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597년 일본침략자들의 재차침입을 쳐물리친 인민들의 투쟁, 임진조국전쟁의 승리

 

△ 적들의 재차침입을 쳐물리친 인민들의 투쟁

- 휴전기간 나라의 정세는 매우 심각하였다.

1593년 7월 이후 전쟁은 일시 중단상태에 들어가게 되였다.

휴전기간에도 적들은 침략기도를 버리지않고 또다시 대규모적인 침략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적들은 이 기간에 이른바 《화평담판》을 떠들어댔는데 적들이 제기한 담판조건이란 두나라사이의 무역관계를 회복하며 조선의 4개도를 떼줄것을 요구하는 등 매우 황당한것으로서 그것은 결국 저들의 재차침략을 위한 시간을 얻자는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였다.

◦ 이 시기 조선봉건정부는 적들의 흉계를 알아차리고 담판에 기대를 걸지않았으며 애국적인민들의 참가밑에 적들의 재차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여러가지 포들을 새로 만들어내고 조총을 개량발전시켜 대량생산하였으며 화약을 많이 생산하고 성능이 좋은 함선들도 많이 무어냈다.

◦ 후전기간 전쟁경험에 기초하여 군사제도를 개편하고 훈련을 강화하는 사업도 진행하였다.

훈련도감을 설치하였고 중앙군과 지방군을 재편성하였으며 수군지휘체계를 개편하여 3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수군지휘처를 려수로부터 한산도 두을포로 옮겼다.

그리고 약 30개 성의 축성사업도 추진하였다.

결과 나라의 방위력이 상당히 강화되였으며 이것은 일본침략군의 재침략을 성과적으로 물리칠수 있게 한 물질적담보로 되였다.

- 일본침략자들은 담판의 막뒤에서 재침준비를 서둘렀다.

일본침략자들은 1597년 1월부터 수륙군 근 20만을 조선에 더 끌어들여 조선남해안의 적들과 합세하였다.

적들은 먼저 조선수군을 격파하고 수륙병진을 실현하며 륙군으로 전라도지역을 기어이 강점하고 북상하여 조선의 전지역을 타고앉으려는 흉계를 꾸미였다.

적들은 간첩(요시라)을 내세워 리순신을 제거하고 조선수군을 허물어버리려고 간교한 흉계를 꾸미면서 발악적으로 책동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의 이러한 흉계에 넘어간 봉건정부는 리순신을 파면시키고(리순신은 백의종군이 됨) 원균을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수군을 크게 약화시키는 계기로 되였다.

원균이 이끈 조선함대는 아무런 타산도 없이 함대를 마구 출동시켰다가 안골포(6월), 옹포(7월 초), 칠천도(7월 중순)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붕괴되고말았다. 이것은 조선수군의 손실이였을뿐아니라 전쟁전반에 큰 후과를 미치였다.

지금까지 조선수군의 위력에 겁을 먹고 공격을 주저해오던 일본침략군은 조선수군이 무너진 후 서울을 목표로 삼고 전면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적들은 8월 초에 좌, 우군으로 나뉘여 경상도, 전라도지방으로 미친듯이 침공하였다.

― 인민들은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일떠섰다.

◦ 일본침략자들은 재침략의 길에 들어선 후 일시적인 수적우세를 리용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를 거쳐 충청도지방까지 기여들수 있었으나 도처에서 얻어맞고 점차 수세에 빠지게 되였다.

조선군인들의 수성전과 청야전술에 의하여 적들은 또다시 퇴각로를 끊기울 위험에 빠지게 되였고 군량난에 허덕이게 되였다.

9월에 들어서면서 력량을 수습한 아군이 적들의 침공을 좌절시키고 반공격으로 넘어가는 계기를 열어놓은것은 직산(충청남도 천안군)전투였다.

직산에서 방어군은 매복전을 벌려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으며 6차례에 걸친 공방전에서 수많은 침략군을 소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살아남은 적들은 드디여 청주를 거쳐 남쪽으로 도망쳤다.

◦ 이무렵 바다에서도 다시 조선수군의 승리가 이룩되였다.

울돌(전라남도 해남군)해전은 전쟁국면을 호전시킨 전환적의의를 가지였다. 앞서 7월에 조선수군이 거의 무너졌을 때 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수군을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였으나 8월에 3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리순신은 흩어진 수군을 다시 수습하고 재건하였다. 그리고 수군기지를 전라우수영이 있던 진도로 옮겼다.

진도는 조선서해와 남해의 거센 조류가 부딪쳐 세찬 풍랑을 일으키는 울돌(명랑)해협지대였는데 아군으로는 적은 수의 함선을 가지고 적의 대함대를 방어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였다.

직산전투에서 된타격을 받은 적들은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륙지에서는 물론 바다에서도 더욱 발악적으로 달려들었다.

이때 적군은 330여척의 함선으로 편성된 대함대를 끌고 《수륙병진》계획을 실현하려고 조선남해로부터 조선서해쪽으로 침공하였다.

조선수군은 력량관계와 해양조건을 타산하여 울돌해협에 진을 쳤다.

9월 16일 아침 적의 대함대가 밀물을 리용하여 울돌해협으로 달려들자 조선함대는 비록 12척밖에 안되였으나 결사전을 벌렸다. 이날 조선수군은 12척밖에 안되는 함선을 가지고 330여척의 대함대와 맞서 32척을 격파하고 4 000여명을 살상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함대는 한척의 손실도 없이 기지로 돌아왔다.

