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본군국주의의 남조선재침의 강화와 집요한 반공화국책동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남조선에 대한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재침책동은 우리 조국의 통일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장애물로 되고있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실현해보려고 기회만 노리고있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남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적 침투를 본격화하고있으며 미제의 〈두개 조선〉정책에 적극 추종하면서 남조선반동들을 민족분렬책동에로 부추기고있습니다.》

이미 1960년대 후반기부터 남조선에 대한 재침을 본격화해온 일본군국주의자들은 1970~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미제의 《두개 조선》정책의 침략적요구에 따라 남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적침투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남조선을 저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고 책동하였다.

 

일본반동들의 남조선재침의 강화

- 일본반동들은 남조선에 대한 정치적침투를 강화하고 그것을 군사적동맹관계로까지 발전시키려고 책동하였다.

○ 박정희군사파쑈정권에 대한 정치적지원을 강화하였다.

• 박정희역도의 《유신》독재체제를 정치적으로 찬양하고 주요계기때마다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해주었다. 1971년 괴뢰대통령선거때 박정희역도에게 1억US$의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

• 통치위기를 조성할수 있는 정치적사건들을 괴뢰들에게 유리하게 처리해주었다.

1973년 8월 도꾜 한복판에서 벌어진 김대중랍치사건을 일본법을 어기면서까지 비호묵인하였다. 일본정보기관은 랍치계획을 알고있으면서도 저지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협조하였다. 사건발발후에 일본인민들과 세계여론의 규탄에 《일본은 <한국>중앙정보부가 일본의 주권을 침해하였다고 말할 자료를 가지고있지 못하다.》고 떠벌여댔다. 1974년에 박정희역도가 《문세광저격사건》을 조작하였을 때에도 이에 동조하여 총련탄압을 강화함으로써 괴뢰들을 정치적으로 적극 지원하였다.

○ 일본반동들은 1980년대에 남조선괴뢰들과의 정치군사적결탁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본반동들은 남조선괴뢰들과의 정치적관계를 군사동맹관계로까지 발전시키려고 책동하였다. 1983년 1월 나까소네의 남조선행각은 1980년대 일본반동들과 괴뢰들사이의 정치군사적관계를 더욱 밀착시키는 계기로 되였다. 이후 호상군사정보통보체계가 수립되고 괴뢰군과 《자위대》사이의 군사교류가 확대되였으며 공동훈련까지 시도하였다. 1991년 6월 미일군사작전협의기구인 《미일안보협력소위원회》에 괴뢰들을 인입하여 그 명칭을 《3개국지역안보정책협의회》로 바꾸고 결탁을 강화하였다.

- 일본반동들은 남조선에 대한 경제적침투도 강화하였다.

○ 일본독점자본은 남조선경제의 모든 부문에 깊숙이 침투하여 그 주요명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76년 5월 현재 남조선에 직접투자한 외래독점자본은 총 934건에 9억 459만 6천US$였는데 그중 일본독점자본은 건수에서 81%, 자본규모에서 66.3%를 차지하였다.

○ 일본독점자본의 남조선침투는 1970년대에 이르러 남조선경제를 일본경제에 통합하여 하나의《경제협력권》을 형성하는데까지 이르렀다.

1974년에 남조선 및 일본경제를 《지역화》,《계렬화》할데 대하여 남조선괴뢰들과《합의》를 보고 《마산자유수출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공업단지들을 설치하였으며(1970년부터 시작) 여기에 일본기업체들을 대대적으로 들이밀었다. 이로써 미제의 식민지통치하에 있는 남조선에 일본의 새로운 《조계지》, 《남조선안의 일본》이 생겨나게 되였다.

○ 일본독점자본의 남조선침투는 1970년대 후반기부터 직접적인 군사적성격을 띠고 감행되였다.

• 남조선괴뢰들의 무기생산에 필요한 중화학공업개발에 경제적《원조》를 집중하였으며 일본의 무기공장을 남조선에 옮겨놓는 방법으로 남조선의 군수산업에 직접 침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대표적군수업체들인 미쯔비시상사, 미쯔이물산, 히다찌제작소를 비롯하여 30여개의 일본군수산업체들이 남조선에 기여들었다. 일본반동들의 이러한 책동은 일본국내에서는 《무기수출3원칙》에 의해 마음대로 무기를 수출할수 없는 조건에서 군수산업체들을 남조선에 들여다 무기를 생산하여 팔려는 경제적타산과 함께  남조선의 군수산업을 장악하여 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교활한 목적에서 출발한것이였다.

