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삼별초군의 항전(三別抄軍抗戰)

 

△ 봉건통치배들의 적과의 결탁

1258년 정변으로 최가의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정치적실권을 잡은 김인준일파는 최가 못지않게 전횡을 부렸다.

그러한 가운데 림연이 1268년 12월 정변을 일으켜 김인준과 그 일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후 국왕을 갈아치움으로써 자기의 집권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왕과 무신집권자들사이, 무신내부에서의 대립과 모순은 더욱 격화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국왕 원종은 몽골에 접근하여 무신집권자들을 제거하려고 하고 몽골침략자들은 고려통치층내부의 갈등을 주시하며 고려강점을 위한 구실을 찾고있었다.

출륙문제(강화도로부터 수도를 륙지인 개경에 옮기는 문제)를 놓고 국왕과 김인준사이의 대립이 첨예화되자 몽골은 1268년 3월 사신을 파견하여 김인준부자와 그의 아우 김충의 몽골방문을 강요하였다. 이것은 김인준일파를 제거하려는 술책이였다.

실권을 틀어쥔 림연은 친몽립장에 더욱 기울어지는 국왕 원종을 내쫓고 (1269년 6월)안경공 창을 왕으로 앉히였다.

원종은 1269년 말에 몽골의 지지밑에 다시 왕자리에 올랐는데 반대파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몽골에 찾아가 침략군을 끌어들이는 반역행위를 저질렀다.

끊임없는 권력다툼으로 중앙집권적통치체제가 커다란 혼란속에 빠져들고있을 때인 1269년 10월  지방량반들인 서북면병마사영의 하급관리인 최탄, 한신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가붙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구실로 수천명의 몽골침략군이 서북지방에 들어왔으며 1270년 2월에는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황해북도 자비령(절령이라고도 함)이북의 넓은 지역을 통치하였다.

당황해난 국왕 원종은 몽골침략이 두려워서 끌어오던 수도의 《개경출륙》을 단행하여 몽골의 요구에 《성의》를 보이고 그들과 야합하려고 하였다.

이때 정치적권력을 잡고있던 림유무(림연의 아들)는 계속 반몽골정책을 견지하면서 몽골군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중앙과 지방의 적지않은 량반들은 몽골침략자들과 야합하려는 국왕의 편으로 기울어졌다.

국왕은 림유무를 없애버리기 위한 음모를 꾸미였다. 1270년 5월 국왕의 사촉밑에 삼별초군이 동원되여 림유무와 그 일당을 제거하였다.

이리하여 100년동안 존재하였던 무신정권은 붕괴되고 권력을 독차지한 국왕일파가 외래침략자들과 공공연히 결탁함으로써 고려의 애국적군대와 인민들은 몽골침략군과 사대투항주의적인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또다시 일떠섰다.

△ 안팎의 억압자들을 반대한 삼별초군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투쟁하여온 자랑찬 력사를 가지고있습니다.》

국왕 원종이 몽골의 통치배들과 결탁하여 침략군을 끌어들이자 수도(강화도)를 지키던 기본무력인 삼별초군은 안팎의 억압자들을 반대하여 결연히 싸움에 일떠섰다.

1270년 5월 23일 수도를 개경으로 옮길것을 공포한데 대하여 삼별초가 반기를 드는 기미를 보이자 국왕 원종은 5월 29일 강화도에 사람을 보내여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별초란 특별히 선발된 군대라는 뜻이다. 삼별초는 3개의 별초부대인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등 3개의 부대를 가리키는 말로서 강화도를 지키던 봉건국가의 기본주력이였다. 삼별초는 고려봉건국가의 중앙군인 2군 6위와는 별도로 조직된 상비무력으로서 주로 피압박근로대중출신들로 이루어져있었으며 반몽투쟁에서 단련되였고 반몽립장이 상대적으로 강하였다.

해산명령을 받은 삼별초는 이에 폭동으로 대답하였다.

6월 1일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정4품 무관)의 지휘밑에 인민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켰으며 수도의 무기고를 열어 그들을 무장시켰다.

항전군은 악질관료들과 몽골침략자들이 파견한 중들을 처단함으로써 자기들의 단호한 립장을 표시하였다.

항전군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조직적인 항전을 벌리는데 필요한 대책을 세웠다. 그리고 강화도수비를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세웠다.

