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6~18세기 중엽의 문화

 

1) 16세기의 철학

16세기는 우리 나라에서 철학적론쟁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시기였다. 특히 유물론이 철학조류로서 매우 발전하였다.

  이 시기 우리 나라의 철학사에서는 《리》(理)와 《기》(氣)의 호상관계문제를 둘러싸고 《기일원론》과 《리일원론》과의 격렬한 론쟁이 벌어졌으며 그 과정에 우리 나라 중세철학은 보다 높은 발전단계에 올라섰다.

△ 기일원론철학(氣一元論)

서경덕(1489~1546년)은 기일원론철학을 체계화한 유물론철학자였다.

― 서경덕의 자연에 대한 견해

서경덕은 우선 세계의 시원을 물질적실체인 《기》로 보면서 다양한 천지만물은 기로 이루어지고 기의 각이한 존재형태라고 인정하였다.

 서경덕은 기가 먼지와 같은 미세한 물질적실체이며 색갈, 소리, 냄새, 맛, 빛과 같은 성질과 구체적인 형체를 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기가 무한한 우주공간에 가득차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서경덕이 물질세계의 무한한 영원성을 인정하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서경덕은 다음으로 세계사물현상들의 발생발전에 대해서는 그것이 물질적기의 작용에서 오는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는 기는 스스로 운동변화한다고 보면서 그것은 기자체에 스스로 그렇게 할수 있는 법칙성, 성질이 있기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기안에 있는 대립물로서 성질이 서로 다른 두 요소인 음과 양의 호상작용으로하여 기가 스스로 운동변화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이 시기 철학에서 중요하게 론의되였던 물질운동의 원인과 동력에 대한 소박한 유물변증법적견해였다.

서경덕의 견해는 비록 소박하지만 유물론적이며 변증법적인 사상으로서 중세기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의 유물론철학사상이였다.

― 서경덕의 사회정치적견해

서경덕의 사회정치적견해는 단편적이고 보수적이였다.

 서경덕의 자연에 대한 견해는 비교적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나 사회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의연히 뒤떨어지고 보수적인 립장에 서있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여있던 훈구파의 폭정과 수탈행위를 일정하게 폭로비판하였지만 봉건사회의 반인민적인 질서를 음과 양의 법칙에 맞는것으로 보고 봉건통치질서를 합리화하였으며 봉건적신분제도를 긍정하고 옹호하였다. 이것은 량반인 그로서 넘어설수 없는 사회계급적제한성에서 오는것이였다.

△ 리일원론철학(理一元論)

서경덕의 기일원론철학에 대립하여 나선것은 리황의 리일원론철학이였다.

리황의 철학에서 근본적인 시발점으로 되며 기본범주로 되는것은 《리》이다.

― 자연에 대한 견해 (리일원론은 객관적관념론)

리황은 기일원론을 반대하면서 세계는 《리》를 기초로 하여 구성되여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세계의 물질적시원인 기의 1차성을 부정하고 리의 선차성을 주장하였다.

리일원론적견해는 사물의 속성, 법칙으로서의 리를 물질적실체인 기와 분리시켜 보면서 기가 있기전에 리가 먼저 존재하였다고 하였다.

리황은 리란 사물이전에 존재하는 절대적인것으로서 만물발생의 최초의 근원으로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리와 기의 호상관계를 론하면서 리는 기의 주재자이며 기는 리의 재료라고 하였다.

이것을 형상적으로 표현하여 날고 뛰는것은 기이지만 날고 뛰게 하는것은 리이며 리가 기의 장수라면 기는 리의 병졸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천지만물과 사람, 지어는 인간사회의 제도와 질서까지도 포함한 자연과 사회의 모든것이 리에 의하여 창조되고 지배된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또한 세계의 모든 현상들의 운동변화와 발전도 그것이 다 리의 주재자적역할에 의하여 이룩된다고 하였다. 리일원론자들은 운동의 원인과 동력이 리에 있다고 보면서 사물의 운동은 리의 조절통제밑에 진행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리황의 자연계의 본질과 그 발전의 합법칙성에 대한 견해는 그것이 모두 초자연적인 리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전도시켜 보고있는 객관적관념론이다.