- 일본반동들은 《친선뉴대강화》라는 미명하에 남조선에 대한 사상문화적침투도 더욱 강화하였다.

○ 남조선인민들속에서 반일감정을 마비시키고 친일사대주의사상을 고취하였다.

일본반동들은 1971년 서울에 《일본문화쎈터》를 설립하고 이를 거점으로 해마다 평균 200만부이상의 출판물들을 남조선에 들이밀었다. 이것들은 친일사대주의와 사무라이정신, 군국주의, 일제의 과거침략행위를 찬양하고 일본의 《번영》을 소개선전하며 비애, 허무, 색정, 타락, 범죄를 설교하는것들이였다.

뿐아니라 일본영화와 연극도 대대적으로 흘러들어왔으며 일본반동가요들은 1970년대에 남조선에 류포된 외국음악의 80%를 차지하였다.

○ 남조선에 일본말을 대대적으로 퍼뜨리였다.

그 목적은 일본에 대한《리해를 증진》시킨다는 구실밑에 재침책동을 합리화하며 일본과 남조선의《문화적공통성》을 떠벌이면서 남조선에 대한 사상문화적침투를 더욱 강화하려는것이였다. 그리하여 1972년 현재 서울과 부산에만 하여도 410개의 《일어강습소》가 존재하였다.

○ 《친선협조》,《문화교류》,《관광촉진》의 간판밑에 군국주의사상문화적침략의 앞잡이들을 남조선에 수많이 파견하며 남조선의 친일주구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일본에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남조선인민들 특히 청년학생들속에서 반일감정을 마비시키고 친일사대주의사상과 왜색왜풍을 부식시키려고 책동하였다.

일본반동들은 도꾜에 사상문화적침략을 목적으로《관광회사》까지 설치해놓고 해마다 수십만명에 이르는 침략의 척후병들을 《관광객》의 명색으로 남조선에 파견하였으며 이와 함께  매해 수십만명에 이르는 남조선사람들을 일본에 끌어들이였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집요한 반공화국책동

- 일본반동들은 1970년대에 미제의 《새 아시아정책》에 편승하여 해외팽창야망을 실현해보려고 꿈꾸면서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는 전쟁준비에 미쳐날뛰였다.

○ 일본반동들은 《자위대》를 강화하는데 새로운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반동들은 《국력에 상응한 군사력》, 《크게 행동할수 있는 군사력》을 가질 때가 되였다고 떠벌이면서 《자주방위구상》이라는 미명하에 1972~1976년까지의 제4차《방위력정비계획》을 세우고 적극 추진시켰다. 당시 일본방위청장관이였던 나까소네는 이것이 《자위대》를 《조선전쟁규모의 전쟁수행능력을 가진 군대로》만들기 위한 무력증강책동이라는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 일본반동들은 《향토방위군》이라는 이름밑에 100만명을 무장시킬것을 계획하고 700여만에 달하는 징집대상자명단까지 만들어놓았다.

○ 일본반동들은 미국과 남조선괴뢰들과의 군사적결탁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책동하였다.

1976년 여름에 《미일방위협력소위원회》라는 조선에서의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미일군사작전사령부와 다름없는 《군사협의기관》을 내왔으며 《자위대》고위급장교들과 미제침략군 및 남조선괴뢰군 우두머리들이 서로 부단히 접촉하면서 반항공조기경계방위체계와 군사통신, 정보체계를 완성하며 미제침략군사령부가 지휘하는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형성하려고 책동하였다.

○ 일본반동들은 미제가 새 조선전쟁을 일으킬 때 조선전선에 《자위대》를 급속히 출병시킬수 있는 군사적준비도 추진하였다.

《자위대》의 각 부대들을 증강개편하고 조선과 기후풍토와 지형조건이 비슷한 혹가이도에서 산악전과 내한훈련을 전문적으로 진행하도록 하였다. 1971년 8월 혹가이도에서는 120대의 직승기, 2 000여대의 차량, 9 000여명의 륙상《자위대》가 참가한 공격수송훈련이 감행되였다. 심지어 조선전쟁을 가상하여 《자위대》안에 《조선어강좌》를 설치하고 조선말까지 배워주게 하였다.

- 일본반동들의 반공화국침략전쟁준비책동은 1980년대 이후 《군사대국화》책동이 감행되면서 더욱 강화되였다.

○ 일본반동들의 《군사대국화》책동은 1982년에 집권한 나까소네정권때부터 본격적으로 감행되기 시작하였다.

