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르죠아《민권》운동

 

△ 《민권》운동의 시작

갑오농민전쟁과 초기 반일의병투쟁의 고무적영향밑에 19세기 말 반침략반봉건투쟁의 새로운 형태로서 부르죠아《민권》운동이 새롭게 큰 규모로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민권》운동은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제도가 발생하는 시기에 봉건전제정치를 반대하고 부르죠아지의 정치적권리를 넓혀나갈 목적으로 벌어지는 운동이다.

《민권》운동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전제정치를 반대하고 부르죠아민주주의적권리의 확장을 위한 대중정치투쟁형태로 벌어진다.

19세기 말 우리 나라 봉건제도하에서의 《민권》운동은 반제반봉건투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 근대적인 정치단체의 결성과 출판, 교육, 문화활동 등 여러가지 형태로 벌어졌다.

우리 나라에서 《민권》운동은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고 민족적독립을 고수하며 사회적진보를 이룩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중소부르죠아지의 리익의 대변자들인 리상재, 남궁억, 정교 등 애국적지식인들에 의하여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1894년 부르죠아개혁운동이 실패한 후 외래제국주의의 침략과 간섭이 더욱더 로골화되고 봉건정부가 심히 몰락되여가고있는 조건에서 종전처럼 몇몇 혁신관료들의 상층개혁운동으로써는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부르죠아적《민권》의 구호밑에 인민대중의 투쟁에 편승하여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ㅡ 부르죠아《민권》운동에서 중요한것은 정치단체들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이 활발히 벌어진것이다. 

애국적지식인들은 1896년 2월 사교구락부의 형식으로 《건양협회》를 조직하였다가 그것을 그해 7월에 정치단체의 성격을 띤 《독립협회》로 개편하였다.

《독립협회》는 창설초기부터 회장, 위원장, 위원 등 정연한 기구성원을 두고 회원수는 제한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발표하였다.

《독립협회》는 인민들속에 독립애국정신을 심어주기 위한 계몽사업을 목적으로 활동을 벌리였다.

《독립협회》는 봉건사대외교의 유물인 영은문을 헐어치우고 그 자리에 광범한 군중의 적극적인 참가밑에 1897년 11월에 독립문을 건설하였다.

또한 1897년 5월 모화관을 독립회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곳을 본거지로 삼았다.

《독립협회》의 이러한 활동은 인민들을 민족적으로 각성시키고 결사의 자유에 관한 《민권》사상으로 무장시키는데서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

《독립협회》는 창설초기에 수십명의 회원을 망라하고있었으나 1898년에는 각계각층의 인민들 4 000여명을 망라하고 그 조직도 인천, 황주, 의주, 선천, 강계, 북청, 목포 등 각 지방에까지 확대되였다.

《독립협회》의 창설과 그의 활동은 다른 정치단체들의 창설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1898년을 전후하여 학생들의 조직인 《협성회》, 《광무협회》, 상인들의 조직인 《총상회》, 중인출신들의 조직인 《친목회》, 녀성들의 조직인 《순성회》 등 정치단체들이 련이어 조직되였다.

이러한 정치단체들은 근대적《민권》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을 벌리였다.

ㅡ《민권》운동에서 중요한것은 출판보도활동이 활발히 벌어진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사회혁명과 건설에서 선진사상의 옹호자이며 전파자이며 사회여론의 대변자이며 조직자인 진보적기자들과 선진적출판물들의 고무적역할은 자못 큽니다.》  

《민권》운동자들은 외래제국주의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고 나라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당시의 사회여론을 대변한 근대적출판물들을 발간하였다.

애국적지식인들은 1896년 4월 7일 우리 나라의 첫 국문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기관지로 삼았고 1896년 12월부터 《독립협회회보》를 발간하였으며 1898년 8월 8일 《제국신문》을, 같은해 9월 5일에는 《황성신문》을 발간하였다.

 

 

 

《황성신문》

 

그들은 출판보도물을 통하여 나라의 독립을 고수하고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계몽활동을 벌리였다.

ㅡ 《민권》운동에서 중요한것은 교육활동이 활발히 벌어진것이다.

애국적지식인들은 봉건적인 낡은 교육기관대신에 서울과 지방들에 소학교, 사범학교, 상공학교, 의학학교, 외국어학교 등 근대적인 교육기관들을 세우는데 적극 참가하였다.