― 사회정치적견해

리황은 사회에 대한 고찰에서도 봉건통치질서와 신분관계를 다 《천리》(天理)의 발현이라고 하면서 누구나 다 이 질서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결국 리황의 철학사상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견해에서 초자연적이며 초인간적인 정신적실체인 리를 중심으로 설교한 관념론적이며 반동적인 철학사상이였다.

△ 리기이원론철학(理氣二元論)

16세기에는 리기이원론철학도 대두하였다.

리기이원론철학의 대표자는 조선봉건왕조시기 찬성벼슬까지 한 대관료인 리이(률곡)이였다.  그는 저서로서 《률곡전서》를 남기였다. 

리이는 리나 기는 서로 뗄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으며 둘이 다같이 세계의 시원을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사회에 대한 견해에서 리이는 봉건사회와 봉건국가의 옹호자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량반지배층의 반동적인 통치체계와 썩어빠진 정치에 대하여 일정하게 비판하면서 일부 합리적인 견해들을 내놓았다. 그가 내놓은 일련의 시정대책안들은 물론 봉건제도자체의 존속과 유지를 위한것이였다.

결국 리이의 철학사상은 량반계급안의 중소지주적계층의 리해관계를 대변한 사상이였다.

17세기에는 두 철학사상조류간의 대립과 투쟁이 첨예화되였다. 진보적사상의 대표자들로서는 리수광(1563~1628년), 장유(1587~1638년), 윤휴(1617~1630년) 등이며 반동적성리학의 선두에는 송시렬(1607~1689년)이 서있었다.

 

2) 과학과 기술

△ 함선건조술과 무기제작기술의 발전

우리 인민들은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어려운 투쟁을 벌리는 환경속에서도 창조적활동을 꾸준히 벌리고 뛰여난 재능을 발휘하여 세계에 자랑할만한 과학기술성과들을 이룩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봉건통치배들이 사대주의에 물젖어 유교경전이나 외우고 음풍영월로 세월을 보낼 때에도 인민들은 뛰여난 재능을 발휘하여 세계에 자랑할만한 예술작품들을 만들어냈으며 인민들과 기술자들은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과 같은 독특하고 위력한 병선을 발명하여냈습니다.》

― 16세기에 함선건조기술이 상당히 발전하였다.

거북선의 창안은 이 시기 함선건조기술발전에서 이룩된 가장 큰 성과였다.

 

 

거북선

 

1413년에 만들어 림진강에서 그 위력을 시위한 거북선은 임진조국전쟁전인 1592년 2월 이전에 리순신에 의하여 세계최초의 철갑선으로 완성되였다. 거북선은 화약을 사용하는 각종 포들을 많이 설치한 철갑선으로서 길이 35m, 너비 11.8m, 높이 5.2m, 좌우에 각각 노가 10개씩 있었다. 거북선의 갑판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배안에서는 밖을 볼수 있으나 밖에서는 배안을 볼수 없게 하였고 비록 수천척의 적선들속이라도 뚫고들어가 화포를 쏠수 있게 70여개의 화구가 있었다. 또한 거북선은 배의 구조가 높은 속도를 낼수 있도록 되여있었고 견고하였다.

거북선은 배머리에 붙은 《룡》의 아가리에서 연기를 뿜어 적들을 당황케하고 아군에는 유리한 연막의 역할을 할수 있게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거북선은 적과의 싸움에서 여러가지 전술을 효과적으로 적용할수 있었다.

거북선은 건조공정이 간단하면서도 선체구조가 매우 견고하였으며 무장인원이 철갑으로 장비된 선체안에서 활동하므로 전투과정에 사람과 기재에 대한 안전이 담보된 매우 우수한 함선이였다. 

