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봉건적중앙집권력의 약화, 9성설치와 그 파탄

 

△ 봉건적중앙집권력의 약화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봉건국가의 중앙집권력은 점차 내리막길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 고려봉건국가안에서 특권을 가진 대관료귀족들이 자라나 저들끼리 권력쟁탈전을 벌리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해당 사회의 성격은 정권이 어느 계급의 손에 있으며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형태가 어떤가에 따라 규정됩니다.》

이 시기에 왕권을 억누를수 있는 상당한 권력을 가진 량반귀족층이 생겨났으며 또 그들사이에 추악한 권력다툼이 벌어짐으로써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통치는 큰 혼란상체에 빠져들어갔다.

고려봉건통치가 오래 지속됨에 따라 토지와 노비를 더 많이 차지할수 있는 벼슬을 세습적으로 독점한 량반관료층이 고정되여갔으며 또한 그들은 왕실과 결혼관계를 맺음으로써 더욱 권세를 부리게 되였다.

 그리하여 왕의 외가, 처가로 된 특권관료귀족이 차차 머리를 쳐들게 되였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인주(경기도 인천) 리가문벌로서 11세기 말 봉건정부안에서 큰 권력을 차지하고있던 리자의였다. 그는 왕의 외척으로서 왕정안에 강력한 귀족문벌을 형성하고있던 리자연의 손자였다.

대귀족문벌을 배경으로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리자의는 1095년 7월에 군사를 왕궁안으로 내몰아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음모는 국왕의 일가인 종실귀족들의 강력한 반항에 부닥쳐 리자의일당 70여명은 처단되거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였다. 이처럼 리자의의 반란음모는 진압되였으나 그후에도 봉건통치배들속에서 권력쟁탈을 위한 음모는 계속되였다.

ㅡ 량반관료들의 대토지소유가 늘어나고 전시과제도가 문란해졌다.

중앙집권적고려봉건국가의 물질적토대를 이루고있던 전시과제도는 11세기 말~12세기 초에 이르러 자체의 모순과 대토지소유의 장성으로 말미암아 점차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고려봉건국가가 실시한 전시과제도는 개별적량반귀족들이 공전을 개인소유로 만들지 않는 조건에서만 유지될수 있었다. 10~11세기까지 고려봉건국가는 전국의 많은 토지를 지배장악할수 있었으며 그에 기초하여 전시과제도도 그럭저럭 유지할수 있었다.

그러나 력대왕들은 관료귀족들에게 상으로 주는 별사전과 상층관료들과 《공로자》에게 주는 공음전을 비롯하여 자손들에게 물려줄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토지를 계속 주었다.

결과 국가수조지인 공전이 계속 감소되였으며 이것은 전시과제도가 그 자체를 문란시키는 요소를 내포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전시과제도의 문란은 11세기 말~12세기 초에 이르러 왕실과 개별적인 관료귀족들에게 토지가 집중됨으로써 더욱 촉진되였다. 이 시기 국왕의 일가인 종실귀족과 외가인 척실귀족들이 갖가지 비법적인 방법으로 많은 토지를 차지함으로써 국가수조지인 공전은 전시기에 비하여 대폭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1076년 봉건국가는 관제와 전시과제도를 다시 개편함으로써 대토지소유의 장성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실은 물론 상층귀족들이 온갖 수단을 다하여 국가수조지들을 계속 떼여냈다.

끊임없이 공전이 감소되는 형편에서 군인전시과제도도 제대로 실행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ㅡ 이 시기 불교절간도 대토지소유자로 등장하였다.

고려의 력대왕들은 불교를 저들의 계급적지배의 사상적도구로 리용하면서 전국에 수많은 절간을 짓고 거기에 많은 토지를 주었다. 1020년 현종은 안서도의 둔전 1 240경을 현화사에 주었고 1058년에 문종은 경창원소속의 토지를 흥왕사에 넘겨주었으며 1064년에는 이미 대운사에 주었던 토지가 메마른 땅이라고 하여 좋은 땅 100경을 더 주었다. 그밖에 개별적인 중들도 많은 토지를 가지고있었다.

절간들은 멀리 떨어져있는 소유지에는 중들을 파견하여 농민들로부터 조세를 받아들였고 절간경내의 넓은 땅들은 농민들을 예속시켜놓고 직접 경영하였다.

이와 같이 11세기 말~12세기 초에 이미 상당한 면적의 토지가 봉건국가의 권한밖으로 떨어져나가 개별적인 량반귀족, 절간들의 수중에 집중되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토지와 인민들에 대한 장악과 지배에 토대하여 유지되던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는 수습할수 없을 정도로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 9성설치사업의 파탄과 리자겸의 반란

― 9성설치와 그 파탄

고려의 봉건적중앙집권제가 약화되고있을 때인 11세기 말~12세기 초 송화강류역에서 큰 세력으로 장성한 완안부녀진이 고려의 동북지방에로 침투하여 이 지방의 정세가 매우 긴장해졌다.

고려정부는 동북지방의 정세가 날로 긴장해지는데 대처하여 전반적동북지방의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정주성일대에 침입한 침략군을 격파하며 나아가서 갈라전일대에서 완안부녀진세력을 결정적으로 몰아내기 위한 대책을 세워나갔다. 이것은 고구려-발해의 옛 강토였던 동북지방을 되찾기 위한 작전이기도 하였다.

12세기 초에 고려는 녀진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다. 그것은 완안부녀진침략세력을 물리치고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1107년 12월 14일 윤관, 오연총 등의 지휘밑에 17만명의 원정군은 정주성을 출발하여 녀진족들을 공격하였다. 원정군이 한달남짓한 사이에 135개의 녀진인부락을 짓부시며 공격해오자 고려군의 강대한 병력에 위압된 녀진은 싸울 엄두도 못내고 모두 산으로 도망쳐버렸다.

