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함길도농민전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착취와 압박이 있는곳에서는 반드시 인민들의 혁명투쟁이 일어나는 법이며 압제자들의 폭압이 강화될수록 그에 항거하는 인민들의 투쟁은 더욱 조직화되고 완강하여지는 법입니다.》

리시애의 반란으로 시작된 농민전쟁은 1467년 5월 10일부터 8월까지사이에 진행되였다.

△ 리시애의 반란(李施愛之亂)

리시애일파는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467년 5월 10일 밤 리시애일파는 함길도일대를 돌아보다가 길주에 머무른 함길도절도사 강효문과 그와 동행한 북평사, 부령부사 등 10여명을 처단하였으며 길주목사 설정신도 잡아죽이고 길주를 점령하였다.

반란자들은 각 고을들에 련락하여 자기 고을의 남도출신 량반들을 처단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함길도 21개 고을중 남쪽의 7개현을 제외한 고을들을 모두 차지하게 되였다.

반란은 삽시에 함길도 전지역을 휩쓸었다.

 △ 농민전쟁으로 전환

리시애의 반란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계기로 함길도농민들이 각지에서 들고일어나 관청들을 점거하고 남도출신관료들인 고을원들과 기타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함길도농민들은 고원이북의 전지역을 장악하였다.

농민군은 2만여명을 3개부대로 편성하였다. 이때 편성된 농민군의 대부분은 평소에 국가병역에 복무하던 군인들이였던만큼 그들의 군사행동은 매우 민활하였고 또 대규모적인것으로 될수 있었다.

그들은 무장들을 갖추고 크게 3개 부대로 전투서렬을 편성하였으며 5월 하순경 홍원계선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리시애를 중심으로 한 함길도토호들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된 각 고을 농민들의 폭동은 곧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대규모적인 농민전쟁으로 전환되였다.

△ 농민전쟁과정

- 함길도농민전쟁이 터지자 봉건통치배들은 농민전쟁탄압에 미쳐날뛰였다.

봉건통치배들은 황급히 《토벌군》3만명과 구성군 리준을 병마도총사로 임명하여 5월 17일 함길도로 파견하여 농민군을 진압하게 하는 한편 다른 지방에서 그와 같은 폭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긴급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의 위력에 겁을 먹은 《토벌군》은 강원도 회양에서 머뭇거리다가 6월 초에야 겨우 밀려들기 시작하여 6월 중순에 함흥에 이르렀다.

- 6월 하순 농민군은 리원에서 북청방향으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6월 하순경에 북청에서 농민군과 《토벌군》사이에 치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였다. 

6월 24일 새벽 농민군은 《토벌군》이 차지한 북청성에 10여차에 걸치는 맹렬한 공격을 가함으로써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농민군은 성안에 불화살을 쏘고 불덩이를 던졌으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질러 기세를 올리면서 강력한 공격을 들이댔다. 특히 북청성의 남쪽진지가 약한것을 간파하고 여기에 력량을 집중하여 공격을 들이대였다.

농민군은 《토벌군》과의 첫 전투인 북청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호되게 얻어맞은 적들은 농민군과 《화의》를 맺고 홍원쪽으로 도주하였다.

농민군은 리시애를 비롯한 지휘층의 동요로 하여 거둔 성과를 확대공고화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농민군이 《토벌군》에 대한 추격전을 계속 벌려야 하겠으나 농민군의 일부만 북청에 남겨두고 주력은 리원으로 퇴각하여 함길도출신인물로 고을원을 임명해주면 전쟁은 곧 끝날것이라고 하면서 봉건정부와 화의를 맺은데 있었다.

농민군지휘부의 약점을 간파한 적들은 그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발악적공세로 나왔다.

7월 하순에 《토벌군》은 력량을 수습해가지고 2만여명의 병력으로 북청을 공격하였다. 그때 그곳을 지키고있던 농민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지휘층안에 들어앉아있던 토호들의 우유부단성으로 하여 대무력과 5만여섬의 군량을 가지고있으면서도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북청읍을 내주고 퇴각하였다. 이것은 농민군지휘성원들의 돌이킬수 없는 실책이였다.

이때 《토벌군》은 이르는곳마다에서 인민들의 재산을 략탈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으며 갖은 악독한 방법으로 농민들을 학살하였다.

- 북쪽으로 퇴각하던 농민군은 8월 초에 북청에서 리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만령에 진을 치고 《토벌군》의 진격을 저지시키려고 하였다. 

리원에 주둔하고있던 리시애가 지휘한 농민군의 주력부대도 만령으로 옮겨와 진을 쳤다. 이리하여 8월 초에 만령방어전투가 벌어졌다. 만령은 농민군과 《토벌군》사이의 결전장으로 되였다. 농민군과 《토벌군》의 전부가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만령전투(상상도)

 

이때 만령을 차지한 농민군 약 5 000명은 남쪽은 바다가로부터 북쪽은 태백산에 이르는 15리구간에 걸쳐 진을 치고 적들을 기다리고있었다. 그 가운데서 주력군은 만령을 중심으로 건자(함경남도 북청군의 동부 조선동해바다가에 있는 지역)쪽에서 라흥에 이르는 10여리의 바다가에 진을 치고있었다.

《토벌군》은 농민군이 진을 친 산아래에서 산기슭을 따라 기여올랐다. 농민군은 용감히 싸워 고개로 기여오르는 《토벌군》을 여러차례에 걸쳐 물리쳤다. 그들은 총통으로 포탄과 화살을 퍼붓고 큰 나무와 돌을 굴리면서 《토벌군》을 족쳤다. 농민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토벌군》은 산으로 기여오를수 없었다.