학교들에서는 봉건적인 교육내용을 반대하고 독립과 《민권》사상을 길러주기 위한 새로운 근대적지식을 가르쳤다.

 

 

애국적지식인들의 교육활동

 

《민권》운동자들이 벌린 교육활동은 제국주의침략자들의 사상문화적침투와 봉건세력의 압력에 의하여 널리 확대되지 못하였으나 청소년학생들에게 나라의 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한 《민권》사상을 계발시키는데서 커다란 역할을 놀았을뿐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인 교육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ㅡ 애국적지식인들은 《민권》운동의 한 고리로서 일련의 문화활동을 적극 벌리였다.

그들은 민족어를 연구보급하여 유구한 민족사를 새롭게 체계화하는 사업과 함께 나라의 독립과 문명개화를 지향한 새로운 시와 노래들을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한자와 한문을 숭상하던 사대주의적관점을 타파하고 우리 말과 글을 일치시키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그리하여 1897년에 리봉운의 《국문정리》와 같은 우리 나라에서의 첫 근대적인 문법책이 나왔고 이보다 앞서 1896년부터 주시경은 《독립신문》의 총무를 맡고 순 국문으로 된 이 신문의 편집을 주관하면서 우리 글을 보급하였다. 

 

 

이 시기 조선력사를 정리체계화하는 사업도 진행되였다.

1897년 정교는 종래에 봉건사가들이 써오던 력사서술방법과는 달리 새로 민족사를 체계화한 《대동력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또한 애국적지식인들은 한시나 시조대신에 나라의 독립을 지키며 문명개화를 지향한 새로운 노래와 시들을 지어 보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9세기 말 우리 나라에서의 부르죠아《민권》운동은 자기 활동분야를 통하여 지금까지 정치밖에서 정치의 대상으로만 되여온 평범한 군중을 각성시켰으며 그들을 사회정치생활에 끌어들이는데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민권》운동자들의 초기활동은 아직 사상문화생활의 일정한 분야에 국한되였으며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등 제한성을 가지고있었다.

△ 만민공동회투쟁과 그 의의

19세기 말 《민권》운동은 대중적집회투쟁인 만민공동회투쟁으로 발전하였다.

1898년 3월부터 그해 말까지 서울에서는 여러번에 걸쳐 만민공동회라는 이름밑에 외래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고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군중집회투쟁이 벌어졌다.

만민공동회투쟁에는 지식인, 청년학생, 상인, 로동자, 애국적종교인, 도시빈민 등 광범한 계층이 참가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정치단체성원들도 많이 들어있었다.

그리하여 만민공동회는 《민권》운동을 벌려나가는데서 가장 힘있는 운동형태로 되였다.

ㅡ 만민공동회투쟁은 1898년 3월 제국주의의 침략과 간섭을 반대하는 군중적인 항의성토투쟁으로부터 시작되였다.

3월 9일과 10일 서울시민들은 종로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일제가 부산 절영도에 설치한 석탄저장고를 당장 철수시킬것, 짜리로씨야의 절영도 《조차권》과 탁지부《고문》초빙문제, 한로은행설치권의 요구를 거부할것 등 요구조건을 내걸고 준렬히 성토한 다음 대표들이 봉건정부에 가서 항의문을 들이댔다.

이해 9월 애국적인민들은 미제침략자들에 의하여 조작된 《궁정수비대》라는 침략무리들을 쫓아내고야 말았다.

끊임없이 벌어진 만민공동회투쟁과정에 반동적이고 불견실한 세력들은 떨어져나가고 민족적립장이 확고한 애국적력량으로 대중적조직들이 확대되여갔다.

- 만민공동회투쟁은 또한 《고종독살미수사건》을 계기로 더욱 완강히 벌어졌다.

 

 

고    종

 

당시 친일파, 친미파, 친로파, 친청파 등 여러 파로 분렬되여있던 사대매국적봉건통치배들은 자기파의 세력확장을 위해서라면 《신성불가침》의 절대적존재로 되여있던 국왕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1896년 아관파천때 로씨야어통역관으로 국왕의 신임을 얻어 학부협판까지 한 김홍륙은 파벌싸움에서 밀리여 1898년 7월 전라남도에서 류배살이를 하게 되였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는 국왕 고종을 죽이고 자기파 세력확장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측근자인 전선사의 주사 공홍식을 시켜 고종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공홍식은 7월 26일 보현당의 창고지기 김종화에게 돈 1 000원을 주기로 하고 왕이 마시는 차에 아편을 넣도록 약속하였다.

