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1884년부르죠아개혁

 

△ 개화파의 정변준비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특히 낡은 사회제도를 새로운 사회제도로 바꾸고 인민대중의 사회적해방을 이룩하여나가는 과정은 치렬한 계급투쟁과정입니다.》

개화파는 개혁사업을 파탄시키기 위하여 수구파세력이 외세와 공모하여 책동하는 조건에서 부르죠아개혁을 폭력적방법으로 단행하기로 하고 1884년 봄부터 수구파정권을 때려엎기 위한 무장정변준비사업을 본격적으로 밀고나갔다.

당시 나라안팎의 정세는 개화파의 정변준비에 유리하였다.

군인폭동이후 각계층인민들의 반침략반봉건투쟁이 계속 장성하고있는 반면에 1884년 4월 조선에 주둔하고있던 청군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1 500여명이 철수한것은 그에 의거하고있던 수구파들에게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한편 개화파의 정변준비사업에는 일련의 불리한 조건들도 가로놓여있었다.

그것은 수구파세력이 개화파들에 비하여 력량상우세를 차지하고있은것이며 미일침략자들이 개혁운동을 적대적으로 대하면서 각방으로 방해책동을 감행하고있은것이였다.

이러한 속에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유리한 환경을 최대한으로 리용하는 방향에서 정변준비사업을 다그쳐나갔다.

ㅡ 개화파의 력량을 묶어세우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렸다.

김옥균은 1884년 5월에 외교사신으로 미국에 갔던 홍영식이 돌아온 때를 계기로 개화파성원들을 서울에 집결시키고 외국에 류학중이던 사관학교학생들을 귀국시켜 정변에서 주동적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개화사상을 지지한 일부 중소관리와 군관, 군대의 일부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여 그들을 전취하는데 성공하였다.

ㅡ 개화파들은 국왕을 자기편으로 끌기 위한 활동을 적극 벌렸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지도자들은 국왕 고종에게 지금이야말로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끝장내고 국정개혁을 단행하여 나라를 근대적국가로 만들어야 할 때이며 이것이 없이는 나라의 위기를 타개할수 없다는것과 수구파관료들의 무능성을 폭로하였다.

그들은 자주 국왕에게 당시의 국제정세와 자본주의침략세력의 동방침략정책을 폭로하고 하루속히 결정적대책을 세워야만 나라의 위기를 헤쳐나갈수 있다고 함으로써 국왕이 앞으로의 정변을 지지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서울주재 각국 외교대표들을 만나 유럽아메리카렬강도 정변이 있을 경우 그를 지지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ㅡ 개화파들은 정변시에 일본을 리용하기 위한 활동도 벌렸다.

김옥균이 일본을 리용하려고 한것은 일본이 동양에서 제일먼저 자본주의발전의 길에 들어섰다는것과 당시 청일간의 모순을 타산한데 있었다.

간교한 일본은 청나라의 약화와 혼란, 조선봉건정부안의 동요를 감촉하고 이 기회야말로 개화파를 《원조》하여 청나라세력을 구축하고 조선을 예속시킬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회라고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주재 일본공사는 개화파요인들의 일본에 대한 불신임과 불만을 무마하려고 하면서 개화파를 《원조》할 뜻이 있다고 떠벌이였다.

그리하여 김옥균은 일본공사 다께소에와의 여러차례 접촉끝에 9월 17일에는 정변에 일본군대를 동원시킬데 대한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개화파는 일본의 량면술책을 경계하여 정변은 어디까지나 자체의 힘을 위주로 단행하여야 한다는 립장에서 일본군이 동원되는 경우 왕궁호위에만 협력하며 정변수행과 내정개혁에는 개입하지 않을데 대하여 사전합의를 보았다.

ㅡ 한편 개화파는 여러차례의 비밀모임을 가지고 정변수행방도를 토의하였다.

9월 17일 모임에서 그들은 새로 건설한 우정국락성식연회를 그 총판인 홍영식이 차리고 여기에 수구파요인들을 초청하여 처단하기로 하였다.

그후 10월 13일과 14일 모임에서 10월 17일에 정변을 단행할것과 행동대원들의 책임분담 및 활동방향 등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그리하여 개화파는 기본적으로 정변준비를 완료할수 있었다.

△ 갑신정변과 개화파정부의 정강

ㅡ 김옥균의 지도밑에 개화파들은 1884년 10월 17일 마침내 홍영식이 총관이 되여 새로 지은 우정국청사 락성축하연을 계기로 사대매국적수구파정권을 뒤집어엎기 위한 무장정변을 단행하였다.

개화파는 그날저녁 늦게 우정국락성식연회를 차려놓고 수구파거두들과 외교대표들을 초대한 다음 주변에 매복시킨 행동대원들로 가까이에 있는 별궁에 불을 지르고 거기로 달려가는 수구파들을 처단함으로써 정변을 실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별궁방화가 행동대원들의 기술부족으로 실패하자 김옥균은 곧 우정국옆집에 불을 놓게 하였다.

밤 10시경에 옆집에서 갑자기 불이 나자 수구파대신들이 밖으로 나갔는데 맨 선참으로 나갔던 민영익이 행동대원의 칼에 맞고 연회장안으로 되돌아와 쓰러져 수구파대신들을 처단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실패하게 되였다.

김옥균은 개화파성원들에게 계획한대로 행동을 계속할것을 지시하고 자기는 곧 국왕이 있는 창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에게 《청군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면서 잠시 경우궁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하였다.

개화파는 국왕을 경우궁으로 옮겨 자기 수중에 장악한 다음 련이어 국왕의 동의밑에 일본군대 100여명을 동원하여 왕궁밖에 경비를 세우고 왕궁안에는 자기의 무장성원들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왕을 찾아 달려온 리조연, 한규직, 윤태준 등을 처단하고 민태호, 민영목, 조녕하 등을 왕명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다.

