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년 3. 1인민봉기

 

△ 3.1인민봉기의 폭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 만세!>의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강도 일제를 반대하여 전민족적투쟁을 전개한 날이며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날입니다.》

3.1인민봉기는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밑에서 모진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온 조선민족의 쌓이고 쌓인 울분과 원한의 폭발이였다.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시기는 조선이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전변되여 우리 민족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를 비롯한 모든 정치적자유를 빼앗기고 이 땅의 귀중한 재부를 마구 강탈당하였으며 끝없는 고통속에 신음해온 수난의 시대, 암흑의 시대, 기아의 시대였다.

1910년대에 들어와 비밀결사운동과 독립군운동, 애국문화운동으로 부단히 힘을 축적하여온 우리 민족은 암흑의 시대, 수탈의 시대를 그대로 감수할수가 없어 분연히 궐기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로씨야에서의 10월혁명의 승리는 조선인민의 거족적인 반일항전에 고무적영향을 주었다.

애국적청년학생들, 지식인들, 천도교, 그리스도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인사들의 주도하에 3.1인민봉기는 면밀하게 계획되고 추진되였다.

갑신정변과 갑오농민전쟁, 애국문화계몽운동, 의병투쟁을 통하여 줄기차게 이어지고 높이 발휘되여온 우리 인민의 민족정신은 마침내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화산처럼 분출하였다. 

 

 

 

3.1운동에 떨쳐나선 인민들

 

3월 1일 평양에서는 낮 12시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숭덕학교운동장에 모여들어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것을 엄숙히 선포한 다음 《조선독립 만세!》,《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리였다.

시위대렬이 거리로 밀려나오자 수만명군중이 이에 합세하여 대렬은 삽시에 1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이날 만경대와 칠골인민들은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가 떨쳐나 평양성안으로 전진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리신 나이에 반일봉기대렬에 참가하시여 보통문까지 가시였다.

일제는 기마경찰대와 군대들까지 동원하여 도처에서 군중에게 칼을 휘두르며 총탄을 마구 퍼부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였으나 봉기군중은 두려움을 모르고 원쑤들과 육탄으로 대항하였다.

한편 일제경찰서를 둘러싸고있던 군중들은 돌로 유리창을 까부시고 갇혀있던 60여명의 애국자들을 석방하였다.

이날 서울에서도 독립만세시위투쟁이 벌어졌다.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청년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이 자주독립국가라는것을 선포하자 수많은 군중이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며 시위에로 넘어갔다.

 

 

3.1만세의 광경

 

시위대렬에는 고종의 장례식을 구경하려고 각지에서 모여온 농민들까지 참가하여 시위군중은 수십만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시위를 탄압하기 위하여 서울 룡산에 주둔한 일본침략군 20사단과 라남19사단무력까지 동원하여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면서 시위군중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3.1인민봉기를 탄압하는 일제

 

그러나 시위자들은 앞대렬이 쓰러지면 그 뒤대렬이, 뒤대렬이 쓰러지면 그 다음대렬이 앞장서나가면서 전진하였다.

이처럼 우리 인민이 반일항쟁에 떨쳐나섰을 때 숭미사대주의에 물젖은 부르죠아민족주의상층인물들은 어리석게도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렬강들에게 기대를 걸고 조선독립에 대한 원조를 구걸하였다.

또한 그들은 인민들에게 무저항주의를 설교하다가 투쟁이 대중적인 폭동으로 넘어가자 일제에게 투항하고말았다.

그러나 인민대중은 반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 3.1인민봉기의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에로의 확대

 

 

3.1인민봉기의 불길은 평양, 서울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도 세차게 타올랐다.

인민봉기는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전국각지에 퍼져갔다.

강동에서는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조직지도하신 조선국민회와 《학교계》,《비석계》,《향토계》에서 활동하던 200여명의 성원들이 앞장에 서서 반일봉기를 일으켰다.

경기도 수원군 송산면에서는 700여명의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 일제경찰관주재소를 들이친 다음 수원방면에서 달려드는 일제군대, 경찰들과 맞서 용감히 싸웠다.

평안북도 정주에서는 봉기군중과 일제침략자들사이에 치렬한 싸움이 벌어져 일제의 총탄에 맞아 500여명이 죽거나 부상당하였으나 인민들은 굴하지 않고 싸웠다.

안악, 평원, 안성, 천안, 진주, 전주 등 다른 지방의 인민들도 총칼로 시위군중을 탄압하는 일제의 만행에 굴하지 않고 피를 흘리면서 영웅적으로 싸웠다.