이 시기에는 거북선뿐아니라 판옥선과 해골선, 방패선, 전선, 사후선, 협선 등 그 크기와 임무 및 역할을 달리하는 여러가지 배들이 무어졌다.

― 16세기 거북선에 실었던 천자, 지자, 현자, 황자 등의 총통들과 그밖의 여러가지 화포들을 많이 만들어 바다와 륙지에서 큰 힘을 발휘할수 있게 하였다.

임진조국전쟁시기에 창안제작되여 위력을 나타낸 수많은 무기들가운대서 특히 유명한것은 리장손이 창안한 비격진천뢰였다.

 

 

비격진천뢰는 완구포를 사용하여 발사하였는데 그 사격거리는 400~500보정도였으며 발사되면 폭발소리가 우뢰소리같고 하늘땅을 뒤흔들어놓았다. 비격진천뢰는 신관장치를 한 포탄, 시한탄의 첫 형태로서 세계화포력사에 알려졌다.

임진조국전쟁시기에는 조총을 만들기 위한 인민들의 창조적노력도 컸다. 그리하여 총신이 긴 강철제 조총을 만들어 왜적을 물리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 천문학과 고려의학

― 이 시기 천문학은 15세기의 성과를 이어받아 계속 발전하여나갔다.

◦ 천문관측기구들을 보수 또는 개조하거나 새로 만들어냈다. 1525년에 목륜이라는 망원경과 비슷한 관측기구를 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간의와 혼상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1536년에는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부분적으로 개조하였다.

기상현상에 대하여서도 정밀한 관측과 기록을 하였다. 즉 낮과 밤을 가리지않고 계속 관측하고 정밀하게 기록하였으며 비정상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즉시로 통보하는 제도를 세웠다.

1519년에 해무리현상과 1545년에 우뢰현상에 대해서도 관측기록을 남기였다.

◦ 천문기상관측기구들이 정비되고 천체에 대한 관찰이 심화되는데 따라 태양계의 구조를 비롯한 천문리론이 더욱 발전하였다.

김석문의 태양계구조론과 지전설은 새로운 내용을 가진것이다. 17세기 말에 활동한 김석문의 《역학도해》에 의하면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고 그 두리를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 및 항성들이 점점 더 멀게 돌고있으며 그 가운데서 수성과 금성은 태양을 따라 그 두리를 돌고있고 지구도 1년에 366회씩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돌고있다고 주장하였다. 김석문의 이러한 태양계구조론에는 천체력학적으로 보아 관측과 계산에 기초하지못한 소박한 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지전설로 일관되여있으며 중세의 지구중심설로부터 현대적인 태양중심설에로 넘어가는 중간단계의 견해였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 이 시기 의학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은 그 대표적성과였다.

 

 

 《동의보감》은 1596~1610년까지 15년간에 걸쳐 국내외 의서 500여종을 참고로 하여 저술한 우리 나라 봉건시기 고려의학을 대표하는 실용적가치가 있는 의서이다.

허준은 오랜 기간의 연구결과와 치료경험에 기초하여 당시까지 국내외에서 달성한 고려의학의 모든 성과들을 종합분석하고 그 가운데서 가장 알맹이라고 볼수 있는 고려의학의 리론들과 치료경험을 추려서 알기쉽게 해설하였다.

《동의보감》에는 고려의학의 여러 분야에 대한 허준의 견해와 의학사상 및 의료경험이 체계화되여있으며 우리 나라 전통의학에 뿌리를 둔 질병의 예방치료방법이 반영되여있다. 그러나 《동의보감》은 질병의 예방에 대한 방도를 도교의 《수양론》에서 찾은것과 같은 관념론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극복하지 못한 부족점을 가지고있다.

