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학과 예술

 

1) 문학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생활을 진실하고 풍부하게 그려내는것은 문학과 예술의 본성으로부터 제기되는 기본요구이다.》

고려시기 문학은 시대적특징을 반영하면서 주제사상적내용과 예술형식에 있어서 많은 변화발전을 가져왔다.

이 시기 문학에서는 반침략애국주의주제의 작품들과 현실비판주제의 작품들,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묘사한 작품들뿐아니라 패설과 의인전기체라는 새로운 문학형식이 발생발전한것이 특징이다.

- 반침략애국주의주제의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였다.

반침략애국주의주제의 작품들가운데서 대표적인것은 인민창작의 설화 《설죽화》, 《박서장군》, 고조기의 서정시 《싸움터의 님에게》, 정추의 《개구리소리에 잠 못이루어》 등을 들수 있다.

《설죽화》의 내용을 보면 제2차 반거란전쟁에서 설죽화의 아버지가 전사한다.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고 10대 소녀의 몸으로 무예를 익혀나간다. 아들을 싸움터에서 잃은 할아버지는 손녀마저 잃을수 있다고 하면서 결혼을 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설죽화와 그의 어머니는 애국의 한마음을 안고 집을 뛰쳐나오며 제3차 반거란전쟁이 시작되자 설죽화는 남자의복차림으로 강감찬장군을 따라 싸움터에 나선다. 1019년 2월 구주싸움때 소년선봉장이 된 설죽화는 고려군의 선두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다.

작품은 당시 봉건제도를 리상화한 제한성도 있지만 나어린 설죽화의 형상을 통하여 고려인민들의 강한 애국심과 용감한 모습을 생동하게 펼쳐보이고있다.

- 현실비판주제의 작품들도 창작되였다.

12세기 이후 설화 《부역군의 안해》, 시 《지루한 장마비》, 민요 《해종일 밭갈아도》, 참요 《보현사》 등이, 13~14세기 참요 《묵책요》, 《아가야》, 《우대우》, 《사리화》 등이 대표적이다.

14세기 전반기에 창작된 참요 《묵책요》에서는 봉건통치배들의 부패한 정사를 폭로하였으며 《사리화》에서는 봉건통치배들을 참새새끼에 비유하여 폭로비판하였다.

- 고려에서는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형상한 작품들도 많이 창작되였다.

10~12세기의 작품들가운데는 평양과 관련한 시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지은 미완성시와 정지상이 지은 시 《평양》, 《대동강》 등을 들수 있다.

13~14세기 가요도 도시서민들속에서 창작되였는데 《서경별곡》, 《청산별곡》, 《동동》, 《사모곡》 등이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은 봉건륜리도덕의 구속밑에서 당하는 불우한 처지와 현실에 대한 불만을 노래하였다.

- 13~14세기에 랑만주의적시작품들도 많이 창작되였다.

당시 랑만주의적시가문학창작에서 주류를 이룬것은 《해좌 7현》(리인로, 림춘, 오세재, 리담지, 황보한, 조통, 함순)이라고 불리우던 시인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이였다.

《해좌 7현》은 1170년 무신정변이후 박해를 받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숨어살면서 작품을 썼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웠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리인로의 《갈길 험해라》, 김극기의 《취해서 부른 노래》, 림춘의 《벗에게》, 오세재의 《눈을 밟으며》 등이다.

작품들에서는 《산에 올라 범의 수염 만지지 말고》 등의 랑만주의적표현을 쓰면서 정권을 빼앗은 무신집권자들에 대한 불평불만을 노래하고있다.

- 장편서사시와 사실주의시작품도 창작되였다.

