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사상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에는 조성된 내외의 정세와 사회발전의 합법칙적요구를 반영하여 개화사상, 동학사상, 위정척사사상 등 새로운 사조들이 출현하였다.

ㅡ 근대시기 사상조류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것은 개화사상이였다.

개화사상은 1850년대에 시대의 사조에 민감한 중인출신의 선각자 류홍기, 오경석 등에 의하여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그후 류홍기, 박규수의 영향밑에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에 의하여 발전하고 체계화되였다.

개화사상의 연원은 실학사상이였다. 실학자들은 반동적인 량반관료들과는 달리 봉건사회의 악페를 인식하고 근대과학의 성과를 연구하게 되면서 일련의 진보적인 견해들을 내놓았다. 물론 그들의 견해와 주장들은 봉건적테두리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진보적인 요소들은 개화사상의 발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실학의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요소와 세계 여러 나라들의 발전추세를 파악한데 기초하여 개화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당시 개화사상가들의 견해에서 중요한것은 우선 사회정치개혁에 관한 사상이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사상가들은 나라를 시급히 근대적으로 발전시켜나가기 위해서는 썩어빠진 량반들과 그 페해의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봉건적신분제도를 철페하고 부르죠아적《인권》을 존중하며 근대적인 립헌군주제도를 수립할것을 주장하였다.

개화사상가들의 견해에서 중요한것은 또한 나라의 경제, 문화, 군사분야에 대한 개혁사상이였다. 그들은 경제분야에서 근대적인 자본주의기업을 발전시킬것을 주장하면서 공업, 상업, 교통운수, 토지개간과 같은 여러 부문에 회사를 설치하여 그 조직과 운영에서 나서는 기술실무적문제에 대하여서도 강조하였다. 문화분야에서는 뒤떨어진 봉건문화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문화와 기술을 발전시키며 근대적인 교육제도를 세움으로써 인재들을 양성할것을 주장하였다. 군사분야에서는 징병제를 실시하고 군대의 교육과 훈련, 군사장비를 근대화할것을 주장하였다.

개화사상가들은 또한 대외관계분야에서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의 사대굴욕적인 외교를 반대하면서 나라의 독립과 자주권을 굳건히 지켜나갈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개화사상은 이처럼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봉건적잔재를 청산하고 자본주의제도의 수립을 주장한 진보적인 사상이였으며 외래침략과 간섭으로부터 나라의 독립과 자주권을 수호할것을 지향한 애국적인 사상이였다. 개화사상은 자본가계급의 리해관계를 대변한 부르죠아사상조류로서 불철저한것이였다. 그러나 개화사상은 시대의 사조를 반영한 선진사상으로서 그후 우리 나라에서 부르죠아개혁운동, 부르죠아민족주의운동의 사상적기초로 되였다.

ㅡ 근대시기 사상조류에서 중요한것은 동학사상이였다.

동학은 1860년 4월 몰락한 농촌량반출신의 최제우에 의하여 창시되였으며 그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더욱 체계화되였다.

동학은 그 기본사상과 리념에서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고유한 민족종교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동학도들이 주장한 <인내천>의 사상은 사람을 하늘에 비기며 존중했다는 측면에서는 비교적 진보적이였다고 볼수 있으나 그것은 종교적인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자체를 신적존재로 보는것으로 하여 리론적불합리를 면치 못하고있다.》

동학의 리론가들은 우주전체가 《지기》라는 그 어떤 특수한 기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보면서 사람은 곧 신이며 하늘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그들은 하늘을 맹목적으로 숭배할것이 아니라 사람자체를 믿어야 하며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의 평등을 보장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인내천》사상은 이러한 측면에서 비교적 진보적이였다고 볼수 있으나 그것은 종교적인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것이였다.

동학의 리론가들은 또한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주장하면서 《지상천국》설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당시 봉건사회의 부패성과 유미자본주의렬강의 침입을 통탄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들이 안전하게 살도록 하며 사람들을 도탄속에서 널리 구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을 개벽하여 천국을 건설할수 있다는 원리로부터 《정신개벽》, 《민족개벽》, 《사회개벽》과 같은 3대개벽의 실천운동을 벌려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이러한 견해들은 보수적이며 비과학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당시의 력사적조건에서 나라의 독립을 고수하고 만민이 복락하는 리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애국적이며 진보적인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ㅡ 근대시기의 사상에서 중요한것은 위정척사사상이였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기정진, 리항로를 비롯한 량반출신의 유학자들은 《내수외양》의 구호밑에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다. 위정척사라는 말은 《바른 학문》인 유교를 지키고 요사스로운 학문인 카톨릭교를 반대한다는 뜻이였다.

