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적지배의 강화, 봉건적착취와 억압의 강화

 

△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적지배의 확대강화

조선봉건통치배들은 집권초기에 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 재편성하는것과 함께 전국의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적지배를 강화하는데 달라붙었다.

 ― 량전사업과 호패법의 실시

 ◦ 봉건통치배들은 량전사업을 여러차례에 걸쳐 진행하였다.

리성계일파는 이미 《위화도회군》직후 새 정권의 사회경제적지반을 마련하는 길에 들어서면서 《사전개혁》에 앞서 량전사업을 진행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국가적지배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량전사업을 통하여 리성계일파는 종전의 50만결에 비하여 30만결이나 더많은 80만결의 토지를 확보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정치정세가 불안정하였고 왜구(일본)의 침습도 완전히 끝장나지 않았으므로 량전사업을 전국적범위에서 철저히 진행할수 없었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저들의 정권이 일정하게 공고화됨에 따라 량전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량전사업은 지방별로 여러차례에 걸쳐 반복해가면서 신중하게 진행되였다. 대토지소유자들이 가지고있던 《사전》을 몰수하는 일은 리성계일파가 자기의 적수들의 토지를 빼앗아내는 사업이기때문에 폭력적방법으로 단꺼번에 진행할수 있었다. 그러나 집권후 15세기 초에 진행된 량전사업은 저들이 계급적으로 발붙이고있는 중소지주들이 가지고있는 은결, 여결을 밝혀내는 사업이였으므로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지않는 방향에서 점차적방법으로, 조심스럽게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봉건국가는 이러한 실정을 고려하여 량전사업을 단계별로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1401~1404년에는 전국적으로 93만여결의 토지를 장악하였다. 그후 1405년에는 량반들이 깊이 뿌리박고있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량전사업을 진행하였으며 1413년에는 평안도와 함경도지방에 대한 량전사업을, 1420년에는 제주도에서 량전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대체로 15세기 20년대에 량전사업을 일단락 짓게 되였다.

결과 봉건국가는 171만 9 800결(세종실록지리지)에 달하는 많은 량의 토지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토지에 대한 국가적지배를 확대하게 되였고 동시에 개별적봉건세력들의 팽창을 막고 국가의 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 강화할수 있게 되였다.

◦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였다.

조선봉건통치배들은 조세수탈원천을 통일적으로 장악하는 한편 장정로력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호구조사와 호패법을 제정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시켰다.

봉건국가가 호패법을 제정실시한 기본목적은 당시 기본생산대중인 량인과 노비들을 되도록 많이 장악함으로써 봉건국가의 기본수탈대상을 늘이자는데 있었다.

1413년(태종 13년)에 봉건통치배들은 저들의 특권적지위를 보증하는 한편 인민들을 제고장에 얽어매놓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호패법을 제정하였다. 그때의 규정에 의하면 호패는 16살이상의 모든 남자들이 다 의무적으로 휴대하게 되여있었다. 호패의 모양은 우가 둥글고 아래가 모나게 생겼는데 길이가 3치 7푼(약 11㎝), 폭이 1치 3푼(약 4㎝), 두께가 2푼(약 0.6㎝)이였다.

패쪽의 재료와 기재사항은 신분에 따라 달랐다.

관리들의것은 벼슬등급에 따라 2품이상은 상아, 3품과 4품은 사슴뿔, 5품과 6품은 회양목, 7품이하부터 9품까지는 자작목으로 만들게 되여있었고 평민의것은 일반나무를 쓰게 되여있었다.

기재사항도 서로 달리 하였는데 2품이상은 벼슬이름만 새기고 그밖의 량반관리들의 호패에는 벼슬이름과 본인의 주소, 이름을 기입하게 되여있었다. 무관의 경우에는 그가 속한 부대명과 키도 새겨넣게 되여있었다.

평민의 경우에는 얼굴빛과 수염 등 용모의 특징까지 밝히고 평민보다 더낮은 신분인 잡색인인 경우에는 그가 지고있는 《천역》의 이름을, 노비는 상전의 이름까지 기입하게 되여있었다.

봉건국가는 호패의 위조를 막기 위하여 불에 달군 쇠도장으로 기재사항을 찍게 하였다.