서울의 나어린 한 녀학생은 기발을 들었던 오른팔을 놈들의 칼에 잘리우자 왼손에 기발을 바꿔쥐였고 왼팔마저 떨어져 더는 움직일수 없는 순간까지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조선독립 만세!》를 불러 일제군경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폭동군중은 도처에서 도끼, 낫, 몽둥이를 들고 헌병, 경찰기관들과 군청, 면사무소, 우편국과 같은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들이치고 일제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들을 처단하였다.

3월 중순에 이르러 인민봉기는 전국 13개 도를 모두 휩쓸었고 중국 동북지방과 상해, 연해주와 하와이 등 해외의 조선동포들에게까지 번져가 전인민적인 항쟁으로 확대되였다.

당시 민족적량심을 가진 조선사람들은 누구나 다 직업과 신앙에 관계없이 남녀로소 모두가 이 봉기에 참가하였다.

△ 3.1인민봉기의 실패와 교훈, 그 력사적의의

- 조선인민의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에 겁을 먹은 일제는 이 투쟁을 탄압하기 위하여 미쳐날뛰였다.

일제는 조선에 와있던 헌병, 경찰, 군대를 몽땅 내몰고도 모자라 일본에서까지 수많은 군대와 경찰을 끌어들여 각곳에 주둔시키고 인민봉기를 탄압하는데 내몰았다.

일제는 이르는곳마다에서 거리와 마을을 불사르고 적수공권의 시위군중에게 사격을 하여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

 

 

일제야수들은 애국자들을 불태워죽이거나 산채로 파묻어죽였으며 형틀에 매달고 팔다리에 못을 박아죽이거나 작두로 목을 잘라죽이는 등 천추에 용서못할 죄행을 저질렀다.

4월 중순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 달려든 일제야수들은 사람들을 교회당에 강제로 모이게 한 다음 사격하여 학살하였으며 그것으로도 성차지 않아 교회당과 그 주변의 살림집들을 불태워버리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침략자들의 야수적학살만행에 의하여 수많은 애국자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삼천리금수강산은 그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여졌다.

일제는 이르는곳마다에서 조선인민을 대중적으로 학살하는 한편 수많은 애국자들과 인민들을 마구 잡아가두었다.

그리하여 반일인민봉기 전기간에 일제의 총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의 수는 10여만명에 이르렀다.

우리 인민이 나라의 독립과 자주권을 위하여 일제를 반대하여 피어린 투쟁을 벌리고있을 때 조선인민의 피맺힌 원쑤 미제는 일제를 적극 비호해주면서 우리 인민의 독립운동을 악랄하게 반대하여나섰다.

미제는 3.1인민봉기가 일어나자 그것이 《부질없는 짓》이라고 우리 인민을 모독하면서 일제에게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할것을 로골적으로 사촉하였다.

미제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하여 온 나라 방방곡곡에서 세차게 타오르던 반일항쟁의 불길은 봄이 가고 여름이 되면서부터 점차 수그러들게 되였다.

3.1인민봉기는 그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기는 하였으나 결국 목적을 이룩하지 못한채 실패하고말았다.

- 3.1인민봉기의 실패는 조선의 혁명가들과 인민들에게 심각한 교훈을 주었다.

첫째로, 탁월한 수령의 령도, 혁명적당의 지도가 없이는 그 어떤 혁명운동이든지 승리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둘째로,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이 더는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수 없으며 부르죠아민족주의가 민족해방운동의 사상적기치로 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셋째로, 민족적독립과 사회적진보를 위한 혁명운동의 승리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사대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주체적인 혁명력량을 튼튼히 마련해야 한다는것이였다.

넷째로, 무장한 원쑤들과는 조직적인 무장투쟁으로 맞서야 한다는것이였다.

- 3.1인민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운동에서 커다란 력사적의의를 가지였다.

첫째로, 이 투쟁을 통하여 슬기롭고 용감한 조선인민의 열렬한 애국정신과 혁명적투지를 시위하였다는데 있다.

둘째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우리 인민의 민족적각성을 크게 높여주었다는데 있다.

셋째로, 식민지예속국가인민들의 민족해방운동발전에 적지 않은 고무적영향을 주었다는데 있다.

이처럼 우리 인민은 일제의 포악한 《무단통치》하에서도 3.1인민봉기를 통하여 일제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고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려는 민족의 굳센 의지를 시위하였다.

 

복습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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