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반일의병투쟁의 시작과 재발, 전국적규모에로의 확대발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난날 일제를 반대하여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운동 같은것도 많았습니다.》

갑오농민전쟁후 조선인민의 반침략반봉건투쟁은 여러가지 형태로 진행되였다. 이 시기 우리 인민의 반침략반봉건투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것은 반일의병투쟁이였다.

 

 

반일구국의 기치를 든 의병들

 

반일의병투쟁은 반침략적구호를 전면에 제기하였고 이전 시기의 농민무장대투쟁에 비하여 보다 조직화된 비교적 큰 규모의 투쟁이였다.

△ 반일의병투쟁의 시작

 ㅡ 농민무장대의 활동이 반일의병투쟁에로 발전하게 되자 이에 고무를 받은 애국적인 봉건유생들도 의병대를 뭇고 반일투쟁에 떨쳐나섰다.

 

 

반일의병투쟁 지역도

 

◦ 1895년 유생 김원교는 평안도 상원에서 의병대오를 뭇고 반일의병투쟁을 벌렸다.

상원에서 조직된 의병대는 상원고을을 습격하여 친일주구들을 처단하였으며 그 길로 황해도지역으로 이동하여 장수산을 거점으로 하고 투쟁을 계속하였다.

의병대는 9월 24일에 격문을 발표하여 나라를 구원하기 위한 싸움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그후 의병대는 맹렬한 활동을 벌려 일제침략자들과 사대매국적인 친일주구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 1895년 11월에 대표적인 위정척사론자의 한사람이였던 류린석이 충청도 제천에서 의병대오를 조직하여 반일투쟁에 나섰다.

류린석은 1896년 2월에 《8도의 여러 고을 인민들에게 호소한다》라는 격문을 발표하여 전국인민들이 투쟁에 일떠설것을 호소하였다.

류린석의 애국적호소에 호응하여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충청도지방에서 리강년 등이 의병대를 무었고 전라도 장성에서 기우만이 의병대를 무었으며 강원도 강릉, 춘천, 홍천지방을 비롯하여 전국각지에서 의병대가 무어져 투쟁이 활발히 벌어졌다.

ㅡ 의병투쟁이 확대되자 일제침략자들은 청일전쟁에 동원시켰던 침략군까지 우리 나라에 끌어들이려고 하는 한편 조선주둔군병력을 늘이기 위하여 갖은 책동을 다하였다.

1896년 2월에 강원도 춘천지방과 경기지방에서 활동하던 반일의병대들은 애국적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적들의 《토벌》책동을 분쇄하였을뿐아니라 서울을 사면으로 포위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리하여 일제침략자들과 친일주구들은 심대한 타격을 받고 공포에 떨었다.

반일의병투쟁은 날을 따라 더욱 치렬해지고 전투규모가 커졌으며 의병대들사이의 호상련계와 지원이 강화되였다.

◦ 이 시기 가장 치렬한 전투의 하나는 충주성전투였다.

충청도지방의 의병장 류린석은 의병대를 지휘하여 일제침략군 《수비대》가 둥지를 틀고있는 당시 충청도의 행정중심지인 충주성을 포위공격하여 적들을 모조리 소탕한후 충주성을 장악하였다.

충주성을 빼앗긴 일제침략자들은 여러차례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의병들에게 호된 타격을 받고 도망쳤다.

의병대의 완강한 투쟁에 의하여 계속 타격을 받은 적들은 3월 중순에 대병력을 동원하여 충주성에 대한 총 공격을 감행하엿다. 의병대는 련일 계속되는 우세한 적들과의 싸움에서 용감히 싸웠다. 적의 포화에 성문이 깨여지고 성벽이 무너지자 충주성을 더는 지탱할수 없게 된 의병대는 적들에게 계속 타격을 주면서 철수하였다.

근 한달동안이나 계속된 충주성전투는 일제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겼으며 침략자들과 끝까지 싸우려는 우리 인민의 투쟁기세를 훌륭히 보여주었다.