삼별초군은 적아간의 력량관계와 지리적조건 등을 타산하여 투쟁을 개시한지 3일만인 6월 3일에 싸움을 장기적으로 힘있게 벌리기 위하여 보다 조건이 유리한 진도로 기지를 옮기였다.

진도는 개경에서 멀리 떨어지고 물살이 급한 울돌목(명량해협)을 사이에 두고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하였다. 또한 남해와 서해의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해상권을 틀어쥐는데서도 유리한곳이였다.

진도에 항전기지를 만드는 한편 삼별초군는 전라도일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눈부신 투쟁을 벌리였다.

항전군은 라주, 전주, 장흥 등 전라도일대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11월 초에는 제주도를 공격점령하고 제2의 투쟁기지로 꾸려놓았다.

삼별초군은 12월 진도를 향해 모험적으로 달려드는 봉건정부의 김방경과 아해(몽골침략군의 우두머리)가 거느린 1 000여명의 토벌군을 울돌목에서 격파하였다.

삼별초의 항전에 호응하여 일떠선 전국각지의 인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진도의 항전군에 합세하려고 하였다.

1271년 1월 밀성(경상남도 밀양군) 인민들은 방보, 계년 등의 지휘밑에 폭동을 일으킨 다음 봉건정부의 관리를 처단하고 여러 고을에 통첩을 보내여 투쟁에 일떠선 진도에 호응할것을 호소하였다.

숭겸, 공덕을 비롯한 관노들도 몽골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을 처단한 다음 진도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 삼별초는 항전기지를 제주도로 옮기고 줄기차게 투쟁하였다.

몽골침략자들과 고려봉건통치배들은 1271년 5월 수천명의 병력과 100여척의 함선으로 불의에 진도를 공격하였다.

항전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김지숙과 같은 변절자들이 적들에게 비밀을 넘겨주었기때문에 지휘자 배중손이 전사하는 등 결정적인 순간에 적지않은 손실을 입었다.

삼별초군은 김통정의 지휘밑에 혼란된 대오를 수습하면서 제주도로 항전기지를 옮겼다.

삼별초군은 제주도에 항전기지를 설정하고 력량을 보강한 다음 계속 힘찬 투쟁을 벌렸다.

항전군은 조선남해의 추자도, 거제도, 조선서해의 흑산도를 비롯한 여러 섬을 장악하여 새로운 전초기지로 삼은 다음 1272년 봄부터 본격적인 투쟁을 벌렸다.

항전군은 1272년 3월부터 6월에 이르는 석달사이에 적극적인 습격전을 벌려 회령현(전라남도 장흥군), 대포(전라북도 정읍군), 탐진(전라남도 강진군) 등을 들이쳐 적들을 처단하고 수많은 조세운반선을 로획하였으며 때로는 중부 서해안에까지 진출하여 안남도호부(경기도 부천시)를 기습하여 통치배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이해 11월과 다음해 1월에는 몽골의 일본침략준비의 거점이였던 합포를 련속 들이쳐 52척의 전함을 소각하고 많은 몽골침략자들을 살상포로하였다.

삼별초의 적극적인 공세앞에 당황한 적들은 1272년 봄부터 제주도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였다.

적들은 1273년 4월 160여척의 함선과 1만여명의 병력으로 제주도를 공격하였다.

항전군은 적들이 화전(불화살)을 쏘아 내성전체를 불바다로 만든 최악의 조건에서도 희생적으로 싸웠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70여명의 항전군은 김통정을 따라 산속에 들어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3년동안 내외의 원쑤들을 반대하여 치렬히 전개된 삼별초의 항전은 끝나게 되였다.

△ 삼별초군의 항전이 가지는 의의

삼별초군의 항전은 30여년동안 몽골의 대규모침략을 격퇴한 고려인민들의 투쟁의 련속으로서 중세투쟁력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의의깊은 투쟁이였다.

삼별초의 항전은 몽골침략자들과 사대투항주의적인 봉건통치배들에게 큰 타격을 줌으로써 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지켜 일떠선 우리 민족의 슬기로운 애국정신을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삼별초의 항전은 또한 몽골침략자들의 일본원정준비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중세기 안팎의 원쑤들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형식과 방법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이와 같이 삼별초의 항전은 12세기 후반기이후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과 13세기 중엽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을 보다 높은 단계에서 결합시킨 투쟁으로서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중세 우리 민족의 투쟁력사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복습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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