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894(갑오)년 농민전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1894년에는 전라도농민들이 봉건통치배들의 악정을 반대하여 농민전쟁을 벌렸습니다. 이때에도 농민들을 비롯하여 애국적군인, 선비들은 통치배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을뿐아니라 국내의 혼란된 기회를 리용하여 기여들어온 일본침략군을 맞받아 피어린 투쟁을 벌렸습니다.》

1880년대 말~1890년대 초 각지에서 치렬하게 벌어지던 인민들의 투쟁은 1894년에 이르러 마침내 대규모적인 농민전쟁으로 넘어갔다.

△ 갑오농민전쟁의 시작과 농민군의 전주성점령

ㅡ 1894년 농민전쟁은 전라도 고부농민폭동을 계기로 일어났다.

1892년 고부군수로 내려온 조병갑은 갖은 악랄한 방법을 다하여 인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조병갑은 묵은땅의 개간, 대동미, 제 애비의 비각건립, 각종《죄》명으로 농민들에게서 수많은 돈을 강탈하였다.

특히 고부지방농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킨 가장 직접적인 계기로 된것은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시켜 만석보밑에 필요도 없는 새보를 만들어놓고 농민들에게 비싼 물세를 들씌운것이였다.

고부농민들은 조병갑의 이러한 략탈행위에 더는 참을수 없어 마침내 항의투쟁에 일떠섰다.

1893년 11월과 12월 두차례에 걸쳐 수십명의 농민대표들은 고부관청으로 밀려가서 군수의 비행을 규탄하고 부당한 수탈을 그만둘것을 요구하였는데 악독한 군수는 오히려 농민대표들을 《란민》이라고 쫓아내고 항의투쟁에 앞장섰던 전창혁을 잡아가두고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1894년 1월 10일 새벽 전봉준(1854-1895년)이 지휘하는 1 000여명의 고부농민들은 고부읍으로 쳐들어가 관청을 점령하고 관리들을 잡아가두었다.

 

 

농민폭동군 지휘자 전봉준

 

폭동군중은 노비문서를 불살라버리고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쌀창고를 열어 쌀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비법적인 수세집수의 구실로 되였던 만석보의 새보를 허물어버렸다.

폭동군중은 자기들의 목적이 이루어지자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고부농민폭동은 1월 22일경에 일단 끝났다.

고부농민폭동이 일어나자 이에 놀란 봉건통치배들은 농민들을 회유, 탄압하기 위하여 군수 조병갑을 처벌하고 신임군수로 박원명을, 안핵사로 리용태를 파견하였다.

이자들은 폭동뒤수습을 한다는 구실밑에 죄없는 인민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두고 인민들의 재물을 마구 강탈하였으며 폭동참가자들과 그 처자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의 이러한 만행에 격분한 농민들은 또다시 투쟁에 떨쳐나서게 되였다.

다시금 투쟁에 일떠선 고부와 그 주변인민들은 2월 25일 고부의 무기고를 기습하였고 3월 1일에는 세곡창고를 습격하였다.

이러한 정세밑에서 전봉준은 보다 광범한 농민들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3월 초 이웃 고을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나라를 도우며 백성을 편안케한다는 《보국안민》과 페단이 많은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페정개혁》을 위해서 일떠설것을 호소하는 《창의문》을 발표하였다.

창의문은 광범한 인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어 각지에서 8 000여명의 농민들이 백산에 모여들었다.

3월 21일 전봉준은 농민군지휘부로서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였다.

총대장으로 된 전봉준은 김개남, 손화중을 부대장격의 총관령으로 하는 폭동군지휘부를 꾸리고 자기들의 투쟁목적을 밝힌 격문을 발표하였는데 격문은 각지의 광범한 농민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당시의 격문내용:

《우리가 정의를 위하여 여기에 이른것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않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우에다 두려고 하는것이다. 안으로는 악질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려고 한다. 량반과 부자들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감사)과 고을원의 밑에서 굴욕을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자들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에 일떠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킬수 없을것이다.

호남창의대장소 백산에서》

ㅡ 농민폭동은 대규모적인 농민전쟁으로 발전하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농민군의 투쟁기세에 질겁한 봉건통치배들은 13 000여명의 《토벌군》을 긁어모아 4월 초에 백산을 포위공격하였으나 농민군의 반격에 의해 격퇴되였다.

백산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농민군은 충천한 기세로 4월 7일 고부군 황토현에서 야간기습전을 벌려 근 800명의 감영군을 살상하고 총통 600여정을 로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황토현전투는 방금 편성된 농민군이 감영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 대규모의 전투로서 그것은 농민전쟁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남진을 계속한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군 월평장 황룡촌에서 불의에 달려드는 정부군을 물리치고 기세충천하여 4월 말 총공격을 들이대여 호남지방에서 봉건통치의 아성인 전주성을 단숨에 점령하였다.