◦  이 시기 각지 의병들은 서로 련계와 지원을 강화하면서 일제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3월 초에 남한산성에 의거하고있던 양근, 광주의병대들은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성원밑에 일제침략군과 치렬한 전투를 벌려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많은 전투기술기재를 로획하였다.

공격을 좌절당한 적들은 산성을 포위하였다.

남한산성에서 의병대들이 포위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지원하기 위하여 3월 8일에 안성의병들이 달려왔고 15일에는 춘천의병들도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남한산성의 의병대들은 3월 18일까지 다른 의병대들과 서로 련계를 가지면서 적들과의 대규모적이고 치렬한 격전을 벌려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갑오농민전쟁후 시작된 반일의병투쟁은 1896년 4월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 앙양되였다.

그러나 4월 이후 각지에서 활동하던 반일의병대들은 점차 해산되기 시작하였으며 여름과 가을에 걸쳐 전반적으로 해산됨으로써 반일의병투쟁은 중단되고 말았다.

ㅡ 반일의병투쟁 초시기 의병투쟁이 계속되지 못하고 중단된것은 의병장으로 나섰던 봉건유생들의 계급적제한성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여있었다.

봉건유생들의 계급적제한성은 애국적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의병투쟁의 성과여부가 봉건통치층의 행동여하에 달려있다고 인정한데 있으며 《충군존왕》사상으로부터 출발하여 국왕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데 있다.

이러한 제한성으로 하여 반일의병투쟁은 중단되고말았다.

그러나 초기 반일의병투쟁은 조선침략에 혈안이 되여 날뛰던 일제침략자들과 그와 결탁한 친일주구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일제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우리 인민의 애국적인 투쟁기세를 시위하였다. 또한 초기 반일의병투쟁은 이후시기 각지에서 벌어진 농민무장대의 투쟁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민들의 애국적투쟁에 고무적영향을 주었다.  

△ 반일의병투쟁의 재발

1896년 가을부터 일시 중단되였던 반일의병투쟁은 1904년 초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이해 2월 로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수많은 침략군대를 끌어들이고 그에 의거하여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침략책동을 더욱 강화하였기때문이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적인민들은 민족의 자주권과 독립을 지키기 위하여 도처에서 의병대를 뭇고 원쑤들을 족치였다.

ㅡ 1904년 7월 말 서울교외의 조선군인들이 일제에게 총부리를 돌리고 의병대를 무은데 이어 서울, 려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반일의병대들이 조직되여 활동하였다.

이에 고무를 받은 봉건유생출신의 의병장들이 격문을 돌리며 의병대의 조직을 호소하였다.

1904년 9월 강원도 홍천지방의병대 의병장은 격문을 발표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모두다 투쟁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이 격문은 피끓는 청년들과 애국적인민들을 반일의병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데서 고무적역할을 하였다.

평안도지방에서는 1904년 12월 류린석의 지휘밑에 의병대들이 조직되였다.

류린석은 1896년에 중국료동지방으로 갔다가 1900년에 다시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였는데 로일전쟁이 일어나자 평안남북도의 30여개군에 유교단체로 위장된 《종유계》를 뭇고 의병투쟁을 준비하였다.

류린석이 의병투쟁을 벌릴것을 호소하자 여기에는 농민들뿐아니라 진위대군인들과 지방관리들까지 호응해나섰다.

그리하여 개천을 중심으로 하여 평양, 중화, 룡강, 순천, 강동, 태천, 박천, 룡천, 철산, 곽산, 구성, 삭주 등 여러 지역에서 의병투쟁이 벌어지게 되였다.

전라남도에서는 1904년 12월 애국적유생 기우만의 지휘밑에 장성일대에서 의병대가 조직되였다.

이밖에도 1905년 초 충청남도 서산, 해미, 홍주(홍성), 청양, 충청북도 보은 등에서 반일의병대가 조직되였고 5월에는 원용팔이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대를 무었으며 7월에는 함경북도 부령지방포수들이 중심이 되여 노랑포수의병대가 무어졌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군이 제일먼저 침입한 경기도에서 반일의병대가 조직된데 이어 강원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충청남북도 등지에서 반일의병대들이 무어졌다.

