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일본군국주의침략을 반대한 조선인민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가 늘 말하지만 사대주의를 하는 사람은 머저리가 되고 사대주의를 하는 나라는 망하는 법입니다.》

△ 침략적이며 불평등적인 《강화도조약》의 조작

- 1870년대 중엽 대원군이 정권에서 밀려나고 명성황후일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자기의 정치적지반을 꾸린 명성황후일당은 대원군정권에 대한 인민들의 반항과 위정척사론자들의 상소투쟁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1873년 11월에 이른바 국왕의 《친정》이라는 구실밑에 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가로챘다.

위정척사사상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카톨릭교의 침습을 반대하는 사상으로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위정척사》론자들은 기정진, 리항로였으며 그후 최익현, 류린석 등에 의해  계승되였다.

《위정척사》사상은 《바른 학문을 지키고 요사스러운 학문을 배척한다》는 구호밑에 유교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과 정치사상조류들을 반대하며 안으로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칠데 대한 사회《개혁》사상과 반침략애국주의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

《위정척사》론자들은 일제의 무력침공이 시작되자 백성들에게 의병투쟁에 나설것을 호소하였으며 직접 손에 무장을 잡고 일제와 맞서 싸웠다.

《위정척사》론은 그리스도교와 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한 근대시기 우리 나라의 애국적인 사상조류이다.

명성황후일당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대원군의 세력을 몰아내고 대원군이 실시한 봉건적《개혁》들을 모조리 뒤집어놓았으며 자기의 일가족속들을 중앙과 지방의 벼슬자리에 앉히는 동시에 인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더욱 강화하는 반동적인 대내정책을 실시하였다.

명성황후일당은 대외정책에서도 대원군의 《쇄국정책》과는 반대로 아무런 자체의 준비도 없이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있는 자본주의침략자들에게 나라의 《문》을 열어주는 매국적이고 굴욕적인 정책인 이른바 《개국정책》을 실시하였다.

명성황후일당의 이러한 사대투항주의정책은 외래침략자들에게 조선침략의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으며 엄중한 민족적위기를 조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명성황후일당이 사대투항주의정책을 실시하는 이러한 정세를 리용하여 일제는《운양호사건》을 도발하고 《강화도조약》을 강압조작하였다.

• 미제를 등에 업고 조선침략준비를 갖춘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조선침략의 구실을 마련할 목적밑에 1875년 8월 21일에 범죄적인 《운양》호사건을 도발하였다.

 

 

《운양》호

 

침략선 《운양》호는 함장인 해군소좌 이노우에의 지휘밑에 이미 세워진 계획에 따라 조선의 중요한 군사요충지대인 강화도앞바다에 침입하였다.

이노우에는 20여명의 일본침략자들을 작은 배에 옮겨 태운 다음 초지진포대에 접근시켜 정찰과 도발을 감행하게 하였다.

적들이 포대에 가깝게 기여들자 초지진포병들은 일제히 침략자들에게 포격을 가했다.

 

 

 

《운양》호를 격퇴한 초지진포대

 

침략선 《운양》호는 기다렸다는듯이 초지진포대를 향하여 포격을 감행하였다.

초지진포병들의 완강한 타격을 이겨내지 못한 일본침략자들은 《운양》호를 끌고 달아나면서 8월 22일에는 아무러한 방어시설도 없는 평화적주민지대인 한산도를 습격하여 집들을 불사르고 인민들을 살해하였다.

8월 23일에는 영종도앞바다에 기여들어 함포사격으로 영종진포대를 파괴한 다음 성안에 달려들어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였으며 인민들의 재산을 강탈하였다.

이와 같이 《운양》호사건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강도적인 무장도발책동이였다.

• 《운양》호사건을 도발한 일본침략자들은 부패무능한 조선봉건정부를 위협하여 1876년 2월 3일 《강화도조약》을 강압조작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이 《강화도조약》을 강압조작한

당시의 강화부 련무당

 

1876년 1월 17일부터 강화부 련무당에서 벌어진 《회담》에서 구로다는 《운양》호사건의 책임을 조선정부에 넘겨씌우면서 침략적인 불평등조약초안에 도장을 찍을것을 강요하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무력행사를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부패무능한 국왕과 명성황후일당의 투항주의적책동으로 하여 1876년 2월 3일에 일본침략자들이 강요한 12개조의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라는 침략적인 《조약》이 강압조작되였다. 그후 7월 6일에 《강화도조약》에 대한 보충협정으로서 《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이라는 침략적인 《조약》이 또다시 강요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강화도조약》을 조작함으로써 부산을 비롯한 조선의 항구들을 개방하고 략탈적인 《자유무역》을 강행할수 있는 《권리》, 조선의 연해와 섬들에 대한 측량 및 해도를 작성할수 있는 《권리》, 조선의 개항장들에 일본령사관을 설치하고 령사재판권을 행사할 《권리》 등을 빼앗아냈다.

이와같이 《강화도조약》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이 가장 포악하고 파렴치한 강도적수법으로 강제조작한 《조약》이였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 일본침략자들에게는 일방적인 권리와 리익만이 부여되고 조선봉건정부에는 굴욕적인 의무만이 지워진 예속적이며 불평등적인 《조약》이였다.

《강화도조약》의 조작을 계기로 조선은 일본침략자들과 유미자본주의렬강의 반식민지로 전락되기 시작하였다.

△  《강화도조약》조작후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침략책동의 강화와 그를 반대한 인민들의 투쟁

일제는 침략적인 《강화도조약》조작후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책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서둘러 부산항을 개항시키고 군함을 내몰아 조선연해를 싸다니면서 측량, 정찰, 무력시위와 같은 도발행위를 감행하는 한편 조선봉건통치배들을 위협하여 서울에 저들의 공사관을 설치하며 원산과 인천을 강제개항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1880년대 말 서울에는 일본군국주의의 조선침략 현지거점인 일본공사관이 설치되고 악명높은 하나부사가 《공사》라는 명목밑에 기여들었다.

