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원나라침략세력의 축출과 홍두적의 섬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라의 대외정책은 고정불변한것이 아닙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대외정책은 변화될수도 있습니다.》

14세기 후반기에 고려인민들은 봉건적학정속에서도 북쪽으로 기여드는 원침략세력과 홍두적을 물리치고 조국의 강토를 수호하였으며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견결하게 지키였다.

△ 원나라침략세력의 축출

― 14세기 후반기에 고려정부는 친원정책으로부터 반원정책으로 넘어갔다.

•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륙정세에서는 새로운 변동이 일어났다.

한때 침략전쟁을 통하여 아시아와 유럽의 넓은 령토를 차지하였던 원나라가 이 시기에 이르러 급속히 몰락하였다.

원나라의 지배밑에 있던 수많은 종족들이 원나라의 지배와 차별정책을 반대하여 계속 반란과 폭동들을 일으켰다.

다른 한편 원나라통치배들은 권력다툼을 끊임없이 벌리였고 부패타락한 생활로 국가재정을 탕진하고있었다.

그리하여 한때 세력이 강하였던 원나라는 급속히 무너져갔다.

특히 14세기 중엽 원나라의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폭동은 원통치배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351년 하북성 영평현에서 일어난 농민폭동은 급격히 전국적인 범위로 확대되였으며 이러한 농민폭동에 편승하여 강대한 세력으로 등장한 주원장(朱元璋: 1328-1398년)이 많은 봉건세력들과 농민군을 인입하여 장강중류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주원장은 1364년에 오왕으로 자칭하면서 남중국일대에서 원나라의 통치를 배격하였으며 여러 봉건세력들을 제압하고 1368년에는 금릉(남경)을 수도로 명나라를 세웠다. 그후 명나라는 군대를 북으로 진격시켜 대도(베이징)를 점령하였으며 쫓겨난 원봉건정부는 몽골초원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고려에서는 북방사막지대로 쫓겨난 원나라를 《북원》이라고 불렀다.

• 이 시기 고려안에서도 원나라침략세력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기세가 더욱 앙양되였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고려통치배들은 기울어져가는 원나라와 가까이 하기보다는 인민들의 반원기세에 편승하는것이 저들의 통치를 유지강화하는데 유리하다는 타산을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봉건정부는 인민들의 투쟁에 편승하여 반원투쟁에로 이행하게 되였다.

― 원침략세력의 구축

• 고려봉건정부는 반원투쟁에 걸림돌로 되여있던 기철형제를 제거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이후 왕권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세력은 친원파관료들이였다. 그 가운데서도 기철형제는 그 누이가 원나라 순제의 《제2왕후》로 되고 태자까지 낳게 되자 그를 등대고 온갖 횡포를 일삼으며 오만할대로 오만해졌다.

1356년 5월 공민왕은 연회를 차리고 기가일파를 왕궁에 불러들인 다음 모조리 처단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반원정책에서 저항해나설수 있는 가장 큰 세력을 소탕한것이며 사실상 원침략세력을 몰아내는 투쟁을 선포한것이였다.

뒤이여 고려정부는 《정동행성리문소》를 철페하였다.

한편 고려정부는 동북면과 서북면에로 군대를 출동시켜 압록강이북과 쌍성지방을 공격하는 군사적조치를 취하였다.

1356년 6월 서북면병마사 인당이 거느린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 서북국경지대에서 위협하던 파사부(구련성)를 비롯한 3개의 원나라의 군사적거점을 들이치고 침략자들을 멀리 쫓아버리였으며 압록강이남지역에 강계, 벽동 등 새 고을들을 설치하였다.

같은 해 7월 동북면병마사 류인우가 지휘하는 고려군은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고 그곳에 둥지를 틀고있던 원침략자들과 반역자들을 처단하였다. 그리하여 동북지역이 99년만에 다시 고려의 령토로 돌아오게 되였다.

고려는 동북으로는 멀리 경성일대에까지 진출하였고 서북으로는 벽동, 강계일대에 이르게 되였다.

• 원침략세력을 몰아내고 옛 땅을 되찾기 위한 고려인민들의 줄기찬 투쟁은 그후 원나라의 재침야망을 짓부시고 되찾은 강토를 고수하기 위한 투쟁과 결합되여 전개되였다.

1362년 초에 심양일대에서 원통치기관인 《료양행성》의 장관으로 자처하던 납합출이 수만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북청, 홍원일대에 쳐들어왔다. 이해 7월 고려군은 적주력을 완전히 섬멸하고 수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이때 납합출은 겨우 목숨을 건져가지고 달아났다.

원침략자들은 1364년에 또다시 서북과 동북에서 거의 동시에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때에도 최영이 거느린 고려군이 서북면으로 기여드는 적들을 통쾌하게 분쇄한 다음 동북면으로 달려가 적들을 짓부시고 적들이 강점했던 전지역들을 되찾았다.

고려인민들은 북방에서 원침략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가면서 동시에 남해의 제주도에 둥지를 틀고있던 원침략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대규모적인 원정을 진행하였다.

앞서 삼별초군의 항전을 진압한 후 원나라통치배들은 제주도를 일본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군마목장으로 만들 야망밑에 수많은 군대를 주둔시켰다. 적들은 1294년에 고려인민들의 항전기세에 겁을 먹고 제주도를 일단 반환하였으나 그후에도 침략군과 목부들을 눌러앉혀놓고 갖은 행패를 다하였다.