ㅡ 의병대들은 독립적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몇개의 의병대들이 련합하여 보다 큰 세력을 이루고 투쟁을 벌렸다.

의병대들은 무엇보다도 일제침략군과 그들의 초소, 우편통신망을 습격파괴하는 등 맹렬한 활동을 벌렸다.

경기도 려주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대는 1904년 4월 말~5월 초에 4차에 걸쳐 일제침략군의 초소를 습격소탕하였다.

또한 1905년 10월 중순 충청북도 단양지방의 의병 200여명은 순흥읍을, 의병 300여명은 경상북도 영천읍을 각각 습격하여 우편설비들을 파괴하고 일제침략자들을 소탕하였다.

의병대들은 또한 일제의 주구단체인 《일진회》를 반대하는 투쟁도 적극 벌렸다.

8월 일본에서 10여년동안 길들여진 친일주구 송병준은 조선에 기여들어 일제의 사촉밑에 《유신회》를 조작하였다. 그후 《유신회》의 이름을 《일진회》로 고쳤다.

이 시기 동학상층의 변절자인 친일주구 리용구에 의하여 조작된 매국단체 《진보회》가 1905년 1월에 《일진회》에 통합되였다.

《일진회》는 《황실의 존중과 국가기초의 공고화》, 《국민의 생명재산보호》, 《정치의 개선》, 《군정과 재정의 정리》 등 기만적인 《4개조강령》이라는것을 들고나와 나라를 일제에게 팔아넘기려고 책동하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일진회》의 우두머리 송병준, 리용구 등 매국노들에게 《일진회》결성자금으로 5만원을 주었으며 그후에도 막대한 《정치자금》을 계속 대주었다.

이 대가로 《일진회》의 역적들은 상전의 요구에 따라 온갖 매국배족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이자들은 일제가 도발한 침략적인 로일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확고히 보장》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떠벌이면서 인민들에게 일제침략군의 군사행동을 《협조》할것을 설교하였을뿐아니라 《북진대》라는것을 만들어 수만명의 인민들을 일제의 군용철도부설공사와 군수물자운반에 강제동원시켰다.

《일진회》는 1905년 11월 조선의 외교권을 일제에게 넘겨주며 일제의 《보호》를 받자는 《선언서》를 발표하였고 1909년 12월에는 일제의 조선강점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목적밑에 《일진회》의 《한일합방성명》까지 발표하면서 극악한 매국배족행위를 감행하였다.

일제는 《일진회》가 주구단체로서 더는 쓸모없게 되자 1910년 9월에 해산시키였다.

《일진회》의 친일매국책동은 당시 우리 인민들의 한결같은 배격과 규탄을 받았다.

1904년 2월 평안도의 의병장 서상무는 충주에 가서 400~500명의 의병들을 모집하고 서울에 진입하여 《일진회》원들, 일제헌병들과의 대담한 육박전을 벌려 원쑤들을 호되게 징벌하였다.

반일의병투쟁은 일제가 로일전쟁에 들이밀었던 침략무력을 우리 나라에 끌어들이자 더욱 치렬하게 벌어졌으며 간고성을 띠게 되였다.

△ 반일의병투쟁의 전국적범위에로의 확대발전

일제에 의하여 《을사5조약》이 조작되자 이를 반대하는 투쟁이 더욱 세차게 벌어지는 가운데 반일의병투쟁이 새로운 앙양을 보이였다.

일제는 《을사5조약》을 체결하는 방법으로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지배권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로일전쟁에 투입하였던 기본병력을 서울에 끌어들여 왕궁을 2중3중으로 포위하는 한편 도처에 군대를 풀어 조선인민의 반일기세를 억눌렀다.

방대한 침략무력을 끌어들여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한후 일본《천황》의 《특사》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는 《조약》안을 가지고 서울에 나타나 황제 고종과 정부대신들에게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다.

11월 17일 이등박문의 위협과 공갈, 회유에도 불구하고 고종과 많은 관리들이 《조약》을 반대하자 일제는 강압과 협잡의 방법으로 《한일협상조약》을 날조하였다.