◦  17세기는 우리 나라 의학발전력사에서 병치료의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경험방의 시기》라고 말할수 있을만큼 《경험방》들이 수많이 출판되였다. 그 가운데서도 허준의 《벽온신방》(1612년), 《신찬벽온방》(1613년) 그리고 천연두의 치료법을 수록한 박진희의 《두창경험방》 등은 그 대표적인것이였다.

◦ 이 시기 오랜 전통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있던 침구술이 더욱 발전하여 우리 나라 봉건시기 침구학의 발전력사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허임의 침구보사법, 리형익의 파침법, 황정학의 5행침법 등이 새로 나왔으며 이러한 성과들에 토대하여 우리 나라의 침구학은 한계단 더 높은 수준에로 발전하였다.

특히 허임(1570~1647년)이 일생동안의 침구료법경험을 총화하여 저술한 《침구경험방》은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 전해오는 침구책들가운데서 가장 가치있는 침구전문서적이다.

 

3) 문학과 예술

△ 문학

  16~18세기전반기문학은 시대가 문학앞에 제기하는 요구들을 반영하여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 시기의 문학에서는 외래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인민대중의 위훈을 내용으로 하는 작품들과 봉건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한 력사적인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이 많이 창작되였다.

ㅡ 16세기 훈민정음의 창제이후 국문시가창작이 전례없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그 과정에 조선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작품들이 수많이 나왔다.

이 시기 대표적인 시가작품으로서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들수 있다.

정철은 26살에 과거급제하여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라갔으나 서인당파로 몰려 자주 류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류배지에서 임진조국전쟁소식을 듣고 풀려나와 강화도수비에서 공적을 세웠으며 44살에 강원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동별곡》과 같은 시가작품을 많이 창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 녀류시가가 특색있게 발전하였다.

녀류시인들은 주로 가정생활과 남녀간의 애정문제 등을 작품들에 담았다. 대표적인 녀류시인들로서 황진이, 신사임당, 허란설헌, 리옥봉 등을 들수 있다.

 시가문학은 임진조국전쟁시기를 반영한 반침략애국문학으로 새롭게 발전하였다.

이 시기 인민들은 침략자를 반대하여 일떠선 인민들의 애국적지향과 감정을 반영한 작품을 많이 창작하였다.

반침략애국주제의 작품으로서 《강강수월래》, 《정방산성가》, 《쾌지나 칭칭나네》, 《태평사》(박인로), 《선상탄》 등을 들수 있다.

《강강수월래》(羌羌水越來)는 임진전쟁시기 인민들의 반침략애국투쟁에서 과시한 멸적의 기세와 적개심을 보여준 노래이다. 이 노래는 한명이 먼저 선창하면 다른 사람들이 합창으로 받아부르는 방법으로 당시 널리 부르던 노래로 알려지고있다.

《쾌지나 칭칭나네》는 《통쾌하다! 가등청정(가또 기요마사) 쫓겨 나가네》라는 뜻으로서 일본침략자들이 도망치는 몰골을 풍자조소하면서 승전의 기쁨을 노래한것이다.

― 이 시기 설화들과 소설, 전기작품들도 많이 창작되였다.

고전소설이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여 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당시 창작된 한문소설로서 림제의 작품들인 《재판받는 쥐》, 《꽃력사》, 《시름의 성》을 들수 있다.

《재판받는 쥐》는 봉건국가창고의 곡식을 다 훔쳐먹고 재판받는 쥐의 형상을 통하여 당시 탐관오리들과 썩어빠진 통치배들의 착취상을 폭로비판하였다.

17세기 이후 국문소설이 많이 창작되여 하나의 조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홍길동전》(허균), 《사씨남정기》(김만중), 《운영전》(류영), 《임진록》, 《박씨부인전》, 《림장군전》, 《전우치전》 등을 들수 있다.

 

 

《홍길동전》은 봉건적인 적서차별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봉건적학정을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을 형상한 작품이다.