1983년 1월 나까소네-레간《회담》을 계기로 미제의 군사적요구들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일본령토의 불침항공모함화, 일본주변 4해협의 봉쇄, 1 000mile해상교통로의 《방위》등을 《3대전략목표》로, 《미일분업체계》에서의 일본의 《국가적분업》으로 선언하였다.

○ 일본반동들은 《군사대국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그 법적기초와 국제적환경을 마련하는데 광분하였다.

전쟁포기를 선언한 현행헌법을 뜯어고치기 위한 사회적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해석개헌》《명문개헌》책동을 벌렸다. 이와 함께 남조선과 세계 여러 나라들에 동분서주하면서 아시아와 세계인민들의 반일감정을 무마하며 《군사대국화》를 다그칠수 있는 국제적환경을 마련하려고 책동하였다.

○ 일본반동들은 미제의 대조선군사전략에 적극 가담하면서 반공화국침략전쟁준비책동에 미쳐날뛰였다.

종전에는 일본북부지역에 군사력을 집중배치하였다면 1980년대 이후에는 우리 나라의 동남쪽을 향한 일본서부지역에 증강하고 공격전투에 맞게 개편보강하였으며 1983년부터 1990년까지의 제5차, 제6차《5개년방위력증강계획》기간에 모든 함정들을 미싸일화하는 등으로 군사장비수준을 5~6배로 높여 일본단독으로 지역전쟁을 수행할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1991년부터는 핵무장화를 적극 추진하는데로 넘어갔다.

이렇듯 일본반동들은 미제의 세계제패전략에 적극 편승하여 반공화국침략전쟁을 위한 《군사대국화》를 다그치는데 미쳐날뛰였다.

- 일본반동들은 우리 나라에 대한 정치경제적봉쇄와 적대시책동을 계속 강화하였다.

○ 일본반동정부는 1970년대에 반공화국적대시정책에 집요하게 매여달리였다.

• 《두개 조선》정책을 대조선정책의 기본으로 내세운 후 1974년부터 우리와의 교류확대를 정식 표명하였으나 《정치분야의 교류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하였다.

• 국제무대에서 우리 공화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일본반동들은 1973년 5월 다른 나라들까지 끌어들여 우리 나라의 국제보건기구가입을 방해하였으며 1974년 6월에는 오스트랄리아가 우리 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는것과 관련하여 이것이 《남조선의 립장을 약화》시킨다고 하면서 그를 보류해달라고 《건의》하는 추태까지 부렸다.

• 우리와 거래하는 일본기업체들에 대하여서는 관세와 융자의 특혜대상에서 제외하고 우리 나라에 수출하는 상품과 시설의 품목을 엄격히 한정함으로써 일본기업체와 상사들이 우리의 사회주의건설에 필요한 물품들은 팔지 못하도록 각방으로 책동하였다.

• 공화국의 합법적인 해외공민단체인 총련의 활동을 억제하고 재일동포들에 대한 탄압책동을 감행하였다.

일본반동들은 1972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6차회의에 참가하는 총련대표들의 재입국을 거부하였으며 지어 학생소년예술단의 공화국방문까지 가로막으며 총련탄압에 열을 올리였다.

○ 일본반동들은 1980년대에 반공화국적대시책동과 총련탄압소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 남조선괴뢰들의 반공화국모략소동에 맞장구를 치면서 우리에 대한 정치, 경제적제재를 실현하는데 앞장에 서서 날뛰였다.

• 반공화국정탐모략책동에도 미쳐날뛰였다.

1983년 11월 일본반동들이 무역선인 《제18후지산마루》를 통하여 감행한 정탐모략사건과 1984년 7월 어선인 《제36야찌요마루》를 통하여 감행한 반공화국모략사건들은 그를 잘 보여주고있다.

• 총련과 재일조선공민들에 대한 폭압책동의 도수를 더욱 높이였다.

1983년 11월 18일 일본반동들은 총련중앙회관을 습격하여 백주에 총련일군들에게 권총을 란사하였으며 12월 11일에는 총련 쯔루미지부사무소를 습격하였다. 뿐아니라 재일조선학생들에 대한 집단구타와 협박행위, 학교습격파괴책동, 심지어 녀학생들의 치마저고리를 무참히 찢어버리는 폭행도 감행하였다.

 이렇듯 일본군국주의자들은 1970~1980년대에 미제의 《두개 조선》정책에 적극 추종하면서 조선의 통일을 방해하고 남조선에 대한 재침과 반공화국책동을 악랄하게 벌린 철천지원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