전주성을 점령당한 봉건통치배들은 청나라군의 무력간섭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에게 《화의》를 제기하면서 농민군과 정부군이 싸움을 계속하면 청일량국이 무력간섭을 할수 있다고 하면서 회유기만책동을 벌렸다.

농민군이 자기들의 요구조건을 관철하는 조건에서 휴전에 동의하여 5월 8일 농민군과 봉건정부사이에 《전주화의》가 맺어지고 농민전쟁은 일단 종결되였다.

농민군은 자기들의 요구를 담은 27개조의 페정개혁안을 봉건정부측에 접수시켰는데 이 페정개혁안은 그후 《집강소》의 12개조행동강령에 집약되였다.

 

12개조행동강령:

1. 종래 동학도들과 정부사이에 맺혀있던 반감을 씻어버리고 정치를 협력할것.

2. 탐오관리의 죄상을 샅샅이 조사하여 엄중히 처벌할것.

3. 횡포한 부호들을 엄격히 징벌할것.

4. 불량한 유생들과 량반들을 징벌할것.

5. 노비문서를 태워버릴것.

8. 규정외의 여러가지 잡세들을 다 페지할것.

9. 관리의 채용은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본위로 할것.

10.일본인과 내통하는자는 엄중히 처벌할것.

11.국가에 대한 빚이나 개인에 대한 빚이나 이전에 진 빚은 다 무효로 할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부칠것.

 

《전주화의》가 성립된후 농민군은 전라도 각 고을에 나가 12개조의 요구조건을 실현할 목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집강소는 갑오농민전쟁때 농민군이 전라도지방에 설치하였던 자치기관이였다.

1894년 5월 8일 농민군과 봉건정부사이에 전주화의가 성립된후 농민군은 화의에서 합의된 페정개혁안의 실시를 감독하고 통제할 목적밑에 농민자치기관으로서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의 담판을 통하여 그로 하여금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는것을 인정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전라도 53개 고을에 모두 집강소가 설치되였다.

그리고 전주에는 대도소를 두어 각 고을의 집강소들을 지도하도록 하였다.

농민군의 지휘자인 전봉준은 금구, 원평을 중심으로 전라우도의 집강소들을, 김개남(?-1895년)은 남원에 있으면서 전라좌도의 집강소들을 지도하였다.

집강소는 각 고을의 관청청사를 그대로 사무소로 리용하였다.

집강소에는 책임자인 집강과 그를 보좌하는 약간명의 의사원이 있었고 그밑에 성찰, 동몽, 집사, 서기 등을 두었다.

집강은 페정개혁안을 토의결정하고 집강소운영에 대한 책임을 졌다.

성찰은 주로 사회질서유지임무를 맡았고 동몽은 청소년교육교양과 관련한 일을 맡아 하였으며 집사는 재정문제와 관련되는 사업을 담당수행하고 서기는 집강소에서 토의된 문제들을 기록하는 일과 전반적인 내부사업을 맡아 하였다.

집강소는 먼저 지방관청과 민간에 남아있던 무기를 회수하여 농민군의 장비를 강화하고 집강소를 보위할 수성군을 조직하였다.

또한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리고 묵은 채무관계를 무효로 선포하는 등 일련의 진보적인 사업들을 추진시켰다.

그러나 집강소는 봉건제도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고 사회를 근대화하기 위한 정치적요구를 제기하지 못하였으며 봉건제도의 개혁에서 근본문제인 토지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봉건적토지소유관계를 청산하고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할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악질관료들과 지주들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집강소는 자체의 튼튼한 정치경제적지반을 꾸릴수 없었으며 일본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의 탄압이 강화되고 그해 10월에 농민들이 다시 투쟁에 궐기하게 되자 스스로 해산되고 말았다.

집강소는 비록 한개 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또 오래 존재하지도 못하였지만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농민자치기관으로서 당시로서는 큰 의의를 가지였으며 농민들의 반봉건투쟁에 고무적영향을 주었다.

집강소의 설치와 활동은 사회발전의 질곡으로 된 봉건제도를 무너뜨리는 투쟁이 농민대중에 의하여 줄기차게 심화되여나가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 갑오농민전쟁의 재발과 그 력사적의의

ㅡ 1894년 5월의 《전주화의》를 계기로 일시 투쟁을 멈추었던 농민군은 일본침략자들에 의하여 국권이 유린당하고 조선봉건정부의 매국배족행위가 우심해지자 9월 중순에 또다시 투쟁에 떨쳐나섰다.

《전주화의》이후 농민군이 이미 쟁취한 성과를 공고히 하려고 할 때 사대매국적인 봉건통치배들은 농민군진압을 위하여 청나라군을 끌어들였고 침략전쟁의 기회만 엿보고있던 일본침략자들도 일본거류민《보호》라는 구실밑에 5월 말까지 근 1만명의 침략군을 들이밀었다.

6월 21일 새벽 일본침략자들은 1 500명의 침략군을 동원하여 왕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연금하고 대원군의 집정을 세상에 공포하였다.

