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7세기 국내외정세

 

△ 임진조국전쟁후 나라의 형편

임진조국전쟁에서 우리 인민은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으나 전쟁피해는 막심하였다. 인구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많은 농민들이 방황하였으며 농토가 파괴되고 황페화되였다.

1606년 서울의 인구는 1만 2 965호로서 전쟁전보다 4 000여호나 줄어들었으며 농촌의 심한 파괴로 전후에 전국적으로 밭갈이한 토지는 전쟁전의 31%(170여만결로부터 54만결로 줄어듬)밖에 안되였다.

또한 도시가 파괴되고 문화시설과 문화재들이 파괴략탈당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조선봉건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주요력사서적, 의학서적, 미술작품들, 20여만자나 되는 금속활자를 략탈하였으며 우수한 인쇄기술자들과 도자기기술자들을 랍치하여갔다.

전쟁은 나라의 생산력을 혹심하게 파괴하고 인민들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었을뿐아니라 조선봉건왕조의 사회정치질서에도 적지않은 혼란을 조성하였다.

-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봉건국가의 사회정치질서의 혼란은 신분질서와 관료질서가 혼란된데서 찾아볼수 있다.

16세기 말~17세기에 들어와서 군공을 세우거나 돈 또는 곡식을 봉건국가에 내고 신분을 사서 노비가 량인으로 되거나 량인이 량반으로 되는 현상이 적지않게 나타났다.

한편 준엄한 전쟁시기에 인민의 힘에 의거하지않을수 없었던 통치배들은 싫건 좋건 인민들의 애국적인 거대한 역할을 인정하고 일부 노비들의 신분을 량인으로 만들거나 노비출신이나 첩소생의 의병장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노비들의 《천한》신역을 면제한다는 《면역》 등의 방법으로 그들을 회유하였다.

- 조선봉건국가의 사회정치질서의 혼란은 봉건관료질서의 문란에서도 나타났다.

봉건통치배들은 전쟁시기와 전후시기에 재정이 부족할 때마다 벼슬매매증서인 《공명첩》을 발급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7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심해져 때로는 단번에 2만장의 공명첩이 매매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과정에 착취질서가 더욱 문란해졌다.

- 이 시기 16세기부터 시작된 당파싸움이 더욱 격화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혼란된 사회형편을 수습하고 후금의 대두로 험악해진 대외정세를 풀어나갈 대신 당파싸움만을 일삼고있었다. 이것은 나라의 정치적혼란이 극도에 이르게 하였다.

량반관료들은 이미 전쟁전에 동인, 서인으로 갈라져서 당파싸움을 벌렸는데 전쟁기간에 동인이 다시 북인, 남인으로 갈라지고 또 그후 북인이 대북인, 소북인으로 갈라져서 개싸움을 계속하였다.

1609년에 광해군을 국왕으로 올려앉히는데 성공한 대북파는 광해군을 등에 업고 15년간이나 특권을 행사하였으며 1623년에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당파는 인조를 왕자리에 들여앉히고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당파들은 정책상견해의 차이에서가 아니라 문벌, 학벌관계와 출신지방에 의하여 무원칙하게 야합하여 호상 반목질시하고 비난공격함으로써 반대파를 정권에서 몰아내거나 지어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서로 다른 당파가 밀려나고 밀려드는 과정에 봉건적통치질서는 걷잡을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어갔으며 그것은 나라의 중앙집권력과 국력을 약화시켰을 뿐아니라 인민들에 대한 무질서한 착취와 억압을 심하게 하였다.

- 봉건통치배들은 봉건국가의 재정을 메꾸기 위하여 기본전세외에 별수미, 삼수미, 5결수포를 비롯한 기타 잡다한 명목으로 수탈을 강화하였으며 조세수탈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량전사업을 다시 실시하였다.

그러나 량전사업과정에 량반지주들이 통치질서가 무질서해진 틈을 리용하여 관리들을 위압매수하여 자기 땅을 등록에서 빼거나 토지면적을 줄여서 등록하고 농민들의 땅을 제놈들의 땅으로 만들어버리는 파렴치한 행위가 감행되였다. 결과 농민들에게는 더 큰 조세부담이 들씌워지고 많은 농민들이 땅을 빼앗기게 되였다.

- 이 시기에는 군대제도도 매우 혼란되고 약화되여갔다.