고려군의 기병선봉부대는 적들을 계속 추격하여 두만강을 건너 선춘령(로흑산근방)에까지 진출하였다.

고려군은 새로 차지한 지역에 9개의 성을 쌓고 그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처음에 함주, 영주, 웅주, 복주(단천), 길주, 함주(함흥), 공험진 등의 성을 쌓았으며 그후 의주, 통대진, 평융진(단천)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새로 쌓은 9성지역에 근 7만호에 달하는 남쪽지방인민들을 이주시켰다. 고려정부는 되찾은 동북지방의 넓은 판도를 공고화하기 위하여 함주에 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복주, 영주, 웅주, 길주, 공험진에는 방어사를 파견하였다.

그후 이 일대를 고수하기 위한 치렬한 공방전이 1년이상 벌어졌다.

녀진인들은 료나라와 첨예하게 대립되여있었으므로 고려에 화의를 맺을것과 9성을 넘겨줄것을 여러번 간청해왔다.

1109년 6월 녀진사신은 지난날 고려를 《대국》, 《부모의 나라》로 받들어왔던것처럼 9성을 되돌려준다면 영원히 정성을 다해 공물을 바치고 고려국경에 기와장하나 던지지 않겠다는것을 하늘에 맹세한다고 하면서 9성을 돌려줄것을 애걸하였다.

고려앞에는 적들과의 싸움을 계속하여 철저히 물리치고 되찾은 강토를 끝까지 지켜야 할 무거운 과업이 나섰다.

그러나 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계속되는 전쟁에 대하여 동요하던 나머지 1109년 7월에 9성지방을 녀진에게 되돌려주는 반역행위를 감행하였다.

인민들의 막대한 피의 대가로 수복되였던 고구려-발해의 옛 땅을 다시 녀진인들에게 내여준것은 고려봉건통치배들의 무능성과 나약성 그리고 이 시기 고려의 군사제도와 중앙집권력이 그만큼 약화된것과 같은 취약성과 관련된것이였다.

비록 9성지방을 내주었으나 이 시기 동북지방을 되찾기 위한 고려인민의 투쟁은 큰 의의를 가지였다.

그것은 고려의 변방인 갈라전지방을 강점하고 나아가서 고려를 침략하려던 완안부녀진의 침략기도를 완전히 분쇄하고 나라의 자주권을 굳건히 지켜냈다는데 있다. 그후 녀진은 고려군민의 애국심과 위력에 질겁하여 오래동안 다시 고려를 침공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 리자겸의 반란

12세기 초에 대토지소유가 장성하면서 봉건통치배들속에서 보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기 위한 추악한 권력다툼이 자주 벌어졌다.

봉건통치배들내부의 모순은 국왕과 외척간의 대립으로 나타났으며 그 표현의 하나가 리자겸의 반란이였다.

리자겸은 원래 고려의 대귀족관료였던 리자연의 손자였다. 이자는 자기의 첫째, 둘째딸을 예종(1106~1122년)의 왕비로 들여앉혔으며 1122년 예종이 죽고 그의 아들인 14살짜리 인종(1123~1146년)이 왕자리에 오르자 또 자기의 셋째, 넷째딸을 강다짐으로 인종의 왕비로 밀어넣었다. 결국 인종의 외할애비이면서 장인으로 된 리자겸은 50여명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자기의 심복들로 봉건정부의 요직을 채워놓았다. 이리하여 리자겸은 왕과 맞설수 있는 최대의 권력자로 등장하였다.

최대의 권력자, 수탈자로 된 리자겸은 드디여 왕자리까지 탐내였다. 그리하여 왕가대신 리가가 왕이 된다는 요언을 퍼뜨리면서 국왕을 독살하기 위한 음모까지 여러번 꾸미였다. 한편 리자겸의 권력독점과 한없는 전횡에 불안을 느낀 인종은 저대로 리자겸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였다. 그리하여 국왕은 1126년 2월에 자기 심복자들과 군대를 동원하여 리자겸일당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 리자겸일당이 반란을 일으켰다.

리자겸과 결탁한 무신 탁준경은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불사르고 반대파를 닥치는대로 숙청하였으며 인종왕을 자기집에 억류시켜놓았다.

리자겸의 반란은 나라안에 큰 정치적혼란을 조성하였다.

반란으로 실권을 독점한 리자겸일파는 대외적으로 비굴하게 금나라에 대한 사대매국행위에 매달렸다.

리자겸은 사대주의를 해서라도 대외적마찰을 피하고 저들의 지반을 다져 왕자리를 차지하려는 반역적인 생각으로부터 금나라에 굴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금나라는 1115년에 완안부녀진이 세운 나라이다. 교만해진 금나라는 고려에 《형제의 관계》를 요구하다가 1125년에는 군신관계를 맺을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리자겸일파는 1126년 3월 대신들의 회의에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것을 《도리》로까지 표방하면서 민족허무주의적인 금나라사대를 결정하였고 사신을 보내여 사대의 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이것은 인민들속에서는 물론 왕정안의 관료들에게까지도 큰 불만을 자아냈다.

인종왕은 이러한 정세를 리용하여 리자겸과 탁준경사이에 쐐기를 박은 다음 그해 5월 탁준경을 부추겨 무력으로 리자겸을 손쉽게 제거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탁준경마저 제거함으로써 리자겸반란세력은 완전히 진압되였다.

리자겸의 반란은 1126년 5월에 진압되였으나 통치배들은 금나라에 대한 사대외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더 깊숙이 빠져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