위정척사사상은 그후 유미자본주의렬강들과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속에서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사상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위정척사론자들은 자연에 대한 견해에서 세상만물의 시원을 리와 기로 보면서도 자연계의 사물현상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언제나 운동변화과정에 놓여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량이 쌓이면 다른 사물을 이룰수 있다고 보았으며 사물현상들의 변화원인이 그 사물자체내에 존재하고있으며 대립적인 두 측면의 호상작용에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기본상 관념론에 기초하고있으나 소박한 변증법적사상요소를 반영한것이였다.

위정척사론자들은 사회에 대한 견해에서 유럽아메리카 자본주의세력이 우리 나라에 거듭 침입하여왔을 때 화의론을 배격하고 적극적인 항전론을 주장하였으며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단합한다면 능히 침략자들을 쳐물리칠수 있다고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물론 봉건적인 충군사상에 기초하고 보수적인 측면도 있으나 당시 유미렬강세력들과 일본의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책동이 날을 따라 더욱 로골화되고있던 조건에서 애국적이며 진보적인것이였다.  그러므로 위정척사사상은 그후 우리 인민의 반침략투쟁과 반일의병운동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놀았다.

우리 나라 근대사상사에서 중요한 사상조류의 하나는 1894년농민전쟁참가자들과 반일의병운동자들, 애국문화운동자들의 반봉건반침략사상이였다.

◦ 1894년농민전쟁을 지도한 전봉준은 당시 반동적인 봉건제도와 부패타락한 봉건통치배들의 죄상을 폭로하면서 권세있는 모든 량반귀족들을 다 없애버려야 한다는 《진멸권귀》의 투쟁구호를 내세웠다.

그는 《페정개혁안》에서 반봉건적인 민주주의사상과 인권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봉건사회하층인민들의 리해관계를 뚜렷이 반영한 진보적사상을 제기하였다.

그는 서양오랑캐와 왜적을 우리 나라에서 쳐없애버려야 한다는 《축멸왜양》의 투쟁구호를 내놓았다. 이것은 당시 우리 나라에 대한 외래침략자들 특히 일제침략자들의 침략행위가 로골적으로 감행되는 조건에서 나라를 지켜 싸우려는 애국적인것이였다.

이와 같이 전봉준의 사상은 매우 진보적인것이고 애국적이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유교적인 충군사상에서 완전히 벗아나지 못하였으므로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철저한 투쟁정신으로 일관되지 못하였다.

대표적인 반일의병장인 류린석은 위정척사론자의 한사람이였으며 일생을 반일의병투쟁에 바쳤다.

◦ 류린석의 사회정치사상에서 중요한것은 반침략적애국사상이였다. 류린석은 모든 사람들이 애국심을 기초로 하여 서로 굳게 단결하여 투쟁한다면 나라는 멸망에서 구원될수 있고 사람들이 노예의 운명에서 벗어날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애국자로 되기 위하여서는 《지》, 《인》, 《용》 세가지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가 강조하고있는 애국심은 봉건적인 충군사상에 기초한것이였다.

그의 사상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으나 그 진보적인 요소들은 당시 력사적환경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지고있었다.

ㅡ 애국문화운동의 대표적인 사상가들로서는 리기,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이다.

리기나 박은식은 당시 유학자들의 보수성, 사대주의 그리고 부패무능성과 봉건유교사상의 반동적교리를 비판하면서 유교의 낡고 페쇄적이며 반동적인 악습을 없애버리고 그것을 개혁할것을 주장하였다.

장지연은 자연계에서나 사회에서나 모든 사물은 변화발전하며 따라서 모든 문제를 시대의 발전추세에 맞게 처리해나가야 한다는 진보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박은식을 비롯한 애국문화운동자들은 국가의 본질에 대하여 초계급적으로 리해하고있었다. 그들은 부르죠아적립장으로부터 출발하여 국가와 사회는 그 어떤 군주나 몇사람의 소유물로 될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동소유로 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주요하게 과학지식과 기술의 발전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봉건유교적인 견해에 비하면 일정하게 진보적이였으나 총체적으로는 관념론적이며 부르죠아적관점이였다.

애국문화운동자들은 또한 봉건적신분제도나 문벌제도를 페지하고 부르죠아적《민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민권》옹호사상은 당시 우리 나라의 미숙한 부르죠아계급의 요구를 반영한것으로서 반봉건적인 요소를 가지기는 하였으나 불철저하였다.

또한 애국문화운동자들은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고 민족적독립을 지키기 위하여서는 산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나라의 힘을 강화하며 력사교육과 민족어의 확립을 통하여 민족적각성과 애국심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 일정한 긍정적의의를 가지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주요한 투쟁방도를 애국문화운동에서 찾은것은 그들이 가지고있었던 본질적약점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애국문화운동자들의 사상은 당시 민족자본가계급의 지향과 요구를 반영한것으로서 우리 나라 근대사상사에서 진보적인 사상조류의 하나를 이루면서 반봉건반침략투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