이 큰 승리를 력사에서 《명량대첩》(명량대승리)이라고 부른다. 울돌바다싸움의 승리는 적들의 《수륙병진》계획을 또다시 파탄시키고 조선함대로 하여금 다시금 조선남해의 제해권을 틀어쥘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륙지에서의 아군의 거듭되는 승리와 함께 전쟁국면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변시키는데서 큰 기여로 되였다.

◦ 조선수군은 명량해전에서 승리한후 고금도(전라남도 완도군)로 기지를 옮기고 더많은 함선들을 만들며 군대수를 늘이고 식량과 전투기자재들을 준비하는 등 함대의 력량을 계속 강화하면서 침략자들을 종국적으로 소멸하기 위한 준비를 다그쳤다.

직산전투와 울돌바다싸움에서 패배를 당하자 일본침략자들은 마침내 총퇴각을 시작하였고 조선군대는 전면적인 반공격에로 넘어갔다. 애국적인민들은 각지에서 소탕전을 벌렸다.

그 가운데서 일본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준것은 1598년 1월에 진행된 울산 도산성에 대한 포위공격전과 3월 고금도에서 16척의 적함선을 격파한 전투였다.

륙지와 바다에서 계속 호된 타격을 받고 더이상 배겨낼수 없게 되자 적들은 1598년 가을에 들어서면서 저들의 소굴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전체 인민들과 수륙군은 일본침략자들을 최종적으로 소멸하기 위한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9월에 조선군대는 동로, 중로, 서로 3개 군을 편성하고 울산 도산성, 사천, 순천에 도사리고있는 적들을 공격하여 된벼락을 안기였다. 결과 사천, 울산에 있던 적들은 11월 중순 일본으로 도망쳤다.

11월 19일 적들은 전라도방면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순천의 고니시부대를 끌어내가기 위하여 경상도 사천, 고성방면에 있던 500척의 함선을 끌고 로량(남해군)으로 공격해왔다. 바로 이렇게 되여 임진조국전쟁의 마감을 빛나게 장식한 로량바다싸움이 벌어지게 되였다.

적들을 앞질러 분쇄하기 위하여 로량앞바다로 진격한 조선수군은 좌, 우군으로 나뉘여 적선을 량쪽으로부터 공격하였다. 조선수군은 치솟는 적개심을 가지고 침략자들을 한놈도 살려보내지않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하여 싸웠다.

조선함대는 포위망을 좁히면서 발악하는 적선에 대하여 드센 공격을 안기여 침략자들을 무자비하게 소탕하였으며 패주하는 적선을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이 바다싸움에서 조선함대는 적함 200여척을 격침격파하였으며 근 2만명의 적들을 소멸하였다. 이것이 우리 수군이 크게 승리하여 력사에 널리 알려진 《로량대승리》(로량대첩)이다.

△ 임진전쟁승리의 요인과 그 의의

조선인민은 우리 나라를 먹어보려고 달려들었던 흉악한 일본침략자들과 7년간이나 영용하게 싸워 마침내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인민들은 잔인무도하고 흉악한 일본사무라이들과 7년간이나 결사적으로 싸워 마침내 왜적을 조국땅에서 몰아내고 조국의 영예와 존엄을 지켰습니다.》

임진조국전쟁은 나라와 민족의 자주성을 수호하기 위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전쟁이였다.

- 임진조국전쟁에서 조선인민이 승리할수 있었던것은 애국적인민들이 민족의 존엄을 위하여 용감하게 싸웠기때문이였다.

전쟁초기 봉건통치배들의 심한 무능과 부패타락행위로 하여 전반적형편이 매우 어려웠을 때에도 전체 인민들은 반침략투쟁에 떨쳐일어나 자발적으로 의병대오를 뭇고 희생적으로 싸움으로써 점차 전국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변시켰다.

임진조국전쟁에서 리순신, 곽재우 등 애국명장들은 인민들의 항전을 능숙하게 조직지휘함으로써 전쟁승리에 이바지하였다. 그들은 인민들의 반침략투쟁에 고무되면서 전투준비를 잘하고 옳은 전술로 전투지휘를 능숙하게 하여 원쑤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애국주의는 인민대중을 위한 애국주의가 아니라 봉건제도나 봉건왕을 위한 충군사상에서 나온것이였다.

- 임진조국전쟁에의 조선인민의 승리는 거대한 력사적의의를 가지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나라의 안전과 민족의 존엄을 지켜낸데 있다.

애국적인 조선인민은 한사람같이 떨쳐나서 7년동안이나 영용하게 싸움으로써 마침내 간악한 일본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족적자주권을 영예롭게 지켜냈으며 그후 수백년동안 일본침략자들이 감히 조선을 침략할수 없게 하였고 나라의 대외적안정과 평화를 보장하였다.

다음으로 임진조국전쟁에서 조선인민의 승리는 조선과 명나라를 강점하려는 일본침략자들의 침략흉계를 파탄시키고 아시아의 안전과 평화를 수호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참으로 임진조국전쟁은 중세기 조선인민의 반침략투쟁력사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조국방위전쟁이였다.

 

복습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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