침략적이며 기만적인 《을사5조약》은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도록 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나라의 모든 실권을 강탈당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굴러떨어지게 되였다.

《을사5조약》이 일방적으로 공포되였으나 그것은 나라의 최고주권자(황제 고종)의 승인, 수표, 국새날인을 받지 못한 비법무효한 협잡문서였다.

고종은 이 《조약》의 무효를 세계면전에 선포하였고 반일의병운동을 벌릴데 대한 비밀지령까지 내리였다.
우리 인민들은 이 《조약》을 반대하여 힘찬 투쟁을 벌리였다.

《을사5조약》의 조작에 대한 소식이 퍼지자 인민들은 일제히 이를 규탄하며 투쟁에 일떠섰다.

서울시민들은 거리에 떨쳐나와 시위를 벌렸으며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하고 상인들은 일제히 상점문을 닫아매였다. 량심적인 관리, 선비들도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일제가 날조한 《조약》을 무효로 선포할것을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벌리거나 자결로써 항거해나섰다.

이렇듯 반일투쟁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는 가운데 반일의병투쟁도 보다 넓은 지역에서 더욱 세차게 벌어지게 되였다.

ㅡ 이 시기 반일의병투쟁은 앞선 시기의 투쟁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특징을 가지고 벌어졌다.

반일의병대는 각지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소규모의 의병들이 점차 통합되여 큰 대오로 활동하였고 농민들과 봉건유생들만이 아니라 로동자, 청년학생, 지식인 등 광범한 계층이 참가하였다.

반일의병투쟁은 또한 망국적인 《을사5조약》을 페기할것, 일제침략자들을 구축할것 등 나라의 독립과 자주권을 지키려는 보다 뚜렷한 투쟁목표를 내걸고 벌어졌다.

ㅡ 이 시기 반일의병투쟁은 전 시기에 비할바없이 치렬성을 띠고 전개되였다.

1906년 3월 상순 이전 참판이였던 민종식은 충청남도 정산군 천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5월 중순에는 람포군과 보령일대에서 수많은 적을 습격처단하였으며 홍주성을 들이쳐 성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전라도지방에서는 1906년 6월 위정척사론자인 최익현의 지휘밑에 반일의병투쟁이 벌어졌다.

70살이 넘은 최익현의 지휘밑에 의병대는 전라북도 순창의 적통치기관을 들부신데 이어 담양, 태인, 정읍, 곡성 등지에서 맹렬한 활동을 벌리였다.

그후 일제에게 체포된 최익현은 쯔시마에 끌려가서 회유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단식으로 순국함으로써 반일의지를 고수하였다.

순창전투후 전라남도에서는 기우만, 백락구, 고광순 등이 의병을 일으켜 1906년 11월~12월사이에 구례, 광양, 장성, 남원 등 여러 군들을 습격하여 일제침략기관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이 시기 경상도, 강원도접경지대에서는 여러 의병대들이 태백산줄기를 타고 맹렬한 투쟁을 벌렸는데 1906년 경상북도 영양에서 봉기한 김순현, 4월 하순 녕해에서 봉기한 신돌석, 영덕에서 봉기한 정용기 등은 농민출신의 지휘자들이였다.

특히 신돌석이 지휘한 의병대는 일제헌병대와 대구 및 원주진위대의 발악적인 《토벌》책동을 짓부시면서 맹렬한 활동을 벌림으로써 경상도일대에서 명성을 떨치였다.

이에 당황한 적들은 《신돌석이 정의를 빙자하여 무리를 짓고 무기를 사용하면서 …민심을 선동하니 만일 이를 잡지 못하면 그 해를 반드시 널리 입을것》이라고 아우성을 쳤다.

반일의병대들의 맹렬한 활동에 의하여 여러 지방들에서 일제침략자들은 《치안》을 유지할수 없게 되였고 그들의 억압과 략탈정책은 된타격을 받게 되였다.

《을사5조약》날조를 계기로 반일의병투쟁이 새로운 앙양기에 들어서자 이에 고무를 받은 각지 인민들은 앞을 다투어 의병투쟁에 합류하였으며 마침내 전국적규모에서 격렬한 반일의병운동이 전개되게 되였다.