장편서사시 《동명왕편》(리규보)과 사실주의적시작품인 김극기의 《농사집의 네계절》, 정이오의 《무풍현에서》, 홍간의 《가난한 녀인의 노래》, 정추의 《탐관오리》, 《개구리소리에 잠 못이루어》, 리달충의 《신돈을 풍자하여》, 김룡집의 《백성의 피로 물든 관복》, 리규보의 《농사군이 맑은 술과 흰쌀밥먹기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햇곡식의 노래》, 《농부를 대신하여》 등이 대표적이다.

작품들에서는 우리 나라가 성인의 나라임을 자랑하였고 봉건통치배들의 탐욕성과 부패성을 폭로비판하였다.

특히 리규보는 1만편에 달하는 시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 13~14세기 산문분야에서는 패설과 의인전기체라는 새로운 문학형식이 발생발전하였다.

패설이라는 말은 원래 일정한 격식이 없이 작가가 보고 듣고 느낀점들을 이야기식으로 그때그때 적어놓은 《자질구레한 이야기》, 《하찮은 이야기》라는 뜻으로 쓰인것이다. 패설은 어디까지나 생활을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보여주려는데로부터 발생한 종합적성격을 가진 새로운 산문형식이다.

거기에는 시이야기, 일화, 설화, 풍속 등 여러가지 내용과 형식으로 된 짤막한 산문들이 포함되여있다.

패설작품으로는 리인로의 《파한집》, 리규보의 《백운소설》, 최자의 《보한집》, 리제현의 《력응패설》 등이 있다. 패설들은 당시 일반사회생활과 풍속 등을 보여주는것들이 많다.

의인전기체형식으로 된 소설작품으로는 림춘의 《국순전》, 《공방전》, 리규보의 《청강사자현부전》, 리첨의 《저생전》 등이다. 이 작품들은 어떤 사물을 의인화하고 의인화된 대상의 전기를 서술하는 형식으로 전개하였다. 《청강사자현부전》에서는 거부기를 의인화하여 세력을 뽐내는 오만한자를 폭로하였다.

13~14세기에 문학유산들에 대한 수집편찬사업도 진행되였다.

개인문집으로는 리규보의 《동국리상국집》 53권, 리색의 《목은집》 55권이 편찬되였다. 그리고 김태현은 1320년까지의 시와 산문을 종합하여 《동국문감》을, 최해는 1388년 《동인지문》을, 조은흘은 《삼한시구감》이라는 시집을 편찬하였다. 이 책들은 계급적제한성으로 하여 근로인민대중이 창작한 구전문학에는 주의를 덜 돌리고 주로 량반문인들이 지어놓은 한시들을 담고있다.

2) 음악과 무용

△ 음악

- 고려시기 음악발전에서 새로운것은 인민적인 음악인 민요와 참요, 가곡들이 창작된것이다.

10~12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배군이나 어부들의 생활을 노래한 민요 《노젓는 노래》, 《고기잡이노래》와 봉건통치배들의 죄행과 부패상을 풍자조소한 참요 《보현사》를 들수 있다. 이 작품들은 당시 인민들의 부지런한 일솜씨와 락천적인 기질, 봉건통치배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엿볼수 있게 한다.

13~14세기 대표작으로는 《그리운 님》, 《사리화》, 《수정사》, 《장암》 등을 들수 있다. 이 작품들은 인민들의 생활감정을 반영한 참요와 민요로서 그대로 노래가 되여 널리 불리워졌다. 또한 안팎의 원쑤들을 반대하는 굳센 투지와 조국과 향토, 가족들을 사랑하는 인민들의 아름다운 감정을 담은 노래들이였다.

도시가요도 창작되였다. 도시가요란 주로 남녀간의 애정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도시가요가운데서 지금까지 선률이 잘 알려진것은 《만전춘》과 《서경별곡》이다. 이 악곡들은 정열적이면서도 깊은 사색을 자아내게 하는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이 시기 선비들에 의하여 시조음악이 발전하였는데 시조는 긴장한 맛이 없고 느리며 한가로운 음조로 되여있었다. 몇자 안되는 그 짧은 시조가사가 노래로 불리울 때에 3분이나 걸린다는것은 음악조가 얼마나 느리였는가를 잘 말하여준다.

