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묘청의 란과 서경인민들의 투쟁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묘청의 란은 서경량반과 개경량반들의 권력싸움이였지만 그것은 당시의 반사대세력과 사대세력사이의 대결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대주의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반항기세가 날로 높아지는 환경속에서 집권량반들을 반대하는 서경량반들의 진출이 강화되였다.

△ 묘청의 란과 서경인민들의 투쟁

― 묘청일파의 서경천도기도

서경의 진보적인 량반관료들은 1128년경부터 서경천도를 적극 주장해나섰다.

중 묘청과 정지상, 백수한 등 서경출신관료들이 집권층의 사대굴욕적립장을 배격하면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길것과 금나라를 징벌할것을 주장해나섰다.

묘청일파는 1128년부터 서경을 수도로 옮기기 위한 활동을 벌리였다.

1128년 8월 국왕이 서경에 왔을 때 묘청일파는 지리풍수설을 들고나와 왕이 서경으로 수도를 옮길 결심을 가지게 하려고 하였다. 묘청일파는 리자겸의 반란때 궁전이 불타버리면서 《땅기운》이 사라져버렸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면서 《왕기(王氣-왕의 기운)》가 도는 서경으로 옮겨야 왕실의 운명이 연장되고 금나라를 비롯한 36국이 복종할것이라고 설교하였다.

이것은 본질에 있어서 사대주의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기세에 편승하여 서경량반들이 정권을 잡자는것이였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고조선,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를 일떠세워보려던 고려사람들의 념원이 종교신비설의 외피속에 일정하게 반영되여있었다.

서경량반들의 이러한 주장은 국왕의 마음을 움직여놓았으며 서경 림원역(지금의 룡성)근방에 대화궁이라는 새 궁전까지 건설할수 있게 되였으며 대화궁이 완공되였을 때에는 이곳에 와서 정사를 보기도 하였다.

서경천도를 반대하던 개경량반들은 1134년 여름 대화궁에 벼락친것을 계기로 대화궁이 명당자리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것이라고 공세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묘청일파의 서경천도기도는 개경량반들의 집요한 반대로 실패하고말았다.

ㅡ 묘청의 란, 서경인민들의 투쟁

◦ 서경천도기도가 실패하자 묘청일파는 1135년 1월 정변을 일으켰다.

묘청은 당시 서경분사의 관리들인 조광, 류감 등과 함께 군대를 동원하여 서경과 서북지방에 와있던 개경출신량반들을 모조리 잡아가두고 서경출신관료들을 그자리에 올려앉히였다.

그들은 《천개》라는 년호를 정하고 《대위국》(大爲國)이라는 나라를 선포하였으며 《천견충의군》이라는 군대를 조직하여 서경을 지키게 하고 그 일부를 절령(황해북도 서흥군)계선에 파견하여 개경군을 막게 하였다.

묘청의 란은 서경량반들과 개경량반들사이의 권력싸움인 동시에 사대세력과 반사대세력사이의 대결이였다.

◦ 서경량반들의 정변이 일어나자 서경과 그 부근의 인민들이 거기에 합세하였다.

서경인민들은 묘청일파와는 달리 개경량반들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통치배들의 학정과 그들의 비굴한 대외정책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그러므로 서경량반들의 정변에 합류한 인민들의 투쟁은 처음부터 계급투쟁, 농민폭동적성격을 띠고있었다.

인민들이 정변에 참가하게 되면서 묘청란의 진보적측면은 더욱 뚜렷해지게 되였다.

◦ 서경인민들은 《토벌군》을 짓부시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벌리였다.

서경량반들의 정변소식이 개경에 전해지자 봉건정부는 곧 김부식(1075-1151년)을 우두머리로하는 수만명의 《토벌군》을 조직하였다. 《토벌군》은 서경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서경으로 직통하는 절령을 피하여 오늘의 평산, 신계, 수안, 성천, 안주 등지를 에돌아 서경으로 향하였다.

적들이 서경을 포위하자 량반들속에서 동요와 분렬이 일어났다.

조광(?-1136) 등이 묘청을 죽이고 개경군에 사람을 보내여 항복할 의향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개경군이 강경한 태도로 나오자 조광 등도 항전을 계속하게 되였다.

서경의 군대와 인민들은 처음부터 억압자들을 반대하여 견결히 투쟁하였다.

1135년 윤2월 두루섬일대에서 개경군과 서경인민들사이의 첫전투가 벌어졌다. 서경의 군대와 인민들은 화공전술로 개경군의 대동강봉쇄기도를 파탄시키면서 적의 공세를 거듭 격파하였다.

개경군은 지구전을 획책하면서 성을 포위하고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다가 1136년 2월 총공격을 들이대여 성을 강점하였다.

서경을 강점한 개경통치배들은 투쟁에 참가하였던 서경군대와 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투쟁의 앞장에 섰던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인민들을 강제로 향, 소, 부곡에 이주시켜 천민으로 만드는 죄행을 저질렀다.

서경인민들의 투쟁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그것은 봉건통치배들에게 큰 타격을 주였으며 인민들의 투쟁기세를 북돋아주었다.

△ 1170년 무신관료들의 정권장악

ㅡ 묘청정변후 의종왕의 부패타락한 생활로 인민들의 처지는 매우 한심하였다.

묘청의 정변과 서경인민들의 투쟁이 진압된 이후 봉건통치배들 내부에서의 권력싸움과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은 한층 더 격화되였다.

특히 의종왕통치시기(1146~1170년)에 이러한 대립은 더욱 날카로와졌다.

