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이 고안해낸 38분계선

 

 

김일성-김정일주의조국통일리론은 우리 나라의 분렬이 우리 민족내부의 모순에 의해서 초래된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외세에 의하여 강요된것이라는것을 명백하게 밝혀주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조국의 통일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외세에 의하여 국토가 량단됨으로써 생겨난 문제이다.》

분렬의 근원을 정확히 해명하는것은 조국통일문제의 본질과 성격으로부터 주체와 대상, 원칙과 방도에 이르기까지 조국통일위업수행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민족의 의사와 리익에 맞게 풀어나가기 위한 원칙적문제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전세계적범위에서 지난날 식민지, 반식민지로 있던 많은 나라들이 제국주의식민지통치제도를 뒤집어엎고 자유와 독립의 길,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자기 힘으로 끝장내고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한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과 함께 분렬이라는 억이 막힌 운명을 강요하였다. 오랜 세월 하나의 강토에서 한피줄을 잇고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면서 살아온 우리 민족이 하나로만 살수 있는 민족고유의 생리와 의사에는 관계없이 북과 남으로 갈라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오래전부터 전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집요하게 책동하고있던 미제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기회로 38분계선을 고안해내고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한데 기인한것이다.

 

△ 미제는 오래전에 대조선침략정책을 작성하고 그 실현을 위한 침략책동을 강화하였으며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던 시기에 국제정치외교무대를 통해 본격화되였다.

미제의 전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책동은 19세기 후반기부터 시작되였다.

 

 

미제침략선《셔먼》호를 격침시키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평양성인민들

 

오래전부터 아시아대륙에서 조선반도가 차지하는 전략적중요성을 간파한 미제는 남북전쟁이 끝나자 조선에 대한 침략의 첫시작으로 침략선 《셔먼》호의 침입을 단행하였으나 조선인민의 항쟁으로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였다. 《셔먼》호사건이후 조선에 대한 여러차례의 무력침공에서 거듭되는 참패를 당한 미제는 1882년에 조선봉건정부에 침략적이고 예속적인 불평등조약인 《조미조약》체결을 강요하였다. 그후 미제는 1905년 만일 다른 나라가 두 나라가운데 어느 한 나라에 대해서 멸시하거나 불법행위를 할 때에는 서로 원조한다는 《조미조약》의 기만적인 약속을 줴버리고 저들의 필리핀강점을 인정받는 대신 일제의 조선강점을 협력하고 조선에 대한 《보호통치》를 인정한다는 《가쯔라-타프트협정》을 조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미국이 조선침략에 대한 야망을 버렸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니였다.

세계제패전략의 한 고리로서 아시아대륙을 정복하려면 지리적으로 중국동북과 로씨야의 원동지방에 잇닿아있고 대륙으로 통하는 관문의 위치에 있으며 또 동북아시아의 그 어느 지역이나 타격할수 있는 유리한 군사적요충지인 조선을 자기의 손안에 넣어야 한다는 미제의 침략정책, 지배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1941년 12월 진주만에 대한 일본의 기습을 계기로 대일전쟁을 선포한 미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쑈세력의 패배가 기정사실로 되여감에 따라 세계제패야망을 로골적으로 드러내고 그 일환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외교전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1942년 2월 24일 당시 미국대통령이였던 루즈벨트는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우와의 회견에서 일본이 패망한 다음 해야 할 최소한도의것은 식민지를 반환해야 하는 문제라고 함으로써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권을 넘겨받을 속심을 드러내놓은바 있다. 이러한 침략야욕으로부터 출발하여 루즈벨트는 1943년 11월 까히라회담에서 일제가 패망한후 조선에 독립을 부여할데 대한 견해가 우세하게 되자 그 선언에 《적당한 시기》라고 써넣도록 함으로써 저들의 침략야망을 은페하였다. 그리하여 까히라선언은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류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은 자유독립국가로 될것이다.》라는 막연하고 모호한 기록을 남기게 되였다.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우는 그후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독립》될것이라고 한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리해하고있었는가에 대하여 루즈벨트와 직접 담화한데 기초한것이라고 하면서 루즈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당면한 결과로서의 식민지《해방》은 미국의 필리핀정책과 같은 길을 따라 실현될것이라는 전망을 가지고있었다고 한바있다.

 

이후 루즈벨트는 테헤란회담얄따회담에서 식민지에서 해방된 조선은 강대국의 후원밑에 《민주적제도속에서 교육되여야 한다.》는 《신탁통치》안을 또다시 주장하였다.

 

 

얄따회담(왼쪽으로부터 쳐칠, 루즈벨트, 쓰딸린)

 

미제는 제2차 세계대전기간에 전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을 《분할점령》하는것으로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루즈벨트의 지령에 따라 미국무성이 조선에 대한 《4개국분할점령안》이라는것을 짜놓고있은 사실이 실증해주고있다.

 

그에 의하면 조선을 4개국이 분할점령하여 《강대국》들의 《공동행정기구》나 《신탁통치기구》를 두고 통치한다는것이였다. 루즈벨트는 이에 기초하여 1945년 2월 크림(얄따)회담에서 20~30년간의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들고나왔으며 그 후임자인 트루맨도 1945년 7월 17일~8월 2일에 있은 포츠담회담에서 같은것을 들고나왔던것이다.

 

포츠담회담장, 《포츠담선언》발표

 

 

이처럼 미제는 국제정치외교무대에서 전조선에 대한 저들의 지배를 인정받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뜻대로 될수 없었다.

정치외교적방법으로는 결코 조선에 대한 지배를 실현할수 없게 된 미제는 일제를 대신해서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는 길을 택하게 되였다.