명문귀족인 홍재상의 서자로 태여난 홍길동이 적서차별정책으로 벼슬길이 막힌데다가 가정안의 알륵관계로 집을 뛰쳐나와 농민군의 지휘자로 활동하였으며 률도국에 가서 봉건적인 《리상왕국》을 세우는 이야기로 되여있는 이 소설은 봉건통치배들의 부패상을 폭로하고 농민폭동군의 의로운 활동을 소설작품에 반영한것을 비롯하여 일정하게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봉건제도자체에 모든 불행과 비극의 근원이 있다는것을 밝히지 못하고 또 홍길동을 률도국의 왕으로 등장시킨것을 비롯하여 제한성도 가지고있다.

 

 

《임진록》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경위로부터 시작하여 전후 사신이 일본에 가서 항복서를 받아오기까지의 전쟁 전과정을 폭넓게 보여주면서 애국명장들과 의병장들의 활동을 형상하고있다.

소설에서는 작품에 등장하는 긍정인물은 남녀로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않고 침략자들을 끝없이 미워하고 나라와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려져있으며 반침략투쟁에서 그들이 세운 위훈을 높이 칭송하였다.

△ 그림

이 시기 미술부문에서도 새로운 발전이 이룩되였다.

― 이 시기 그림부문에서 큰 전진이 있었다.

진보적인 화가들은 반동적인 문인화가 성행하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조선화의 전통적인 화풍을 발전시켰으며 애국적감정과 민족적정서가 짙은 조선화를 많이 창작하였다.

당시 그림에서는 인간생활을 묘사하는데 관심이 높아지고 사회생활의 다양한 측면들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내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게 되였다. 이와 관련하여 미술의 주제내용에서도 근로인민의 생활감정과 현실생활을 폭넓게 포괄하여 묘사하고 형상하는 수법도 계속 세련되여갔다.

대표적인 화가들로는 17세기의 윤두서, 리명욱, 김명국과 18세기의 리상좌, 리정, 리암, 녀류화가 신사임당 등을 들수 있다. 

17세기이후 사실주의적화풍이 더욱 강화되였는데 윤두서는 그의 대표작 《말탄 사람》에서 참신한 화면도구와 정확한 묘사에 의하여 말탄 인물의 자세와 표정, 걸어가는 말의 동작을 생동하게 그리였고 리명욱은 《어부와 나무군》에서 하루일을 끝낸 어부와 나무군이 그날에 있은 생확적체험을 다정하게 나누는 인간의 생활감정을 잘 묘사하고있다.

18세기 화가 리상좌는 가장 천대받던 노비신분이였으나 그림재주가 뛰여나 마침내 도화서 화원으로 되였다.

그는 인물화,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작품으로서는 《달밤에 소나무밑을 거닐며》, 《산수도》, 《범》, 《꽃과 새》등을 들수 있다.

 

 

달밤에 소나무밑을 거닐며(리상좌 작)

 

《달밤에 소나무밑을 거닐며》는 달밤경치를 그렸으나 경치 그자체보다도 사시장철 푸르른 소나무, 가파로운 벼랑중턱 바위틈에서 모진 풍상을 이겨내고 억센 자세로 솟아있는 늙은 소나무의 형상을 통하여 화가자신의 불후한 처지와 생활로정 그리고 강의한 의지와 굳센 기상을 묘사하였다.

리암은 꽃과 새를 잘 그렸을뿐아니라 고양이와 강아지, 참새 같은 동물들도 잘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 특징적인것은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 비하여 선과 색갈이 선명하고 표현이 명백하여 민족적인 정서와 명랑하고 락천적인 성격이 화폭에 넘쳐 흐르고있는것이다. 그것을 그의 작품 《고양이와 강아지》 등에서 생동하게 찾아볼수 있다.

신사임당은 재능있는 녀류화가로서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과 풍부한 표현력으로 생활적으로 친근한 장면들을 많이 그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의 그림으로서는 《물오리》, 《기러기》, 《가지》 등이 있다.