의종은 고려왕들가운데서도 찾아보기 드물 정도로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의종은 권력을 잡은 첫날부터 수많은 군인들과 농민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개경과 그밖의 여러곳에 화려한 궁전과 루각, 놀이터, 절간들을 지어놓고 수백명의 신하들을 끌고다니면서 매일과 같이 유흥판을 벌려놓았다.

의종은 또한 인민들의 투쟁과 반란사건들에 겁을 먹고 부처의 도움을 받아 거기서 벗어나려는 어리석은 생각밑에 불교행사들을 미친듯이 벌려놓았다. 그는 한번에 수천, 수만명씩 중들을 모아놓고 련속 중잔치(반승)를 차리였으며 전국의 절간들에서 천날, 만날을 기한으로 하는 법회(기도회)를 련달아 벌려놓게 하였다. 1157년 10월에는 3일동안에 3만명의 중에게 음식을 먹이는 중잔치를 벌렸다. 이러한 반승놀음에 참가한 중의 수는 의종통치기간에 무려 20만명이나 되였다.

의종은 이 모든 부담을 인민들에게 들씌움으로써 고역과 빈궁속에 허덕이게 하였다. 인민들속에서는 봉건적착취자들에 대한 반항심이 한층 높아졌으며 1162년에는 이천, 안협, 철원, 평강, 곡산 등 중부지방에서 련이어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ㅡ 12세기 중엽 고려봉건사회에 계급적모순이 첨예화되고있을 때 봉건통치층안에서는 문신과 무신사이의 알륵과 갈등이 격화되였다.

의종의 부화방탕한 생활을 뒤받침해주면서 권세를 부리고 막대한 재부를 차지한것은 주로 문신들이였다. 그리고 국왕가까이에서 아첨하며 이것저것 섬겨바치던 문신들이 벼락출세하였는데 그들중에는 환관, 상층중들도 있었다. 문신, 환관, 상층중들은 의종왕의 사치생활과 무시로 벌리는 놀음판에 한몫 끼우고 권세를 부릴수 있었으나 무신들은 이러한 놀음때 따라다니면서 경비나 서주어야 하였다.

같은 통치배들이면서도 무신들은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높은 벼슬자리에도 오르지 못하였다. 문무간의 차별, 무신에 대한 국왕과 문신의 멸시는 무신들의 불만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오래전부터 은근히 계속되여오던 문무간의 권력싸움은 의종통치시기에 절정에 이른셈이였다.

◦ 문무간의 대립은 마침내 1170년 무신정변으로 폭발되였다.

문신집권자들의 천대와 멸시에 앙심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있던 정중부, 리의방, 리고 등 무신들은 1170년 8월에 의종왕일행이 보현원(경기도 파주에 있는 절간)에 가서 유흥을 벌리는 기회를 리용하였다.

의종왕일행이 보현원으로 가던 도중에 무관들에게 5병수박희라는 경기를 벌리게 하고 국왕과 문신들이 그것을 구경하였다. 이때 종5품의 문관인 한뢰가 종3품무관인 대장군 리소응이 경기를 하다가 졌다고 하여 뺨을 후려쳐서 섬돌아래로 굴러떨어지게 하였는데 이것을 구경하던 왕과 문신들은 손벽을 치면서 리소응을 비웃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신들은 오래전부터 꾸며오던 정변을 단행하였다.

정중부 등은 의종왕일행이 보현원에 도착하자 순검군을 동원하여 보현원을 포위하고 한뢰를 비롯한 문신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그길로 개경에 들어가 《무릇 문관의 관을 쓴 놈은 비록 서리라도 씨도 남기지 말라!》고 하면서 평소에 못마땅하게 여기던 모든 문신들을 닥치는대로 처단하였다. 이어 의종왕을 거제도로 추방하고 인종의 아우 호(명종)를 왕자리에 들여앉힌 다음 모든 권력을 틀어잡았다.

이 무신정변을 력사에서 《정중부의 란》이라고도 한다.

무신정변은 본질에 있어서 권력과 토지, 노비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봉건지배계급내부에서 벌어진 추악한 권력싸움이였다.

◦ 무신관료배들은 정변후 저들이 올려앉힌 국왕(명종)을 끼고 재추의 벼슬자리를 비롯한 정부의 요직들을 모두 독차지하였다.

상층군인들도 벼슬등급의 순차를 뛰여넘어 정부의 높은 관리로 되였다.

이리하여 무신관료배들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무신정권이 출현하였다. 그후 근 100년간 고려왕정은 무신들이 조종하는 정권으로 이어져왔다.

1170년 무신정변결과에 출현한 정권은 무신관료배들과 소수착취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반인민적이며 관료적인 정권이였다. 무신들은 모든 권력과 재부를 독차지하고 문신들이 감행하던 모든 죄악을 되풀이하였으며 인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서도 문신들에 짝지지 않았다.

실권을 잡은 무신관료배들은 국왕을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나라의 정치를 쥐락펴락하였다. 지난날 상층무신들의 합의기관에 불과하였던 중방이 국가의 최고통수기관으로 되였으며 무지한 자들이 창검과 주먹, 호령으로 정치를 대치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권풍》이 휩쓸었다는 말이 생겨나게 되였다.

무신관료들은 무지막지하게 인민들을 억누르고 수탈하였다.

동북면병마사 조원정은 백성들의 머리카락까지 잘라바치게 하였는데 그 량이 두바리나 되였다고 한다.

결국 권력을 잡은 무신통치배들이 왕권을 가로타고앉아 전횡을 부리며 무지막지하게 인민들의 자주성을 무참하게 짓밟아놓음으로써 농민들을 비롯한 피압박근로대중의 반항심은 극도에 이르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