한 10년이나 20년은 건강하게 살수 있을것입니다. 이번에 량귀동녀를 찾았는데 남편까지 잘 치료하여주면 우리가 량귀동녀부부에게 행복을 안겨줄수 있습니다. 량귀동녀와 그의 남편을 잘 치료하여 《신혼부부》처럼 만들어 까자흐스딴에 들여보내야 합니다. 량귀동녀가 자기 가정에 돌려주는 배려에 대하여 고맙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조국과 자기 수령, 자기 당의 품속에서만 행복을 누릴수 있습니다.

량귀동녀는 이제부터 마음을 푹 놓고 병치료를 한 다음 조국의 여러곳을 참관하는것이 좋겠습니다. 앞으로 량귀동녀의 남편이 조국에 와서 눈치료를 받은 다음 내가 량귀동녀를 다시 만나줄수도 있습니다.

량귀동녀는 조국에 머무르는 기간 당력사연구소 부소장동무와 같이 다니면서 조국의 현실을 보고 많이 배우는것이 좋겠습니다. 제기할 문제가 있으면 당력사연구소 부소장동무에게 제기하여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인차 알수 있습니다.

량귀동녀는 이번에 조국에 대하여 알게 된것만큼 앞으로 해마다 조국에 오는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조국을 더 잘 알게 되고 조국에 대한 정도 더 두터워질수 있습니다. 지금 재로씨야동포들가운데서 조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재로씨야동포인 정일심이 해마다 조국을 방문하고있는데 올해에도 자식들을 데리고 조국에 와서 휴식하고 얼마전에 돌아갔습니다. 정일심은 안동수의 부인입니다. 량귀동녀가 조국에 오려면 려비가 걸릴수 있는데 려비는 우리가 대주겠으니 해마다 아들, 딸, 손자, 손녀를 데리고 조국에 와서 휴식하는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온천이 많기때문에 조국에 오면 온탕도 하면서 병치료도 할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나라가 많지만 우리 나라처럼 살기 좋은 나라는 얼마 없습니다. 우리 나라 사회주의는 인민이 모든것의 주인으로 되여있고 모든것이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누구나 다 먹고 입고 쓰고사는데 대하여 걱정하지 않고있으며 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을 국가로부터 보장받고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무료의무교육제와 무상치료제의 혜택으로 모든 사람들이 돈 한푼 내지 않고 배우며 병치료를 받고있습니다. 아마 세상에 돈을 전혀 받지 않고 공부시켜주고 병을 치료해주는 나라는 우리 나라밖에 없을것입니다. 만일 나라가 분렬되여있지 않고 미제국주의자들과 직접 맞서있지 않다면 우리 인민은 지금보다 더 유족하게 잘살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이 남조선을 강점하고있는 조건에서 조국을 통일할 때까지 여러가지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면서 긴장하게 살며 투쟁하여야 합니다.

이번에 량귀동녀를 찾은것만큼 이제부터는 내가 아버지의 심정으로 량귀동녀의 건강과 생활을 직접 책임지고 돌봐주겠습니다. 까자흐스딴의 수도에 우리 대사관이 있기때문에 필요한 때에는 거기에 가서 조국에 전보도 칠수 있을것입니다. 량귀동녀는 나를 아버지로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