호패법을 통하여 량반지배계급은 저들의 신분상의 우월성을 법적으로 확인받았으나 평민이하의 피지배계급인민들은 심한 봉건적구속과 통제를 받았다. 

호패법은 1413년에 처음 실시하였으나 3~4년후에 페지되였고 1458년에 다시 실시하였으나 1467년에 페지되였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였는데 이 과정에 호적에서 빠진 호구, 장정들을 많이 적발등록하였다.

그리하여 호적에 등록된 장정수가 1404년에 32만여명이였다면 15세기 30년대에는 2배가 넘는 70여만명을 등록(세종실록지리지)하였다.

― 절간정리와 노비정리

조선봉건왕조초기 봉건통치배들은 절간정리와 노비정리사업을 통하여서도 토지와 인민에 대한 봉건국가의 중앙집권적지배를 확대강화하였다.

◦ 절간정리사업

조선봉건국가가 절간정리를 하게 된 목적은 절간세력을 약화시키고 절간의 사회경제적지반을 박탈하자는것이였다. 그것은 당시 불교절간들이 봉건적중앙집권력강화에 장애로 되였기때문이였다. 고려시기 절간들은 고려봉건국가의 비호밑에 많은 토지와 노비를 가진 대봉건세력이였다. 15세기 초에 절간이 소유한 논밭은 약 4~5만결이나 되였으며 노비는 10만명을 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봉건통치배들은 봉건유교사상을 저들의 주되는 사상적무기로 내세우고 불교를 배척하는데로 나아갔다.

조선봉건국가는 1402년부터 시작하여 1424년에 이르는 동안 4차례(1402년, 1406년, 1419년, 1424년)에 걸쳐 절간정리사업을 진행하였다.

당시에 존재하고있던 불교류파들을 크게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하여 각각 18개, 도합 36개의 절간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페지하였다.

이 과정에 절간노비 10만여명을 몰수하여 공노비로 만들었으며 절간토지 8 000결만 남기고 약 10만결을 몰수하여 국가지배에 넣게 되였다.

절간정리는 고려이래 계속 뿌리깊이 내려오던 불교의 사상, 경제적지반을 대폭 줄인것으로서 새왕조의 중앙집권력을 훨씬 강화할수 있게 하였다.

◦ 노비정리(奴婢辨正)사업

조선봉건통치배들은 이 시기에 진행한 《노비변정》사업을 통하여서도 인민들에 대한 개별적봉건세력들의 지배를 약화시키고 국가적지배를 강화하였다.

봉건국가가 노비정리사업을 진행하게 된 목적은 인민들에 대한 개별적봉건세력의 지배를 약화시키고 국가적지배를 강화하며 지배계급내부에서 벌어진 노비소유권문제에서 일어난 소송을 재판처리하려는데 있었다.

고려말기 대봉건세력들이 자라나 봉건적대농장들이 출현하던 때에 공전의 사전화와 함께 공민의 사민화 특히 량인의 노비화과정이 극심해졌으며 다른 한편 토지쟁탈전과 노비쟁탈전이 더욱 광범히 진행되였다. 대봉건량반관료들의 《압량위천》(壓良爲賤)책동에 의하여 봉건국가의 지배밑에 있던 량인들이 사노비로 전락되고 적지않은 공노비들도 개별적관리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압량위천된 사람들은 자기의 본래의 량인신분을 되찾기 위하여 《소량》투쟁을 벌렸으며 노비를 빼앗긴 중소봉건관료들은 노비를 되찾기 위하여 《쟁송》사건을 일으켰다.

이 시기 조선봉건왕조의 통치배들은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저들의 리해관계에 맞게 노비소송문제들을 처리해나갔다. 다시말하여 압량위천된 사람들을 도로 량인으로 만들어 봉건국가의 조세, 공물, 부역 등의 착취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사업을 당시 노비변정사업이라고 하였다.

이 시기 봉건통치배들은 노비변정사업을 집중적으로 빨리 진행하기 위하여 1395년에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이라는 림시적인 전문관청을 설치하기까지 하였다. 