- 고려시기에는 직업적인 궁중음악도 발전하였다.

고려봉건통치배들은 저들의 지배권의 강화와 궁중에서의 제사, 연회를 위하여 궁중음악의 발전을 적극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음악관청인 《태악서》, 《관현방》들에는 궁중음악에 복무하는 직업적인 가무단과 관현악단을 두었다.

- 고려시기에는 기악도 발전하였다.

고려전반기 기악발전에서 특징적인것의 하나는 이 시기에 이전에 보기드문 큰 규모의 관현악단이 조직운영된 사실이다. 12세기 초에 조직된 관현악단에는 악공만 해도 108명이 있었고 거기에서 사용된 악기로서 기록에 전하는것은 약 40종에 달하였다. 고려후반기에 연주와 반주에 리용된 악기로는 가야금, 피리, 저대, 퉁소 그리고 장고 등 수십종이나 되였다. 이 가운데서 대부분의 악기들은 이전부터 내려오던 악기이고 퉁소가 고려시기에 처음 보이는 악기이다.

고려에서는 대연주회가 진행되기도 하였는데 1245년 5월 림시수도였던 강화도에서는 1 350명이 관현악을 연주하였다.

△  무용

고려시기 음악과 함께 무용도 크게 발전하였다.

이 시기 무용예술의 특징은 인민창작무용의 내용과 형식이 앞선 시기에 비하여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것이다.

고려시기 인민창작무용으로서 오늘까지 전하는것은 평안남도 숙천군에서 발굴된 《통덕진출진무》가 있다. 이 무용은 군사들과 인민들이 출전을 앞두고 군사적위력을 시위하며 단합된 힘으로 외적을 무찌르는 애국적기상을 반영하고있는 군무이다. 이 군무는 적이 허세를 부리는 장면, 고려군사가 창으로 적군의 머리를 찔러올리는 장면, 군사와 인민이 승리를 서로 축하하는 장면 등으로 구성되여있다. 이 춤은 고려인민들의 전투적기백과 용감성을 보여주고있다.

또한 고려인민들이 창작하고 즐긴 대표적인 춤은 《조천무》, 《처용무》, 《무애무》 등이였다. 이 춤들은 인민들속에서 창작된 군사무용으로서 밭갈고 씨뿌리면서 평화로운 로동을 하던 인민들이 외적의 침략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남자들은 칼을, 녀자들은 활을 들고 용감히 싸워 침략자들을 격멸하는 모습을 형상하였다.

이밖에 《북춤》, 《동동춤》 등이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가무예술이 새롭게 발전하여 극적내용을 담은 무용예술인 《산대잡극》 등이 창작되여 공연되였다.

《산대잡극》은 일정한 무대에 풍을 치고 여러가지 공연을 하는 놀이였다. 이 《산대잡극》은 산대라는 독특한 무대장치에다가 무용을 포함한 여러가지 가무, 교예, 연극적인것들이 결합된 종합예술이였다.

그러나 고려시기의 음악무용은 왕권을 옹호하기 위한데 복무한 본질적제한성으로 하여 인민들의 정서와 예술적재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였다.

3) 건축, 조각과 그림, 공예

고려에서는 건축과 조각, 그림과 공예분야에서도 일정한 발전이 있었다.

△ 건축

건축에서는 도성건축, 왕궁건축, 절간건축, 탑건축, 무덤건축이 기본이였다.

- 수도성건설을 하였다.

 

 

개성성 평면도

 

둘레는 23㎞로서 궁성, 황성, 내성, 외성으로 나누어 건설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평양성건설경험을 계승한것이였다.

- 왕궁건축물로서 지금까지 남아있는것은 없고 그 터들만 있다.