미제는 1945년 당시 쏘련이 대일전쟁에 참가한 조건에서 일본을 련합국이 아니라 저들에게 항복시킴으로써 일제의 식민지였던 전조선을 자기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미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으로의 진격이 개시되고 당시 쏘련군대가 대일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부랴부랴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을 떨구었다. 이것은 세상사람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괴멸과 조선의 해방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진군과 당시 쏘련군대의 대일참전에 의한것이 아니라 미국의 원자탄에 의한것인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대일《전승》의 《열매》를 독차지하고 전후 아시아문제처리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려는것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전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미제의 책동은 결코 실현될수 없었다.

 

미제는 38゜선을 분계선으로 조작하고 남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였다.

 

해방직후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에 기여든 미제침략군

 

일제는 미제의 원자탄공갈에도 투항하지 않고 반항을 계속하였다. 이때 조선인민혁명군이 대일전쟁에 참전한 당시 쏘련군대와 함께 조선국내에로 진격하게 되자 미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쏘련군대가 조선의 전령토를 해방하는것을 막을 계책을 꾸미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의 한 출판물은 《미국은 무엇인가 대책을 취하여 쏘련군대가 조선반도를 단숨에 남하하여 전조선령토를 점령해버리지 않도록 하는것이 초미의 문제였다. 우리로서는 반도의 어디에나 선을 긋지 않으면 안되였다.》(죤 칸서,《맥아더의 수수께끼》277페지)라고 썼다. 또한 남조선의 한 출판물은 《분단에 관한 국제적합의가 없었던 조선이 일본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진공상태가 되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미국은 분단안을 결정한것이며 이는 <행정적편의>에 립각한 즉흥적이며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다.》(도서 《랭전과 미국의 대아시아정책》84페지)라고 썼다.

 

급변한 정황에서 전조선을 점령할수 없게 됐다는것을 간파한 미제는 남조선만이라도 강점함으로써 《극동의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야망밑에 우리 민족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제멋대로 38゜선을 분계선으로 그어놓을것을 획책하게 되였다.

 

 

 

당시 트루맨은 조선침략의 전초기지로서 남조선을 차지하려고 1945년 8월 10일 미군을 조선반도에 상륙시킬 방안을 모의한 끝에 미군이 강점할 지역을 실무자들이 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방성에 몰려든 미군고위장교들은 조선반도의 분렬에 대하여 옥신각신하다가 조선강점 일제침략군의《방어》임무의 분담선에 줄을 긋는데 합의하고 조선의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하여 쏘미량군이 각기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실행할것을 트루맨에게 건의하였다. 이것은 바로 패망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분담선확정》이라는 미명아래 북위 38゜선을 계선으로 하여 조선반도를 북과 남 두 지역으로 분할하고 남조선을 미군이 강점하는것이였다.(남조선출판물《미국의 대아시아정책》1권 136페지)

 

이리하여 미군이 조선의 북위 38゜선남쪽지역을 강점할데 대한 《최종안》이 미국의 국무, 륙군, 해군 3성조정위원회의 합의를 거쳐 트루맨의 《일반명령 제1호》로 작성되여 공포되게 되였다.

 

트루맨의 《일반명령 제1호》가 발표될 때까지 조선의 분렬선을 38゜선으로 그을데 대하여 국제적으로 론의한적은 없었다. 다만 미제는 최소한의 대가를 치르고 일본을 점령하기 위하여 쏘련의 대일참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고있었을뿐이였다. 그들은 이 경우 극동에 대한 쏘련의 영향력이 확대될수 있기때문에 그것을 억제할 전략을 준비하고있었으나 일본의 급작스러운 패망으로 하여 그 전략은 구체화되지 못하고있었다. (남조선출판물 《랭전과 미국의 대아시아정책》 84페지)

 

당시 바빠난 미제는 8월 15일 저들이 조작한 38゜선을 일제의 무장해제를 위한 지역분담계선으로 감싸고 이에 대하여 당시 쏘련, 영국, 중국(장개석이 통치하던 중국)에 통고하고 구두합의를 보았다. 결국 38゜선은 조선에서의 일본군의 항복접수와 무장해제를 위한 쏘미사이의 당분간의 책임분담지역계선으로 설정되였던 림시적인 계선이였다.

 

하지만 트루맨은 《일반명령 제1호》를 하달하고 그것을 당시 필리핀의 마닐라에 있던 미태평양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통고하여 미군을 조선의 38゜선남쪽지역에 상륙시키도록 하였던것이다. 이에 따라 맥아더는 1945년 8월 20일에 일제의 조선총독이였던 아베에게 《특별명령》으로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남조선의 치안을 전적으로 책임질데 대하여 명령하였으며 그 이튿날인 8월 21일에는 미제24군사령관 하지가 남조선인민들에게 《현재의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공손히 참고견디라는것을 삐라를 통하여 모욕적으로 강요하였던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제침략군은 1945년 9월 8일 남조선을 강점하였다.

 

조선의 38゜선 분할점령안은 세계제패를 위한 대아시아전략실현의 발판으로 조선의 절반땅만이라도 강점하려는 미국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제안된 조작품이였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대통령 트루맨자신도 《38゜선을 조선의 분할선으로 하는것은 한번도 국제적토의에 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미국측에서 일본의 전쟁기구가 돌연히 붕괴되였을 때 해결책으로 제안된것이였다.》고 고백하였다.

 

이처럼 미제가 38분계선을 조작하고 남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함으로써 조선에 북과 남을 가르는 분계선이 생겨나게 되였으며 민족분렬의 비극사가 시작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