봉건정부는 1395년부터 1414년까지 4차례에 걸쳐 설치된 노비변정도감에서 100여명의 관원이 6개월간에 1만건의 노비문제를 처리하였다.

결국 노비변정사업은 봉건국가에 유리하게 즉 그 착취대상을 늘이는 방향에서 진행함으로써 많은 노비들이 개별적상전의 지배에서 벗어나 량인 또는 공노비로 되였으며 국가의 착취대상이 그만큼 늘어나게 되였다.

이와 같이 조선봉건왕조의 통치배들은 량전, 호패법, 절간정리, 노비정리 등을 통하여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적지배를 강화하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봉건적중앙집권력의 물질적지반이 강화되였으며 결국 인민들에 대한 봉건국가의 예속의 올가미가 더욱 조여들어가는 과정으로 되였다.

 △ 봉건적착취와 억압의 강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리조봉건국가의 기본착취대상은 근로대중의 압도적다수를 차지하고있었던 량인농민이였고 그에 대한 착취의 기본형태는 전세와 공물, 부역이였습니다.》   

조선봉건왕조의 통치배들은 봉건적중앙집권력에 의거하여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적지배를 강화한데 토대하여 인민들에 대한 국가적착취를 강화하였다.

15세기 조선봉건국가의 기본착취형태는 전세, 공물, 부역이였으며 기본착취대상은 량인농민들이였다. 봉건통치배들은 각종 법을 제정공포하여 이 세가지 기본착취형태의 착취기준과 그에 따르는 수법을 정비하고 개정함으로써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착취와 억압을 강화하였다.

전세

조선봉건국가는 15세기에 토지와 인민들에 대한 중앙집권적지배를 강화한 기초우에서 조세제도를 더욱 정비하여 인민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였다.

전세는 조선봉건국가의 통치기구를 유지하기 위한 재정수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므로 봉건정부는 전세수탈에 선차적관심을 돌렸다.

전세는 토지의 면적에 따라 그 토지의 경작자에게 부과하는 세로서 봉건국가의 기본적착취항목이였다.

조선봉건왕조 초기 기본세액은 1결당 30말이라고 규정하였으나 이것은 전세에 대한 일반적규정이고 그것은 해마다 조절하게 되여있었다.

초기에는 해마다  관리들이 추수전에 현지에 나가 논밭을 돌아보고 그해의 흉풍을 고려하여 조세액을 규정하였다. 이것을 《손실답헌법》이라고 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손실답헌법의 실시가 무슨 《신정》이나 되는듯이 광고하였으나 실지는 착취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손실답헌법은 관리들의 롱간과 협잡으로 터무니없이 집행되여 페단이 많았으므로 인민들의 완강한 반항에 부딪쳤다.

봉건통치배들은 이러한 실정에서 농민들의 반항을 무마하고 착취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새로운 착취방법인《공법》을 1444년에 제정실시하였다.

공법은 토지의 면적과 논밭의 비옥도, 농사의 흉풍에 따라 전세를 부과하는것이였다. 공법에 의하면 전국의 논밭을 그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 최고 400말을 수확할수 있는 토지면적을 1결로 정하였다. 따라서 1결의 면적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서로 달랐는데 가장 비옥한 땅인 1등전은 2 753평이고 가장 척박한 땅인 6등전은 1만 1 036평으로 하였다. 그리고 1결의 세액은 수확량의 20분의 1인 20말로 고정하였다.

공법제정후 전세는 표면상 줄어들고 관리들의 극심한 협잡행위가 일부 제한되기는 하였으나 인민들의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더많은 착취를 당해야만 하였다.

― 공물(貢物)과 진상(進上)

조선봉건국가의 농민수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것은 공물과 진상이였다.

 ◦ 공물에 의한 착취는 참으로 파렴치하였다.

공물을 부담하는데서 봉건국가가 제정한 규정은 호구와 토지소유정도를 고려하게 되여있었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그와 반대로 토지가 많고 부유한자는 면제되고 가난한 농민들이 무거운 부담을 걸머지게 되였다.

공물은 원래 해당지방의 특산물을 부과하게 되여있으나 이 원칙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고 그 지방에서 나지 않는 물건을 강요하는 경우도 적지않았다.