개화파들은 10월 18일 개화파요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 지지자와 동정자들로 구성된 새 정부를 구성하고 그것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새 정부는 개화파들에 의하여 세워진 우리 나라에서의 첫 부르죠아개혁정권이였다.

개화파정부의 수립은 10월 17일 정변이 일단 승리하였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사태에 대하여 주시하고있던 명성황후는 새 정부의 구성을 보자 이 정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개화파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명성황후는 경기감사 심상훈으로부터 청군의 반격이 있게 될것이라는 련락을 받자 경우궁이 좁고 불편하다고 하면서 창덕궁으로 돌아가자고 잔꾀를 부렸다.

정변당시 개화파가 국왕을 경우궁으로 옮긴것은 이곳이 크지 않아서 적은 병력으로 방어하기가 유리하다는것과 창덕궁은 이와는 정반대로 크고 넓어서 방어하기가 힘들다는것을 타산한데 있었다.

개화파는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명성황후의 잔꾀를 끝까지 분쇄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국왕은 계동궁에 가있다가 이날 오후에는 또 명성황후의 앙탈과 일본공사 다께소에의 술책에 의하여 창덕궁으로 옮겨 앉았다.

김옥균은 왕궁안의 방어태세를 갖춘 다음 이미부터 구상하여 온 새 정부의 정강초안을 합의하였다.

ㅡ 새 정부의 정강은 국왕의 승인을 받아 10월 19일 아침《조보》로서 공포되였다.

 

 

 

새 정부가 채택한 정강은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근대적인 국가 및 사회제도를 창설할것을 목적한것으로서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부르죠아적정강이였다.

정강의 기본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안으로 데려오도록 할것.(조공허례의 행사를 없앨것)

2. 문벌을 페지함으로써 인민의 평등한 권리를 제정하고 사람들을 재능에 따라 등용하며 관록으로 등용하지 말것.

3. 전국에 걸쳐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들의 협잡을 방지하고 인민들의 부담을 덜어 그 곤난을 제거하며 동시에 국가재정을 유족하게 할것.

4. 내시부를 페지하고 그 가운데서 재능있는자가 있으면 등용할것.

5. 과거, 현재 할것없이 나라에 엄중한 손해를 끼친자는 엄벌할것.

6. 각 도의 환자제도를 영원히 페지할것.

7. 규장각을 페지할것.

8. 시급히 순사제도를 내올것.

9. 혜상공국을 페지할것.

10. 과거, 현재 할것없이 류배, 금고를 당하였던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면죄석방할것.

11. 4영을 합하여 한개의 영으로 만들고 그 가운데서 선발하여 근위대를 설치할것.

12. 국가의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일적으로 관할하며 이밖의 재무관청은 모두 페지할것.

13. 대신과 참찬 등은 일정한 날자를 정하여 의정부에서 정사를 모두 결정한 후 왕의 비준을 받아 정령발포로서 정사를 집행할것.

14. 정부 6조외에 모든 불필요한 관청을 없애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처리케 할것.

 

개화파정부의 정강은 나라의 봉건적락후성을 가시고 근대적발전을 이룩하려는 개화파들의 열렬한 지향과 조선사회발전의 합법칙적요구를 반영한 당시로서는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개혁강령이였다.

그러나 이 정강은 개화파자체의 계급적제한성과 사회경제발전의 미숙성으로부터 일련의 제한성과 불철저성도 가지고있었다.

△ 정변의 실패와 교훈, 그 력사적의의

개화파들이 새 정부와 그 정강을 발포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바삐 서두르고있을 때 그들의 뒤에서는 명성황후를 비롯한 수구파잔당들이 외래침략군에 의거하여 개화파정권을 뒤집어엎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있었다.

수구파들이 청나라군대와 함께 10월 19일 오후 3시경에 왕궁으로 쳐들어옴으로써 개화파들은 자기 무력보다 우세한 적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개화파성원들과 그들의 영향하에 있던 군인들은 해가 질 때까지 완강한 방어전을 벌렸다.

한편 일본공사 다께소에는 3일간의 왕궁호위《약속》을 헌신짝처럼 집어던지고 일본침략군을 모조리 끌고 도망쳤다.

그리하여 창덕궁은 적들에게 점령되고 홍영식을 비롯한 개화파인물들은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무참히 학살되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일부 성원들만이 다시 일어날것을 결심하고 인천으로 몸을 피하였다가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의 개화파의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 갑신정변의 실패원인은 개화파의 계급적제한성과 개화파지도세력의 일련의 전술적착오에 있으며 외래침략군대의 무력간섭과 이에 대한 침략렬강들의 지지성원에 있었다.

- 갑신정변이 남긴 심각한 교훈은 어떤 사회정치적변혁이든지 승리하자면 정확한 전략전술에 기초하여 광범한 력량을 충분히 조직동원하여야 하며 국내반동세력과 함께 그와 결탁한 외래침략자들의 파괴모략책동을 철저히 분쇄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민족적독립과 사회적진보도 이룩할수 없다는것이다.

- 갑신정변이 가지는 의의

◦ 이 정변이 우리 나라의 부르죠아민족운동이 반침략애국운동이며 봉건적침체와 락후성을 청산하기 위한 진보적운동이라는것을 뚜렷이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 갑신정변이 그후 우리 나라 부르죠아민족운동을 추동하는데서 큰 영향을 주었다는데 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갑신정변은 개화파를 비롯한 우리 나라의 선각자들이 자본주의침략이 강화되고 봉건제도가 썩어가고있던 시기에 나라의 자본주의적발전의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민족적독립을 고수하고 사회적진보를 이룩하려고 한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투쟁이였다.

 

△ 복습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