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3세기후반기~14세기전반기 고려-원관계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려후반기는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이 전면에 나섰던 시기라고 볼수 있습니다.》

△ 두 나라 통치배들사이의 결탁의 강화

고려통치배들은 삼별초군의 항전진압을 계기로 원나라통치배들과의 정치군사적결탁을 더욱 강화하는 길로 나갔다.

이러한 결탁관계는 마침내 두 나라 왕실사이에 혼인관계를 맺는데까지 이르렀다.

1274년 5월 고려의 태자(후의 충렬왕)와 구비라이(원나라 세조)의 딸과의 결혼이 이루어졌고 그후 공민왕대까지 이러한 현상이 계속되였다. 그리고 고려봉건귀족들의 딸가운데서 몽골의 왕후로 된 사실도 있었다.

원나라통치배들은 무력으로 고려를 정복할수 없었던 형편에서 고려왕실과의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고려통치배들을 저들의 영향하에 두려고 하였으며 고려왕정은 그것을 대내외적으로 왕권을 유지공고화하는 방패로 삼으려고 하였다.

즉 이와 같은 혼인은 두 나라 봉건통치배들의 리해관계의 산물이였다.

두 나라 왕실간의 결혼은 고려와 원나라사이의 국가관계에서 새로운 《동맹》관계의 성립으로서 정치군사적결탁의 강화를 의미하였다.

이 시기 두 나라 통치배들사이의 정치군사적결탁은 매우 큰 후과를 빚어냈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원나라의 침략전쟁준비과정에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고려왕실과 결혼관계를 맺고 정치군사적으로 결탁한 원나라 세조는 일본침략(《東征》)을 획책하면서 그 준비에 협력할것을 고려에 요구하였으며 그를 위한 수많은 싸움배와 군량 등의 무거운 부담을 고려인민들에게 들씌웠다.

원나라통치배들은 1274년, 1281년 2차에 걸쳐 일본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는데 그때마다 일본인민들의 반격과 풍랑으로 모두 참패하고 말았다.

원나라와의 결탁과정은 결국 고려봉건통치배들의 사대의존정책이 강화되는 과정이였으며 원나라와의 결탁을 강화하면 할수록 인민들은 더욱더 무거운 부담을 져야 하는 후과를 빚어냈다.

당시 고려의 국왕은 자주 원나라를 방문하였는데 그 비용을 또한 인민들에 대한 수탈로 마련하였다. 실례로 충렬왕의 원나라방문시에 그 일행은 1 200명이나 되였는데 그들이 원나라 수도에 가서 머무는 기간에 탕진한 비용으로 베천 백만필을 인민들에게서 빼앗아냈다.

△ 고려의 자주권 유지

고려통치배들은 원나라통치배들과 정치군사적으로 결탁하였으나 내정간섭기도에 대하여서는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내정간섭을 물리치기 위한 활동을 벌렸다. 이것은 본질상 인민들에 대한 저들의 지배권, 통치권을 유지하려는것이였다.

- 원래 1270년대 이후 원나라통치배들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려고 삼별초군의 항전을 계기로 들이민 침략군을 둔전군의 형식으로 서해도(황해도)일대에 주둔시켰을뿐아니라 일본침략을 준비하면서 다로가치들을 파견하여 군량을 강요하였다. 다로가치들은 《감독관》의 명목으로 고려내정에 간섭하는 파렴치한 행위까지 감행하였다.

고려는 이러한 다로가치들과 주둔한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1278년 원나라정부와의 담판을 하였으며 마침내 자기의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고려의 완강한 요구에 의하여 원나라는 주둔시켰던 침략군을 철수시키고 개경에 밀어넣었던 다로가치들을 소환하지 않을수 없었다.

- 고려정부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통한 원나라침략자들의 간섭기도를 물리치는 투쟁도 벌리였다.

원나라통치배들은 제2차일본침략을 준비하면서 그와 관련된 사무를 처리한다는 구실밑에 1280년에 《정동행성》을 고려에 설치하였다. 원나라침략자들은 《정동행성》을 저들의 지방통치기관과 같은 기구로 만들고 고려내정에 간섭하며 지방행정단위처럼 다루려고 책동하였다.

나라의 주권을 말살하려는 원나라침략자들의 이러한 기도를 고려는 허용하지 않았다.

고려는 원나라와의 계속되는 담판을 통하여 1290년에는 《돈녕부》를 구축하였으며 1249년에는 제주도를 되찾았다.

그리하여 고려는 13~14세기 원나라와의 관계를 가지는 전기간에 자기의 령토와 주권, 자기의 군대를 지켜낼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