김두량은 18세기 전반기의 사실주의화가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도화서에 근무하였는데 그는 인물화와 함께 풍경화, 동물화 등을 많이 그렸다. 실학사상이 퍼지던 력사적시기에 창작활동을 진행한 그는 조국의 아름다움을 민족적정서에 담아 잘 그렸을뿐아니라 당시 농촌생활에서 자기 작품의 주인공들을 찾아냄으로써 18세기 우리 나라 사실주의풍속화의 개척자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대표작은 《소몰이군》(근로하는 농민을 화면에 등장시키고 생동하게 묘사), 《사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의 농촌풍경속에 량반지주와 농민의 생활을 대조적으로 묘사), 《달밤》 등이 있다.

△ 건축

이 시기 건축부문에서도 새로운 발전이 이룩되였다.

임진전쟁후 인민들의 창조적로동에 의하여 전쟁시기에 파괴된 건축물들이 적지않게 복구되였으며 일부 건물들이 새로 건설되였는데 봉건통치배들은 저들의 통치와 향락생활에 필요한 왕궁, 관청, 성을 비롯한 건물들부터 먼저 복구하도록 하였다.

― 17세기에 평양성을 고쳐쌓고 보통문을 비롯한 여러 성문을 보수하였으며 대동문을 1635년에 고쳐지었다.

 

  

 

대동문은 안정감있는 모습, 장쾌한 지붕의 부드러운 물매와 깊숙한 처마, 키높은 배부른 기둥과 간결한 지붕받침을 비롯한 구조적요소들과 류선형으로 다듬은 도리의 부드러운 곡선, 섬세하고 화려한 단청장식, 묵직한 축대에 비해 경쾌하면서도 장중하고 우아한 다락채 등 우리 나라 건축예술의 우수한 민족적형식들을 잘 보여주고있으며 대동강, 련광정과 잘어울려 아름다운 건축미를 나타내고있다.

의주 남문도 17세기 초에 고쳐지은 건축유산이다.

― 이 시기에 경치좋은 명승지들에 여러가지 형태의 루정들이 다시 건설되였다.

16세기에 《관서팔경》의 하나인 의주 통군정을 비롯하여 해주 부용당 등이 건설되였으며 17세기에 평양의 부벽루와 련광정, 강계 인풍루 등이 건설되였다.

 

 

이 가운데서 평양의 이름난 명승지의 하나인 련광정은 우리 나라 루정건축의 전형으로서 전체적인 외관이 듬직하면서도 아담하며 모든 부재들의 처리수법이 섬세하게 되여있어 당시의 높은 루정건축예술의 수준을 잘 보여주고있다. 앞에는 모란봉을 끼고있는데 그 모양이 주위의 자연풍경과 한폭의 그림처럼 잘어울려 예로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불리웠다.

 루정들은 지난날 량반통치배들이 주로 시나 읊고 술놀이를 하는 놀이터로 리용되여왔으며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할 때에는 흔히 군사지휘처로 리용되였다.

― 이 시기에 문묘, 향교, 서원 등 유교관계건물들과 절간과 같은 불교관계건물들이 적지않게 새로 건축되거나 다시 건설되였다.

개성 숭양서원과 벽성 소현서원, 안동 도산서원, 개성 성균관 그리고 금강산 신계사 대웅전과 개성 관음사 대웅전, 금강산 보덕암은 그 대표적인것들이다.

 

 

숭양서원

 

 

 

불교유교관계건축물들은 모두 불교나 유교를 퍼뜨리기 위하여 설계되고 건축된것이므로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날수 없었으며 또 례외없이 봉건통치배들의 계급적지배에 리용되였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근로인민의 재능과 슬기가 깃들어있는것으로 하여 귀중한 건축유산으로 된다.

이처럼 16~18세기 전반기에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문화의 전반내용과 형식에서 많은 변화를 보이며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 시기 모든 문화적재부들은 지배계급의 독점물로 되였으나 그 창조자는 광범한 인민대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