그리고 1894년 6월 23일 선전포고도 없이 불의에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는 전쟁마당으로 변하고 자주권을 전례없이 유린당하였으며 조선인민은 침략전쟁의 참화를 입게 되였다.

조성된 이러한 엄중한 정세하에서 전봉준은 9월 중순에 전주북쪽 삼례에 투쟁본부를 정하고 농민들에게 반침략투쟁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농민, 량반, 유생, 관군병사를 포괄하는 각계층 군중이 이 투쟁에 떨쳐나섰다.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농민군은 서울진격에 앞서 충청도 농민군과의 련합을 실현하기 위한 교섭을 진행하였다.

《북접》과 《남접》(호서와 호남의 동학조직이라는 뜻)의 교섭은 10월 중순에 이르러서야 충청도 동학상층의 무저항주의를 물리치고 두 세력의 련합이 실현되였으며 10월 20일경에 충청도 론산에 집결하여 서울에로의 진격의 길에 올랐다.

10월 23일 리인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농민군은 10월 25일 공주에 대한 공격전을 벌렸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11월 9일 2차공격에서도 많은 손실을 입고 후퇴하였다.

전봉준은 적들의 발악적인 추격이 계속되는 조건에서 일단 부대를 해산시킨 다음 적은 인원을 거느리고 순창 피로리로 이동하여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다가 12월 2일 변절자의 밀고로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결국 근 1년동안 전국을 진감하며 부패한 봉건통치를 밑뿌리로부터 뒤흔들어놓고 일본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거족적인 갑오농민전쟁은 우리 인민의 근대투쟁력사를 빛나게 장식하고 막을 내리게 되였다.

ㅡ 갑오농민전쟁은 여러가지 요인들로 하여 더 큰 성과를 이룩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 갑오농민전쟁이 실패하게 된 원인은 당시 조선사회발전의 락후성으로 하여 투쟁에서 선진계급의 령도를 받지 못한데 있었다.

농민들이 사회계급적해방을 실현하자면 반드시 선진적인 로동계급의 령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 자본주의발전의 미숙성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은 부르죠아지나 선진적인 로동계급의 령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수 없었다. 농민들은 당시 민족부르죠아세력을 대표하던 혁신세력과도 손잡지 못하였다.

이처럼 농민들은 아무런 정치세력의 지도나 지지를 받지 못하고 혼자서 싸우지 않을수 없었다.

◦ 농민군이 전쟁과정에 발로시킨 전략전술적부족점도 실패의 요인으로 되였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한후 봉건정부와 《화의》를 맺고 전주성을 내줄것이 아니라 그 길로 서울을 들이쳐서 봉건통치배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말았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농민군지도자들의 우유부단성과 행동의 완만성은 농민전쟁을 실패로 돌아가게 한 전략전술상의 실책이였다.

또한 농민군이 《전주화의》를 체결한후 휴전기간을 최대한으로 리용하여 다시 벌어질 투쟁준비를 잘하지 않은것도 잘못이였다.

◦ 일본침략군에 비하여 농민군의 무기와 군세가 약했던 사정과도 관련되였다.

전쟁당시 일본침략군은 대포, 기관총 등 신식무기로 무장하고있었는데 농민군의 무장상태는 락후하였으므로 수천수만의 농민군이 1 000여명의 일본침략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기만 하였다.

◦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무력간섭과 그에 대한 미, 영제국주의침략렬강의 지지에 있었다. 

ㅡ 갑오농민전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중요한 경험과 교훈을 남기였다.

갑오농민전쟁은 인민대중이 오직 계급적원쑤들에 대해 자그마한 환상도 가지지 말고 과학적인 전략전술을 가지고 끝까지 싸울 때만이 투쟁에서 승리할수 있으며 외세의존은 망국의 길이고 견결한 반제투쟁만이 민족적독립과 나라의 자주권을 확고히 보장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ㅡ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우리 나라 근대력사발전에서뿐아니라 세계력사발전에도 커다란 의의를 가지였다.

◦ 반침략반봉건적인 거족적폭력투쟁으로서 일본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조선민족의 열렬한 애국정신과 기개, 민족적단결력과 희생성을 크게 시위한데 있다.

◦ 근대화과정을 촉진시킴으로써 우리 나라 사회발전을 크게 추동한데 있다.

◦ 동양과 세계정치정세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데 있다.

갑오농민전쟁은 중국의 《태평천국》농민전쟁, 인디아의 시파이폭동과 함께 아시아의 3대항전으로서 19세기 아시아반제민족해방투쟁의 새벽종을 크게 울린 특기할 력사적사변이였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이르러 련이어 일어난 중대한 세계적사변들의 시발로도 되였다.

이처럼 갑오농민전쟁은 19세기 후반기 우리 인민의 반침략반봉건투쟁으로서 그 규모에 있어서나 격렬성에 있어서 최고봉을 이룬 농민전쟁이였으며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부패한 봉건통치배들의 악정으로 첨예화된 민족적 및 계급적 모순에 의하여 일어난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대중투쟁이였다.

 

△ 복습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