 

 

만월대 (복원도) 

 

개성 만월대의 왕궁터는 송악산기슭 양지바른 언덕우에 자리잡고 남북축을 길게 설정하여 주요건물들을 배치한것으로서 당시 왕궁의 방대한 규모와 웅장함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묘청의 정변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길것을 계획하고 건설한 대화궁이 있다. 대화궁은 평양시 룡성구역에 있는데 이러한 왕궁들은 고구려 안학궁의 건물배치형식을 그대로 계승한것이였다.

- 고려에서는 불교가 국교이므로 수많은 절간들을 건설하였는데 개경에는 무려 70여개의 절간들이 있었다.

1067년에 건설된 흥왕사는 2 800간이나 되였으며 보제사의 건물은 규모에 있어서 궁전을 릉가할만큼 큰것이였다. 오늘까지 전하는 고려전반기 절간건축유산으로 경상북도 영주군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있다.

무량수전은 12세기경에 건축된것으로서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목조건물로서는 가장 오랜것이다. 이 건물의 지붕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날아갈듯 한 학의 모양으로 경쾌하게 들리였으며 기둥은 배가 부르게 되여있어 미관과 안정감을 높여주고있다.

양주(경기도) 화엄사도 262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건물이였다.

 

 

오늘까지 남아있는 고려후반기의 목조건물로서는 10여개가 있다. 그 가운데서 사리원 성불사 웅진전(1327년), 평양 숭인전(1325년), 황해북도 연탄 심원사 보광전(1374년),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 조사전(1377년) 등이 대표적인 건물들이다.

고려의 건축가들은 건물의 형식과 규모에 알맞게 건축구조, 조각, 단청을 처리함으로써 민족적인 아름다운 조형미를 한층 돋구었다.

- 고려시기에는 탑건축이 활발하게 진행되였다.

고려의 돌탑가운데는 전시기에 볼수 없었던 독특한 형식들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탑의 층수가 7층, 9층, 13층으로 높아진것이고 또 그전에는 주로 방형이였던 탑몸이 6각, 8각 등 다각탑으로 된것이다. 그리고 기단과 탑몸에 여러가지 무늬가 새겨져 장식적효과가 더욱 높아졌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탑으로는 고려전반기의 개성 불일사 5층탑(951년), 개성 현화사 7층탑(1020년), 묘향산 보현사 9층탑(1044년) 등을 들수 있으며 고려후반기의 강원도 평창 월정사 대리석다층탑을 들수 있다.

중세 우리 나라의 탑에서 특이한 자리를 차지하는 보현사 대웅전마당에 세운 8각13층탑은 굳은 화강석을 마치 나무를 다듬듯이 섬세하게 다듬어 쌓기도 잘하고 장식도 잘하였다. 또한 월정사탑은 높이가 약 15m로서 고려의 8각탑가운데서 제일 높은것으로 꼽힌다. 경천사 대리석다층탑은 고려의 탑들가운데서 가장 복잡하고 화려한 형태미를 가진 우수한 탑의 하나이다.

- 고려시기 무덤건축도 발전하였는데 대표적인것은 왕건왕릉이다.

 

 

왕건왕릉은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돌칸흙무덤이다.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왕건왕릉이 훌륭하게 개건확장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81(1992)년 5월 5일 왕건왕릉을 찾으시여 왕릉을 잘 꾸리고 주변에 나무도 많이 심어 릉의 품격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이후에도 왕건왕릉을 꾸리는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차례에 걸쳐 강령적인 교시를 주시였으며 개건형성안도 보아주시면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943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왕건왕릉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주체83(1994)년에 훌륭히 개건되여 민족의 력사를 자랑하게 되였다.

주체85(1996)년 3월 새로 개건된 고려태조 왕건왕릉을 찾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왕릉이 훌륭하게 개건되였다고 하시면서 그 보존관리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주시였다.