1623년에 집권한 서인당파들이 5위제를 훈련도감과 함께 어영청, 수어청, 금위영 등 5영제로 개편하였으나 그것은 당파적목적을 추구하였을 뿐 외래침략자들을 성과적으로 물리칠수 있도록 꾸려져있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7세기 중엽에도 중앙의 상비무력은 명목상 6 000명에 지나지않았으며 군대기관들은 점차 군포수탈을 위한 관청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러한 형편에서도 실제상 국방력강화대책은 취해지지 않고 나라의 방위력은 날을 따라 약화되여갔다.

- 이무렵 대외정세도 긴장되여갔다.

압록강건너편에 살던 건주위녀진의 추장 누루하치는 명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소자하의 상류 허도하라를 본거지로 하여 점차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그 세력을 전만주로 넓혀나갔다. 이에 기초하여 누루하치는 1616년에 자기를 왕으로 선포하고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이리하여 후금은 조선과 명나라를 위협하는 강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때 명나라는 쇠퇴멸망의 길을 걷고있었다.

대외정세가 이렇듯 복잡한 형편에서 봉건정부는 응당 후금의 있을수 있는 침략에 대처하기 위한 군사적대책을 주동적으로 세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하여 신축성있는 대외정책을 실시해야 하였다.

그러나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사대주의립장으로부터 명나라에 1619년에 1만 3천여명의 원정군을 파견하여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처럼 긴장한 정세속에서도 봉건통치배들은 당파싸움만 일삼으면서 전쟁에 대처하기 위한 방어대책을 취하지않았으므로 우리 인민은 거의 무방비상태속에서 후금의 침입에 맞다들게 되였다.

△ 후금의 침략을 반대한 인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리조시기에 와서도 우리 인민들은 외적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웠습니다. 그러나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방비를 강화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처할 대신에 태평성세만 부르고 안일한 생활에 파묻혀있었습니다.》  

- 후금은 1627년 1월 조선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적들의 침입목적은 조선을 굴복시켜 앞으로 명나라를 침략할 때 있을수 있는 배후타격을 미리 막으며 중국 본토와의 교역이 끊어진 조건에서 조선침공을 통하여 경제적난관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적들은 3만여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을 강점하고 곽산의 릉한산성을 련이어 점령하였다.

적들은 계속 남하하여 안주, 평양을 거쳐 1월 하순에는 평산계선까지 기여들었다.

전쟁초기에 적들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기여들수 있었던것은 그간 봉건통치배들이 전쟁에 대처할 아무러한 준비도 하지않았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애국적인민들은 적들에게 강점당하였거나 적들이 통과한 지역의 이르는곳마다에서 반침략의병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특히 평양, 강서, 룡강인민들과 룡천의 소위포의병부대, 룡골산성의병부대, 선천검산성의 월은봉의병부대를 비롯한 많은 의병부대들은 적들의 기도를 파탄시키고 배후를 차단함으로써 적들에게 군사정치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안기였다.

의병투쟁에 의하여 련속적인 타격을 받은 적들은 남쪽으로 더 기여들지 못하고 평산계선에 머물러선채 부득이 《화의》를 제기해오지않을수 없었다.

3월 초 두 나라사이에는 《화의》가 이루어졌다.

화의내용에는 후금군대가 곧 철수한다는것과 앞으로 조선은 후금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후금이 명나라와 싸우는 경우에 조선은 그 어느쪽에도 가담하지않는다는것 등이 규정되여있었다.

적들은 《화의》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철수하지않고 명나라 모문룡의 군대를 친다는 구실밑에 청천강이북지역에 계속 머물러있으면서 파괴와 략탈을 일삼고있었다.

적들의 침략기도를 알아차린 의병들은 투쟁을 계속 벌리였다.

룡골산성의 정봉수의병대는 4 000여명의 대부대로 복병전술과 야간기습활동을 벌려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주었다.

김우, 리립이 지휘하는 소위포의병대는 교란작전, 포위전을 벌려 수많은 적을 섬멸하고 1 300여명을 포로하였으며 랍치하여간 우리 인민 7 000여명을 구원하였다.

의병들에게서 호된 타격을 받은 적들은 드디여 1627년 8월 침략무력을 걷어가지고 도망치고말았다.

의병들의 용감하고 희생적인 투쟁은 후금의 조선강점야욕을 짓부셔버렸으며 우리 인민들의 반침략투쟁의 력사를 빛나게 장식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을 대신 봉건통치배들은 여전히 당파싸움에만 몰두하면서 나라의 방비대책을 세우지 않고있었다.

그후 후금은 계속 세력을 넓혀 명나라의 료서와 내몽골지방을 빼앗았으며 1636년에는 나라이름을 《청》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명나라에 대한 대규모적인 침공에 앞서 배후의 안전을 보장할 목적으로 또다시 우리 나라에 침입해왔다.