9월 11일 김종화는 차에 아편을 넣어 왕과 태자에게 주었다. 차그릇을 받아 쥔 왕은 냄새가 이상하다고 하여 마시지 않았으나 태자는 마시다가 토하며 쓰러졌다. 이 사건으로 김홍륙, 공홍식, 김종화는 사형당하였다.

이것이 바로 《고종독살미수사건》이였다. 고종독살미수사건은 외래침략세력에 붙어서 파쟁을 벌리던 봉건통치층안에서 빚어진 음모사건이였다.

10월 7일 각계각층의 서울시민 1만여명은 왕궁앞에 모여 부패무능한 봉건관리들을 당장 내쫓을것을 요구하는 만민공동회를 벌리였다.

만민공동회는 한편 갑오개혁에서 제기되였던 근대적법령들을 정부가 제정하고 그것을 엄격히 집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민회(정치단체)의 정치참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벌려나갔다.

10월 15일 남궁억 등 만민공동회대표들은 봉건정부의 대신들을 만나 요구조건들을 내놓았다.

그것은 법률에서 정한 이외에 함부로 더해진 온갖 잡세는 모두 페지할데 대한 문제, 중추원을 개편하여 그 관제를 정부관리와 독립협회 회원들가운데서 공평정직한 사람들을 선정하여 함께 정치를 협의하도록 할데 대한 문제 등이였다.

10월 20일 봉건정부가 군중집회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애국적지식인들은 만민공동회는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을것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이니만큼 여기에는 민간인들뿐아니라 정부관리도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만민공동회를 《관민공동회》로 이름을 바꾸기로 하였다.

10월 29일 서울 종로에서 《관민공동회》라는 이름밑에 대중적인 군중집회가 열리였다.

여기에는 10여개의 정치단체성원들과 각계각층군중들이 참가하였고 그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하여 10여명의 정부대신들도 참가하였다.

군중집회에서는 봉건정부의 사대매국배족정책을 폭로규탄하는 연설들에 이어 다음과 같은 6개조항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1. 외국인에게 의존하지 말고 관민이 동심합력하여 국가주권을 공고히 할것.

2. 광산, 철도, 탄광, 산림에 대한 리권매도 및 차관, 차병, 외국과의 조약체결을 신중히 할것, 만약 이런 일을 할 때에는 정부의 각 부 대신들과 중추원 의장이 공동으로 협의를 진행하여 반드시 공동으로 서명하고 도장을 찍을것.

3. 전국의 재정은 물론이고 어떤 세금이든지 탁지부에서 일체 관할하고 다른 관청부서와 개인회사는 간섭하지 못하게 하며 국가예산과 결산을 인민들앞에 공포할것.

4. 지금부터 모든 중대한 죄인은 따로 공판하되 사건을 잘 해명하여 피고자 자신이 인정한후에 재판을 실시할것.

5. 칙임관은 국왕이 정부의 토론에 붙여 그 절반이상의 동의를 얻어서 임명할것.

6. 장정(헌법)을 실행할것.

만민공동회에서 채택된 6개조항의 요구는 외세를 배격하고 봉건정부의 매국적책동을 저지시키며 국가의 재정적기초를 튼튼히 하고 근대적재판법을 실행하며 국왕의 관리임명권을 제한하고 사회정치생활에서 근대적인 법률을 실행하자는것이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일련의 제한성을 가지고있었다.

그것은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반침략적요구를 제기하고있으나 그를 실현할 나라의 무력을 강화할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있는것이였다. 또한 결의안에서 반봉건적인 요구를 제기하고있으나 토지문제는 제기하지 못하고있는것 그리고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재정적담보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있는것 등이였다.

이러한 제한성을 가지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만민공동회의 6개조결의안은 외세를 물리치고 《민권》을 옹호하여 근대화를 실현하려는 취지와 그 실현방도를 밝힌것으로 하여 만민공동회투쟁을 더욱 발전시켜나갈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반동적봉건통치배들은 만민공동회투쟁이 고조되는데 당황하여 회유와 기만, 탄압으로 그것을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반동통치배들은 만민공동회를 조금이라도 지지동정하는 대신들을 내쫓고 만민공동회가 《국권탈취》를 기도한다는 내용의 닉명서를 만들어 시안의 각곳에 붙이였으며 11월 4일에는 모든 정치단체들의 해산을 명령하는 동시에 리상재, 남궁억, 정교 등 17명을 체포하였다.