일본침략자들은 또한 1880년에 원산을, 1881년에는 인천을 강제개항하고 경제침략의 조건들을 마련하였다.

부산, 원산, 인천항이 개항되자 일본상인들이 밀려들어 탐욕적인 략탈행위를 감행하였다.

1876년이후 일제의 대량적인 상품투입은 우리 나라의 경제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였다.

• 개항을 전후하여 조선봉건왕조의 대일무역이 수출초과로부터 수입초과로 바뀌여졌다.

개항전 조일무역에서 조선측은 항상 수입에 비한 수출초과의 관계를 맺고있었으나 개항후 무역관계는 급속히 무너져 해마다 엄청난 수입초과현상을 나타냈다.

• 우리 나라의 국내시장과 농민경리에 파국적영향을 미쳤다.

마구 밀려드는 외국상품때문에 국내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농업에서의 상품생산발전과정이 저애되고 외국자본에 예속되는 방향으로 농업에 상품화페관계가 침투하여 농산물의 시장화가 촉진되였다.

이처럼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침략책동은 우리 나라의 민족경제발전을 가로막고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전에도 결정적위협을 주었고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을 첨예화시켰다.

- 우리 인민은 일제의 침략책동을 반대하여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 우리 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연해측량과 정탐행위, 개항을 반대하는 투쟁을 과감히 벌렸다.

1877년~1880년에 강원도 덕원과 안변일대의 인민들이 일본침략자들의 원산만일대의 연해측량과 원산개항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렸다.

1878년 8~9월에는 전라도, 충청도연해인민들이 륙지에 불법상륙하여 정찰행위를 감행하려는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투쟁에 궐기하였다.

1879년 3월에는 무장한 일본침략군이 불법적으로 동래부관청에 침입하자 이에 격분한 인민들이 돌과 맨주먹으로 대항하였다.

1880년에는 조령, 안동, 장연지방에서 일본침략자들의 인천개항을 반대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수천명의 조령지방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을 쳐물리치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할 기세를 보였으며 전체 인민들이 이에 호응할것을 호소하면서 만약 인천을 개항한다면 일본공사 하나부사를 처단할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러한 인민들의 투쟁기세에 겁을 먹은 하나부사는 인천개항을 뒤로 미루고 황급히 일본으로 도망치고말았다.

• 우리 인민들은 일본공사관설치를 반대하여 투쟁을 벌렸다.

1878년 6월과 1879년 4월에 서울에 기여드는 하나부사에게 돌벼락을 안기는 투쟁을 벌리였다.

특히 1881년에 서울인민들은 일본공사관설치를 반대하여 시위와 습격투쟁을 과감히 벌려 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기였다.

• 인민들은 직접 일본관리들과 상인들을 습격처단하는 투쟁도 전개하였다.

1882년 초에 안변인민들이 여러명의 일본관리들을 습격처단한 투쟁을 비롯하여 일본침략자들이 침입한곳마다에서 이러한 투쟁이 전개되여 침략자들을 전률케 하였다.

• 이 시기 우리 인민들은 반일반침략투쟁과 함께 반봉건투쟁도 치렬하게 벌리였다.

1870년~1880년대 초에 전라도 령암, 장흥, 황해도 장연지방에서 폭동을 일으킨 군중들은 일본침략자들에게 투항굴종하는 악질관리들을 처단하면서 반봉건투쟁을 벌렸다.

그들의 투쟁은 188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 활발히 벌어졌다.

폭동에 궐기한 인민들은 서울시안에까지 드나들면서 통치배들과 일본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 이 시기 인민들의 투쟁에 고무된 애국적유생들인 위정척사론자들도 반침략투쟁에 떨쳐나섰다.

1876년 1월에 위정척사운동의 대표적인물인 최익현을 비롯한 50여명의 애국적유생들은 상소투쟁을 통하여 예속적인 《강화도조약》을 조작한 일본침략자들앞에 투항주의적태도로 나오는 국왕을 비롯한 통치배들에게 강한 압력을 가하였다.

애국적유생들의 상소투쟁은 1880년대 초에 전국적으로 진행되였다. 안동, 상주지방의 유생들을 중심으로 경상도지방의 애국적선비들은 1881년 2월에 리만손, 강진규 등이 작성한 《령남만인소》라는 상소문을 국왕에게 제출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애국적유생들은 위정척사운동을 더욱 활발히 벌렸는데 3월에 무관출신의 황재현 등이 반침략상소를 들이댔으며 5월에 강진순을 비롯한 경상도, 경기, 충청도유생들이 번갈아 상소를 하였다.

위정척사론자들이 벌린 상소운동은 일본침략자들과 함께 미국침략자들을 비롯한 자본주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반침략투쟁과 봉건통치배들의 사대투항주의정책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여있었다.

애국적유생들이 제기한 이 구국대책은 인민대중의 반침략투쟁과 그 지향을 반영한것으로 하여 인민들의 반침략투쟁을 추동하는데 일정한 양향을 주었다.

위정척사운동의 앙양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을 비롯한 자본주의침략자들과 사대투항주의에 빠져있는 봉건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봉건통치층안의 반침략세력에 고무적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통치배들은 1882년 4월 미국침략자들이 침략적인 《조미조약》을 강요하는데 굴복함으로써 나라와 민족의 자주적발전에 역행하는 천추에 용납못할 반역행위를 감행하였다.

 

복습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