전면공격이 실패하자 토벌군은  우회공격을 시도하였다. 토벌군의 한 부대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에돌아 벼랑으로 기여올라 농민군의 배후에 나타났다. 동시에 적의 대부대가 령아래로부터 기여오르면서 불의에 협공하였다.  농민군은 이 위급한 때에도 용감히 싸웠다.

《토벌군》은 농민군이 차지한 산꼭대기까지 접근하여 그들의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농민군은 부득불 다음 봉우리에로 진지를 옮기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 농민군의 손실은 적지않았다. 

적들은 농민군을 뒤따라 기여들었으나 만령에서 된매를 얻어맞은 탓으로 겁에 질려 공격을 계속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있었다.

《토벌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 불의의 협공작전으로 나왔다. 곤경에 부닥친 농민군은 결사적으로 용감하게 싸웠으나 그곳을 끝까지 고수해내지 못하고 퇴각하게 되였다.

만령전투에서 퇴각한 후 지휘층에 기여들었던 토호들은 《토벌군》에 투항하거나 도망쳐버렸으며 그를 계기로 농민군들도 흩어져버렸다. 농민군을 지휘하던 리시애와 그 일파는 전쟁기간 계속 동요하면서 농민군부대들의 전투성과의 확대를 저애하였고 어려운 정황이 조성되자 퇴각하던 도중 배신자들에게 체포되여 처형당하였다. 이렇게 3개월간에 걸쳐 함길도의 거의 전지역에 타번졌던 농민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 함길도농민전쟁은 여러가지 원인에 의하여 실패하였다.

그 원인은  지난 시기의 농민전쟁이 다 그러하듯이 봉건적예속에서 벗어나려는 농민들의 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수 있는 옳은 지도를 받지 못한것, 농민군지휘성원들의 전술적착오, 토호출신지휘관들의 량면성과 동요성에 있었다.

그러므로 함길도지방 농민들은 가혹한 봉건적억압과 착취를 반대하여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빈궁의 근원이 다만 자기들을 직접 억업착취하는 지방관들의 횡포성에 있는것으로만 생각하였다. 그렇기때문에 함흥 이남의 농민들과 같이 자기 고을원들을 처단하고는 투쟁에서 승리한것으로 생각하고 제각기 흩어져버리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홍원 이북의 농민들과 같이 잘 싸우다가도 자기 고을이 《토벌군》에게 장악되고 왕의 기만적인 회유가 있기만 하면 대렬에서 떨어져 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적지않았다.

농민군지휘성원들로 말하면 그들은 대부분 토호출신으로서 처음부터 농민들의 계급적리익을 대변하여 전쟁을 일으킨것이 아니라 일이 잘되면 봉건국가의 중앙정권에 참가할수 있을것이고 잘 안되는 경우에는 함길도지방에서만이라도 저들의 정치경제적지위와 권력을 확보해보려는 투기적목적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립장이 견결하지 못하였고 량면성과 동요성을 나타냈으며 타협을 하거나 투항주의적행동을 하였다. 농민군지휘부에는 탐위주의적기분에서 투기적으로 기여든 배신자들이 적지않았다.

일부 토호출신지휘성원들의 배신행위에 의하여 만령전투이후 농민군이 퇴각하여 단천 북대천가에 주둔하였을 때에도 전 부대가 와해되였고 그후 농민군의 중요지휘성원들 거의 모두가 체포되여 《토벌군》에 넘겨졌다.

농민군은 여러 전투들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하여야 하였으나 전쟁초기 함길도지방에 발을 들여놓은 《토벌군》의 공격이 두려워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만령전투의 경우에도 처음부터 방어전으로 맞섬으로써 실패를 면할수 없게 되였다.

- 1467년 함경도농민전쟁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그것은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력사에서 큰 의의를 가지였다.

그 의의는 첫째로, 농민전쟁을 통하여 인민들의 투쟁의식과 그 능력이 장성해가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었으며 농민들의 자주적요구를 어느 정도 실현할수 있은것이다.

농민전쟁은 중앙집권적봉건체제의 탄압밑에서도 대규모적인 투쟁을 벌려 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미미한것이는 하였으나 농민들에게 일련의 양보정책을 실시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농민들의 투쟁에 당황한 나머지 전쟁직후 그 지방의 신세포를 페지하였고 또 그해 전세와 부역, 공물 등을 《면제》하기로 선포하였으며 그 지방에 대한 량전과 군액확장도 얼마간 연기하였다.

물론 이것들은 매우 교활하고 기만적이기는 하였으나 농민들이 자기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에서 거둔 열매였던것이다.

의의는 둘째로, 전국 농민들에게 봉건적착취와 억압을 반대하여 싸울 투쟁의욕을 높여주고 농민들의 투쟁규모를 더욱 확대발전시킨것이다.

함길도농민전쟁을 통하여 농민들의 투쟁은 더욱 세차게 그리고 대중적규모로 전국각지에 퍼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15세기 70년대, 80년대까지 전라도, 황해도를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큰 규모의 농민폭동들이 계속 벌어졌다. 함길도지방 인민들도 계속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여 투쟁을 벌렸다. 

이와 같이 봉건통치배들이 《태평세월》이라고 하던 15세기에 인민들의 반봉건투쟁은 대규모로 끊임없이 벌어졌으며 그러한 투쟁을 통하여 사회는 한걸음한걸음 발전하여나갔다.

 

복습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