-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태종은 직접 12만명의 대병력을 몰고 불의에 우리 나라에 대한 재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적들은 철산 운암산성에서 애국적군민들의 치렬한 항전에 부딪치게 되자 의주 백마산성에 대한 공격을 단념하고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급해맞은 봉건통치배들은 13일 황급히 왕실과 대신들의 가족들을 강화도로 피하게 한 다음 광주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서울에 기여든 청나라군은 부대를 3개방면으로 출동시켜 주력부대는 왕이 들어간 남한산성을 공격하게 하고 다른 한 부대는 강화도로, 또 한 부대는 각도에서 오는 응원군의 길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적들은 남한산성을 겹겹히 포위하고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남한산성의 애국적군민들은 성에 의거하여 공격해오는 적들을 용감히 물리쳤다.

12월 16일부터 시작된 치렬한 공방전이 1월 말까지 수십일동안 계속되였다.

성안과 성밖은 온통 화살과 총탄, 포탄으로 뒤덮혔고 치렬한 육박전에 의하여 성벽밑에는 적들의 시체가 늘어났다.

이러한 때 강화도가 적들에게 강점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남한산성의 봉건통치배들은 애국적군민들이 결사전을 벌리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제놈들의 안락을 위하여 1637년 1월 30일 적들과 굴욕적인 《화의》를 맺고말았다.

남한산성의 애국적군민들의 용감한 방어전과 평산, 해주, 평양, 성천을 비롯한 각지 의병들의 애국적항전은 결국 통치배들의 배신행위로 하여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화의》에서는 조선봉건정부가 명나라와는 손을 끊고 청나라와 《사대》의 형식으로 국교를 맺는다는것이 약속되였다.

이처럼 봉건통치배들이 굴욕적인 《화의》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자주권이 고수될수 있었던것은 나라와 민족의 영예와 존엄을 영예롭게 고수하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이 있었기때문이였다.

△ 우리 령해의 섬들을 지키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

17세기 말에 이르러 왜적들은 울릉도에 《죽도》, 독도에《송도》라는 이름을 제멋대로 붙이고 이 섬들을 제놈들의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빼앗으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조선의 섬 독도

 

이때 부패한 조선봉건정부의 우의정 민암과 좌의정 목래선 등은 울릉도의 령유권을 포기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안룡복을 비롯한 애국적인민들은 한치의 땅도 끝까지 지키려는 애국심을 안고 완강하게 싸워 이 섬들을 지켜냈다.

안룡복은 경상도 동래사람으로서 수군의 노젓는 능로군이였다.

- 1693년 안룡복은 40여명의 어민들과 울릉도에 이르러 여기에 기여든 일본어선 7척과 맞다들어 섬의 령유권문제를 가지고 격렬한 론쟁을 벌리다가 시비를 가르기 위하여 오끼시마에 가서 도주와 담판하고 또다시 시마네현 태수까지 만나 담판을 벌렸다.

지리적위치와 력사적사실에 기초한 안룡복의 론리정연한 주장에 의하여 궁지에 빠진 태수는 일본관백(막부의 쇼궁)에게까지 제기하였으나 관백도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고 이 섬들을 일본령역이 아니라는 문건을 안룡복에게 주도록 태수에게 지시하지않을수 없었다.그후 왜적들은 안룡복을 구금하고 문건을 빼앗은 다음 위협공갈로 그를 돌려세워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굳센 의지와 애국심은 꺾을수 없었다.

조국으로 돌아온 안룡복은 왜적들의 책동을 폭로하고 봉건정부에 이 두섬을 지키기 위한 대책을 세울것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국가의 승인없이 일본에 갔다왔다는 《죄명》을 들씌워 안룡복을 처형하려고 하였으나 인민들의 강력한 항거에 부딪쳐 처형하지는 못하였다.

그후에도 안룡복은 투쟁을 멈추지않고 1695년 울릉도와 독도에 침입한 왜적들을 내쫓고 시마네현에 가서 태수를 만나 놈들의 책동을 준렬히 규탄하였으며 두섬의 령유권을 견결히 주장하여 싸웠다.

이처럼 안룡복을 비롯한 애국적인민들의 투쟁에 의하여 두섬은 왜적들의 침해로부터 수호되였다.

이와 같이 17세기에도 우리 인민은 임진조국전쟁의 피해가 채 가셔지지 않은 어려운 속에서도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줄기차게 벌려 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굳건히 수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