왕건왕릉은 송악산의 가지줄기가 뻗어내려온 만수산의 나지막한 등성이우에 자리잡고있다. 릉문앞의 한옆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친필이 새겨진 고려태조 왕건왕릉개건비가 정중히 세워져있다. 이 비의 후면에는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탁월한 령도업적을 칭송한 헌시가 새겨져있다.

왕릉은 12지상을 형상한 병풍들을 12각으로 돌려 세워 기단을 이루도록 하였는데 직경은 19m이고 높이는 8m이다.

그리고 왕릉주위에 상돌, 4개의 범조각상, 망주석, 석등, 8명의 문무관상, 제당, 비각, 릉문, 개건비 등이 있다.

이처럼 왕건왕릉은 첫 통일국가의 시조릉답게 훌륭히 꾸려져 고려의 위용을 잘 보여주고있다.

△ 조각과 공예

- 조각

• 조각에서는 불상조각이 위주로 되여있었다.

불상조각으로 우수한것은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에서 나온 순금부처(10세기초) , 개성 관음사의 대리석관음상, 개성 적조사의 철조여래상 등이 있다. 야외에 있는 조각으로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의 묘길상과 삼불암조각, 충청남도 론산군의 관촉사 미륵불상 등을 대표적으로 들수 있다. 관촉사 미륵불상은 968년부터 38년간에 걸쳐 완성한 높이 18.12m에 달하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조각품이다.

이러한 불상들은 봉건통치배들이 인민들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고 불교를 장려하고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만들어놓은것들이였다.

• 이 시기 뛰여난 조각적기교는 공민왕무덤의 무인상과 문인상에서 찾아볼수 있다.

 

 

무관상과 문인상

 

왕무덤앞에 4상씩 서있는 문무관조각은 칼을 두손으로 짚고 다리를 약간 벌린채 굳건히 서있는 태연한 모습으로 형상되였는데 거기에는 고려인민들과 군인들의 용감한 기상과 굳건한 기개가 잘 나타나있다.

• 장식조각은 탑과 부도, 비돌 등에 많이 적용되였다. 현화사 7층탑의 지붕돌과 탑몸에 새긴 여러가지 무늬조각, 만월대에서 나온 룡대가리들은 이 시기의 우수한 장식조각술을 보여준다.

- 공예

공예에서는 자기, 금속, 초물공예들이 한걸음 발전하였다.

• 고려의 도자기공예는 전반기의 푸른자기와 무늬박이자기부터 후반기의 흰자기에 이르기까지 그 기술이 계속 이어지면서 높이 발전하였다.

 

 

고려의 도자기공예는 색과 문양이 특출한 높은 예술성으로 하여 고려미술을 대표하였고 고려의 명성을 세계에 더욱 떨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13세기 이후에는 조각적인 장식수법보다 붓으로 여러가지 무늬를 그려 장식하는 회화적수법이 더 널리 보급되였다.

그리고 고려후반기에는 흰자기, 황금자기, 검은자기 등을 많이 만들었는데 특히 금가루를 가지고 푸른자기에 무늬를 그리거나 무늬박이를 한 여백에다 금물을 칠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황금자기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다.

• 고려시기에 금속공예도 높이 발전하였는데 종, 향로, 주전자, 물병류, 청동거울 등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고려종은 전시기와 같은 양식을 가졌으나 겉모양이 장중하며 치레가 많은것이 특징이다. 11세기에 만든 천흥사종과 룡주사종은 그 장중한 형태와 류선형으로 흐른 곡선미, 기발한 룡조각, 종아가리와 어깨통의 탐스러운 보상화넝쿨무늬, 비천무늬 등 세부처리에서 우리 나라의 고유한 종형식과 치레수법을 가진 대표적인 고려종이다.