실례로 강원도 평강은 닥나무가 없었으나 종이를 공물로 바쳐야 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을 빙자하여 《양덕맹산어물공》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였다.

설사 그 지방에서 나오는 특산물이라 하더라도 매 가정에서 생산되는것이 아니기때문에 농민들은 그것을 마련하느라고 큰 고통을 당하여야만 하였다.

 뿐만아니라 공물의 품종이 대단히 많았다.  당시 공물의 품종은 수공업제품으로부터 시작하여 농산물, 수산물, 림산물, 광물, 약재 등 수천수백가지나 되였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약재품종만도 170여종이나 공물로 바쳐야 하였는데 운반도중 분실되거나 변질되면 그것을 다시 마련하게 하였다.

공물착취에서 큰 페단은 대납현상이였다. 봉건관리들은 농민들의 공납물을 마련하기 힘든 조건을 리용하여 모리간상배들과 결탁하여 인민들에게 부과된 공물을 저들이 납부하고 그 대신 농민들로부터 엄청나게 비싼 값을 빼앗아냄으로써 중간리득을 크게 보았다.

◦ 진상

공물과 함께 진상착취도 가혹하게 진행되였다.

원래 진상이란 각도의 감사, 병사, 수사, 계수관 등이 국가적인 제사로 진행하는 기간에 철따라 새로 나오는 제물을 바치거나 왕실에 례물을 바치는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지방관들이 바친다는 제물이나 례물의 실지 부담자는 인민들이였다. 그러므로 인민들이 지방특산물을 수탈당한다는 점에서 진상은 공물과 다른것이 없었다.

진상착취항목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국왕의 력대조상들을 제사지내는 종묘, 땅의 신과 곡식의 신을 제사지낸다는 사직, 성균관의 제사 등에 철따라 새로 나오는 과일과 물고기 등을 제물로 바치는 제향천신, 명절날에 바치는 명일방물, 왕궁에서 소비하는 반찬거리를 바치는 물선, 지방관의 부임과 해임시 각각 바치는 도계진상 등이 있었다.

― 부역(賦役)

부역은 봉건국가가 인민들을 아무런 보수도 없이 각종 로동에 동원하여 부려먹던 강제적인 무보수의무로동이였다.

부역로동제는 수공업생산부역과 건설 및 운수부역로동이 있었다. 국가적으로 규정된 부역의 종류만 하여도 각종 짐운반으로부터 철제련, 토목공사와 숫구이, 석회구이에 이르기까지 수십가지나 되였다.

부역은 기본상 16~60살의 장정들에게만 지우는것이였으나 때로는 60살이 넘는 남자와 어린이 그리고 녀성들까지 끌려나갔다.

부역로동가운데서 가장 고된것은 금캐기, 짐운반, 철제련, 토목공사, 소금구이 등이였다.

기일과 계절이 정해져있었으나 그것은 허울뿐이였고 바쁜 농사철도 고려함이 없이 수시로 강요당하였으므로 농민들은 부역에 동원되다나면 자기 집농사를 지을 겨률이 없어 농사를 망치고 령락파산되군 하였다.

인민들은 어떤 부역에 동원되든지 동원기간의 식량, 자재, 로동도구까지 다 자체로 부담하여 가지고가야 했다.

― 고리대를 비롯한 그밖의 착취

전세와 공물, 부역밖에도 여러가지 형태의 봉건적착취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각종 고리대착취가 인민들을 몹시 괴롭히였다. 특히 봉건국가에 의한 환자착취와 봉건왕실의 사적고리대인 내수사의 장리에 의한 착취, 관리들과 절간중들의 고리대착취가 매우 가혹하였다.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착취는 봉건국가에 의해서만 감행된것이 아니였다. 이 시기 봉건국가가 일반농민들을 착취하는데 끼여들어 한몫 본 개별적량반, 지주들은 그에만 그치지 않고 자기의 예속밑에 있는 노비와 고공(머슴)들을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혹독하게 억압, 착취하였으며 또 령락된 농민들을 봉건적소작관계에 얽매여놓고 수탈하였다.

이처럼 15세기 조선봉건통치배들의 가혹한 봉건적착취로 말미암아 인민들은 매우 비참하게 살았다.

 

복습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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