△ 반일의병운동의 전국적규모에로의 확대

반일의병운동이 전국적규모에로 확대발전된것은 일제침략자들이 《헤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황제자리에서 내쫓고 조선에 대한 식민지적예속을 더욱 강화하는것을 규정한 《정미7조약》을 강압날조한데 이어 조선군대를 강제해산시킨데 있었다.

ㅡ 1907년 서울에서는 고종의 강제퇴위사건과 《정미7조약》의 조작을 계기로 강력한 반일봉기가 일어났다.

1907년 7월 19일 수만명의 서울시민들은 종로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일제의 침략책동을 폭로규탄하였으며 애국적군인들과 합류한 시민들은 일제무장경찰대와 매국역적들을 처단하는 과감한 투쟁을 벌렸다.

1907년 8월 1일 일제침략자들에 의해 조선군대가 강제해산되자 군인들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을 도화선으로 하여 전반적폭동에로 넘어갔다.

 

 

자결한 박승환

 

성문밖으로 진출한 폭동군인들은 반일의병대를 뭇고 투쟁을 계속하였다.

ㅡ 1907년 8월 이후 폭동군인들이 의병대로 전환된후 반일의병투쟁은 전국적범위에로 확대되였다.

당시 의병들의 활동범위는 1907년 말 현재 몇개군을 제외한 전국적판도에서 벌어졌다.

반일의병투쟁의 확대는 의병대계급구성의 변화를 동반하였다.

의병장들과 의병대원들은 종전의 유생들이나 농민들만이 아니라 군인, 청년학생, 로동자, 포수 등 각계각층으로 이루어졌다.

1907년 8~10월 기간에 서울교외에서 군인출신의 지영기의병대가, 개성과 장단지방에서 농민출신의 김수민의병대가 맹렬히 활동하였으며 양주와 파주부근에서는 조인환이 지휘하는 의병대가 적극적인 투쟁을 벌렸다.

1907년 12월 말 경기도 양주에는 서울에 쳐들어갈데 대한 리린영의 호소에 따라 1만여명의 의병들이 집결되였다.

여기서 리린영을 13도의병총대장으로, 허위를 군사장으로 정하고 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들의 서울진공작전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일제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ㅡ 의병투쟁은 1908년에 더욱 고조되였다.

1908년 이후 반일의병투쟁은 북부산악지대와 동부에서 태백산줄기의 중요한 산지들을 거점으로 하여 활발히 벌어졌다.

1908년 이후 신돌석의병대가 일월산으로 활동거점을 옮기고 투쟁하였고 강원도의 의성, 포항 등지에서 리강년의병대가, 지리산을 거점으로 김광순의병대가, 팔공산을 거점으로 리학사의병대가 맹렬히 활동하였다.

특히 홍범도의병대는 1908년 초에 갑산읍에 쳐들어가 일제침략군과 그 주구들을 처단하였다.

 

 

홍범도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홍범도 의병부대

 

그리고 1909년 4월 후창읍(김형직군)을 공격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반일의병투쟁은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점차 약화되여갔다.

ㅡ 반일의병투쟁은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실패원인; 이 투쟁이 탁월한 지도자의 령도를 받지 못한데 있었고 통일적군사지휘체계가 없이 의병투쟁실정에 맞는 군사전법에 의거하여 싸우지 못한데 있었다.

반일의병투쟁은 비록 일제의 조선강점을 막아내지 못하였으나 근대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 의의는 우리 나라에서 부르죠아민족운동을 전민족적규모의 반침략반봉건투쟁으로 벌어지게 하였고 조선인민의 애국주의정신을 힘있게 보여준데 있다.

또한 일제의 조선강점정책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일제의 야수적본성과 죄상을 전세계에 폭로하였으며 당시의 각이한 민족운동조류들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데 있다.

이처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줄기차게 벌어진 반일의병투쟁은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우리 인민의 큰 규모의 반침략투쟁으로서 당시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주되는 흐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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