국왕의 배신행위와 봉건정부의 탄압책동에 격분한 군중들은 11월 5일부터 6일동안 철야롱성을 벌려 17명의 《민권》운동자들을 석방시켰다.

음모적방법으로 군중집회를 해산시킬수 없게 되자 봉건통치배들은 12월 22일 만민공동회집회장소와 거리마다에 수많은 군대를 배치하였고 25일에는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킨다는 국왕의 명령발포에 이어 만민공동회참가자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하였다.

만민공동회참가자들에 대한 검거선풍은 다음해 초까지 계속되였고 동시에 각지에 조직되기 시작한 근대적인 정치단체들이 모조리 강제해산되였다.

△ 우리 나라 부르죠아《민권》운동의 실패원인과 그 의의

ㅡ 19세기 말 《민권》운동은 우리 나라 사회발전의 합법칙적요구와 당시 조성된 정세를 반영한 정당한 주장을 제기하고 벌어졌으나 끝내 실패하고말았다.

우리 나라 부르죠아《민권》운동의 실패원인은;

◦ 이 운동이 강력한 지도력량의 통일적인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자연발생적으로 산만하게 벌어진데 있었다.

당시 우리 나라의 로동계급은 발생초기에 있었으며 계급으로도 형성되지 못하였다. 이와 반면에 민족부르죠아지는 외래자본의 압박과 봉건적억압으로 하여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있었으며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미약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민권》운동을 지도한것은 애국적지식인들이였다. 그들은 시대발전의 추세에 민감하게 근대적인 정치단체를 내오고 《민권》사상을 제창하기는 하였으나 조직된 력량으로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지식인들로서는 《민권》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수 없었으며 운동의 자연발생성과 분산성을 면할수 없었다.

◦ 극도로 반동화된 봉건통치배들이 무력으로 이 운동을 탄압하는 조건에서 그에 대응하여 폭력투쟁을 벌리지 못한데 있었다.

우리 나라 민족부르죠아지의 사상을 대변한 지식인들에 의하여 지도된 《민권》운동은 군중적시위를 기본형식으로 하는 항의투쟁에 머물고 봉건정부의 무력적탄압에 대응한 보다 적극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당시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군중들의 투쟁열의가 매우 높았고 농민무장대들도 만민공동회투쟁을 지지하였으며 지어는 탄압에 동원된 일부 경찰과 하층병사들까지도 이 투쟁을 지지해나섰다.

이런 조건에서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군중들과 이 운동을 지지하는 모든 력량을 조직화하면 능히 봉건정부의 무력적탄압에 폭력으로 맞서싸울수 있었다. 그러나 《민권》운동을 지도한 부르죠아지식계층은 계급적나약성으로 하여 운동의 목적을 적극적인 폭력적방법으로가 아니라 시위나 항의와 같은 쉬운 방법으로 이룩해보려고 타산하였던것이다.

◦ 일제와 미제를 비롯한 침략자들이 이 운동을 말살하기 위하여 갖은 방법으로 파괴암해책동을 감행한데 있었다.

미일제국주의자들은 제놈들의 주구들을 리용하여 《민권》운동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기 위한 책동을 벌리는 한편 봉건정부를 무력탄압에로 적극 부추기였다.

《민권》운동은 결국 이러한 원인들로 하여 실패하였다.

ㅡ 19세기 말 《민권》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우리 나라 부르죠아민족운동발전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지였다.

이 운동은 외래침략책동이 강화되고 봉건통치배들의 매국배족행위가 우심해지던 시기에 조선인민이 민족적독립을 고수하고 부르죠아적자유와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투쟁이였다.

◦ 《민권》운동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책동에 미쳐날뛰던 제국주의침략자들과 그에 아부굴종하면서 매국배족행위를 감행하던 봉건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는데 있다.

◦ 《민권》운동은 종전의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과는 달리 광범한 군중의 참가밑에 벌어짐으로써 우리 인민의 민족적자각과 투쟁기세를 높여주고 부르죠아적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사상을 전파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는데 있다.

19세기 말에 벌어진 《민권》운동은 그후 20세기 초에 여러가지 형태로 힘있게 벌어진 애국문화운동의 발생발전을 추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