1374년 8월 최영이 지휘하는 2만 5 000명의 군대와 배 314척으로 편성된 원정군은 제주도에 상륙하여 대항하는 수천명의 적기병들을 결파하였다. 그후 고려군은 제주성에 의거하여 발악하는 적 수백명을 완전히 소멸하였다.

그리하여 100여년동안이나 제주도에 박혀있던 몽골침략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고 섬안의 말 전부와 수많은 무기, 무장들을 로획함으로써 1350년대부터 시작된 원나라침략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의 마지막장을 빛나게 장식하였다.

△ 홍두적의 섬멸

원나라침략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다그쳐가던 고려인민들은 1359년과 1361년 두차례에 걸쳐 북으로부터 침입해온 또하나의 침략세력인 홍두적과의 투쟁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홍두적(紅頭賊-紅巾賊)은 원래 원나라 말년인 1351년 5월 황하치수공사에 강제동원되였던 인민들이 류복통의 지휘밑에 폭동을 일으켜 수십만으로 자라난 폭동군의 한 집단이였다.

그들이 머리에 붉은 수건을 쓰고있었기때문에 《홍두적》 또는 《홍건적》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지휘부에 끼여들었던 봉건지주계급출신 야심가들이 새로운 봉건령주로 변질되면서 초기의 인민적성격을 잃어버리고 이르는 곳마다에서 파괴와 략탈을 일삼으며 돌아치는 략탈자, 침략자로 되고말았다.

― 홍두적의 제1차침략 격퇴

1359년 11월 3 000여명의 홍두적이 압록강을 건너와 략탈행위를 감행하고 도주하였으며 1359년 12월 모거경이 이끈 4만의 침략군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 남쪽으로 밀려내려왔다.

홍두적은 기동적으로 청천강을 건너 서경까지 침입하였다.

고려군민들은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에 떨쳐나섰다.

압록강가의 전초기지인 의주와 그 부근인민들은 배후에서 150여명의 적을 소멸하고 계속 적들을 타격하였다. 1360년 1월 중순에 반공격에로 넘어간 고려군 2만명은 서경에 기여든 침략자들을 공격하여 수천명을 소멸하였고 마침내 서경을 되찾았다. 2월에는 안우 등의 지휘밑에 함종으로 달아난 적군을 추격하여 2만여명을 멸살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다음 안우, 리방실이 지휘한 1 000명의 기병대는 도망치는 적에 대한 추격전을 전개하였다.

기병대는 연주강에 이르러 김득배가 지휘하는 방어군과 합세하여 침략자들을 쳐부시였다. 고려군은 계속하여 압록강까지 추격하면서 침략자들에게 죽음을 안기였다. 당시 살아돌아간 놈은 4만명중 겨우 300명밖에 안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1359년 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홍두적의 제1차침입을 물리치는 싸움은 고려인민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 홍두적의 제2차침략 격퇴

고려에 침략의 첫 마수를 뻗치였다가 큰 패배를 당한 홍두적은 1361년 10월 중순 20만의 대병력으로 또다시 쳐들어왔다.

고려의 여러 지역에서 적들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이 치렬하게 벌어졌다.

홍두적은 압록강을 건너 삭주, 니성일대까지 기여들었다. 고려정부는 이에 대처하여 리방실을 서북면도지휘사로 임명하여 절령에 목책을 세워 서북지방으로부터 개경에 이르는 중간지대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군대를 서북면으로 출동시켰다. 11월 초  연주(녕변), 박주(박천) 등 서북변산간지대의 여러 고을들에서 침략자들을 무찌르는 전투들이 벌어졌다. 적들은 심대한 타격을 받으면서도 수적우세에 의거하여 집요하게 기여들었다. 홍두적은 11월 9일 안주를 점령하고 오만하게도 《항복》을 요구하는 편지까지 보내왔다.

싸움의 불길은 점차 국내깊이까지 옮겨졌다. 11월 16일 5 000명의 적기병은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절령을 넘어 개경에 기여들었다.

침략군이 개경방어의 관문으로 삼았던 절령을 넘어서자 당황한 고려정부는 방어대책을 세울 대신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11월 24일 큰 저항을 받음이 없이 개경에 기여든 적들은 학살과 략탈을 감행하면서 오래동안 전해오던 문화재를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불태워버리였다.

복부(안동)에 자리잡은 고려정부는 20만의 방어군을 편성하고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여 개경을 다시 회복하도록 하였다.

1362년 1월 중순 20만의 고려군은 개경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불의에 공격하였다.

적들은 그사이 로략질하여 잡아먹은 짐승가죽을 성벽에 씌우고 물을 뿌려 얼쿤 다음 고려군을 막으려고 책동하였다.

고려군은 눈비가 내려 적들이 방비를 소홀히하는 사이에 공격을 단행하여 적우두머리 관선생을 비롯한 10여만의 적병을 섬멸하고 수많은 병쟁기들을 로획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개경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적들은 황급히 압록강을 넘어 달아나고말았다.

고려봉건국가가 몹시 약화되였던 당시에 두차례의 홍두적을 물리치는데서 승리할수 있었던것은 전적으로 고려의 군민들이 높은 애국심을 발휘하여 용감히 싸웠기때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