또한 오늘 개성남대문 다락우에 걸려있는 연복사종(1346년)은 주조공예의 높은 발전수준을 보여준다. 무게가 약 14t이나 되는 이 종의 몸 전체면에는 거부기, 게, 물고기, 룡, 봉황새 등이 장식되였고 맨 꼭대기에는 종을 걸수 있게 만든 두마리의 룡트림고리가 붙어있는데 그것들은 힘차고 용맹스럽게 조각되였다.

금속공예품에서도 표면에 무늬를 홈으로 파고 여기에 금실, 은실을 박아넣어 치레하는 금은실박이(입사)수법이 널리 도입되였다. 그 대표적인것으로는 청동호수가을풍경무늬 금실박이정병을 들수 있다.

향로로서는 금강산 신계사향로, 강릉건봉사향로를 비롯한 오동(검은동)향로들이 고려인민의 공예적솜씨와 당시 금은실박이수법의 발전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향로와 함께 장풍군 장좌리에서 나온 청동화로에도 이 시기 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이 반영되여있다. 화로의 둥근 웃부분의 직경은 113cm이며 깊이는 14cm, 높이는 39.1cm이다. 여기서 화로의 다리부분에 새긴 조각은 범의 용맹스럽고 날랜 특성을 자연스러운 수법으로 집약화하여 잘 형상하였다.

△ 그림

고려시기 그림에서는 풍경그림, 인물그림, 동물그림, 벽화들이 주되는 자리를 차지한다.

- 이 시기 그림에서 새롭게 발전한것은 풍경화였다.

12세기에 활동한 이름있는 풍경화가는 리녕이였다. 그가 그린 《례성강도》는 당시 국제무역항으로 번창하던 벽란도를 중심으로 례성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높은 기교로 형상하였다. 리녕은 송나라 화가들에게 자기의 특출한 회화기법을 가르쳐주어 그 나라 풍경과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오늘 남아있는 풍경화로서는 왕전(공민왕)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사냥》(천산대렵도)의 일부분이 있는데 이 그림은 산과 들에서 말타고 사냥하는 장면을 진한 색갈로 묘사한 그림으로서 당시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 동물화로서는 11세기의 이름난 화가인 정득공의 그림이 유명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잉어》그림이 있다.

- 고려전반기의 무덤벽화들에 보이는 비천그림들도 우수한 회화작품으로 알려진 그림들이다. 고려의 비천그림은 전시기의것과는 달리 보다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그릇을 들고 꽃을 뿌리며 날아가는 선녀의 모습을 그린것이다. 이 벽화그림은 색채가 사실적으로 처리되고 부드러운 옷자락의 질감과 운동감이 생동하게 묘사되여있다.

- 이 시기 불교그림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것은 라응의 초상과 《관음도》를 들수 있다. 오늘 일본에는 13~14세기에 해당하는 우리 나라의 불교관계의 그림이 수십점이나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예술적으로 으뜸가는것은 혜허가 그린 《관음도》이다. 길이 142cm되는 이 그림은 섬세한 먹선으로 형태를 그린 다음 여러가지 색을 화려하게 입히고 옷주름과 얼굴은 검밝기표현법을 적용하여 립체감을 잘 나타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선다름새와 금분까지 쓴 화려한 채색 등 그 회화적기교는 이 시기 고려미술의 높은 발전수준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 불교그림들은 환상적인 인물들을 그렸기때문에 현실세계의 산 인간들을 실제적인 섬세한 감정과 모습을 화면에 그대로 전달하지 못하였다.

고려후반기 벽화들로서는 공민왕무덤벽화, 개성 수락동무덤의 사신도와 12지신상, 영주 부석사 조사전 벽의 보살상과 사천왕상 등이 있다. 이 벽화들은 그다지 우수하지는 못하나 당시의 그림발전의 일정한 수준을 보여준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처럼 고려시기 그림작품들은 얼마 되지 않으나 이 시기 그림의 발전수준을 보여주며 거기에 반영된 시대적 및 민족적특성을 찾아볼수 있게 한다.

 

복습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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