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과학과 기술

 

뛰여난 슬기와 재능을 가진 고려인민은 이 시기 과학적창조와 발명으로써 인류문화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 과학

고려에서는 천문기상학과 지리학, 의학, 력사편찬 등 과학분야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였다.

△ 천문학과 기상학의 발전

고려에는 초기부터 태복감과 태사국(서운관)이라는 전문적인 천문기상관측기관들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천문기상관측, 력서편찬, 시간측정 등을 전문적으로 맡아보았다.

이것은 고려시기의 천문기상학이 높은 수준에서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고려에서는 천문대(첨성대)를 세우고 천체현상을 정상적으로 관측기록하였다.

 

 

천문기상학의 발전은 상세한 관측자료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천문학자들과 서운관에서는 해와 달, 별들의 움직임과 기상현상들을 체계적으로 관측하였는데 그 정확도가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이였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태양의 흑점을 체계적으로 관측한것이다. 《고려사》천문지에는 1105년부터 시작하여 고려말까지의 기간에 관측한 53건의 태양흑점에 관한 기록이 실려있다. 이 기록들을 보면 대체로 9년, 11년, 12년, 14년의 간격을 두고있는데 현대천문학사에서 극대, 극소주기를 대체로 11년으로 잡고있는것과 거의 일치하다. 흑점의 크기도 닭알, 복숭아, 배 등에 비겨 서로 다르게 관측하였다. 또한 1370년부터 4년간에 걸쳐 관측한 태양흑점자료가 인정되고있다.

13~14세기에는 9차례에 걸쳐 태양흑점을 관측하고 기록에 남겼다.

특히 1358년 12월 1일 고려천문학자들이 예측한 바로 그 시간에 일식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당시 고려천문학의 발전면모를 잘 보여주고있다.

고려시기에 계속된 기상천문관측사업은 매우 세밀하였으며 이 과정에 보다 합리적인 력서를 만들었고 력법계산을 보다 정밀하게 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되였다.

천문학자 강보는 력법계산에 필요한 수표들을 만들어서 묶어놓은 《수시력첩법립성》을 편찬하여 1343년에 출판하였다. 이 책은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는 천문학관계책들가운데서 가장 오랜것이다. 이밖에도 1218년 김덕명이 편찬한 새로운 력서 그리고 《고려일력》 등이 있었으나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고려시기 기상학에서도 일정한 발전이 있었는데 강우량, 이상기후현상 등 기상현상에 대해서도 세밀히 관측하였다.

특징적인것은 기상현상들에 대한 량적인 측정에 주의를 돌린것이다. 즉 비가 내리는 량, 우박의 크기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례하면 1225년 5월 정축일에 《큰 비가 이틀동안 왔는데 평지에서 물의 깊이가 7~8자나 되였다.》고 씌여있다.

△ 지리학과 의학의 발전

- 고려시기 자연지리적인 조사와 그 기록사업이 진행되였다.

실례로 1002년 6월과 1007년 10월에 제주도에서 화산이 분출하였을 때 중앙에서 지리전문가들을 현지에 보내여 조사하게 하였다.

지리학의 발전은 지도제작과 지리책의 편찬을 통하여서도 잘 알수 있다.

당시의 지도로서는 《고려지리도》(1002년),《고려지도》(1148년)가 편찬되였다.

그리고 대외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그 편의를 위하여 12세기 전반기에 윤보가 만든 《인디아지도》가 나왔으며 중국과 일본, 그밖의 몇개 나라들에 대한 지도와 지리책들이 나왔다. 고려말 재능있는 지도제작자인 라흥유는 우리 나라와 중국의 지도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력사적으로 나라의 흥망과 국경의 변천이 구체적으로 밝혀져있었다.

13~14세기에는 《고려도》가 널리 리용되고있었는데 여기에는 국토전체에 걸쳐서 자연지리적조건과 정치, 경제, 군사관련의 내용들이 많이 담겨져있었다. 특히 이름난 산과 강, 군과 현사이의 경계 등이 잘 표시되였다. 이 《고려도》는 15세기에도 우리 나라의 기본지도로 리용되였다. 이밖에 자연지리현상에 대한 관찰과 그에 대한 세밀한 기록도 남기였는데 특히 《고려사》에는 지진에 관한 기록이 13~14세기에만도 119건에 달한다.

- 고려시기에 의학도 발전하였다.

의학의 발전면모는 중앙에 태의감, 상약국, 혜민국 등 의료기관이 설치되여있은 사실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고려인민들은 유구한 력사를 두고 계승되여온 고려의학을 끊임없이 발전풍부화시켜나갔다. 이 시기 김영석(1089~1166년)은 우리 나라 약재와 림상경험에 기초한 의학책 《제중립효방》(濟뷪立效方)을 써서 의학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밖에 고려에서는 침구술도 발전하였다.

13~14세기 의학발전에서 중요한 성과는 국내약초로 고려의학을 발전시킬수 있는 토대가 다져진것이다. 이 시기에 저술된 《향약구급방》(3권)은 오늘까지 남아있는 우리 나라 의학책들가운데서 가장 오랜것이다. 13세기 전반기에 출판되여 널리 리용된 이 책에는 우리 나라 약재로 여러가지 구급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서술되여있다.

1226년 최종준이 편찬한 《어의촬요방》과 1389년 진단학책인 《진맥도결》도 매우 가치있는 책으로서 고려의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당시 이름있는 의사로서는 설경성(1237~1313년)이였다.

△ 력사학의 발전

고려시기 왕대별실록을 편찬하는 사업이 진행되였다.

고려봉건국가는 봉건통치를 미화분식하고 봉건통치의 경험을 축적하기 위한 목적으로 력사편찬사업에도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고려에서는 왕조초기부터 《사관》이라는 전문관청을 설치하고 실록을 체계적으로 편찬하였다. 실록은 한왕대를 단위로 하여 년월일순으로 쓴 력사책이다. 1013년에는 반거란전쟁전시기에 없어진 태조이후 7대 목종까지의 실록을 다시 편찬하였다.

《고려실록》에 기초하여 《고려국사》(편년체~1395년), 《고려사》(기전체~1451년), 《고려사절요》(편년체~1452년) 등이 편찬되였다.

 

  

 

실록외에도 정사류의 많은 책들이 편찬되였다.

대표적으로 《고금록》, 《국사》, 《금경록》 등을 들수 있다.

고려는 삼국시기의 력사편찬사업에도 큰 힘을 넣었다.

 

 

고려초에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세나라의 력사를 내용으로 한《삼국사》 (구삼국사)가 편찬되였다.

그후 1145년 김부식은 세나라시기의 력사적내용을 담은 《삼국사기》를 썼다.

《삼국사기》는 본기(1~28권), 년표(29~31권), 지(32~40권), 렬전(41~50권) 등의 체계를 갖춘 력사책으로서 귀중한 민족고전의 하나이다.

본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건국전설과 건국경위, 이 나라들의 발전과정, 반인민적인 시책, 반침략투쟁, 세나라사이의 호상관계, 천문기상현상 등에 대한 내용들이 실려있다. 지에는 제사, 음악과 무용, 수레와 가옥제도, 관직제도, 지리 등 제도사와 관련된 내용들이 기록되여있다. 렬전에는 충신, 반역 등 여러 항목으로 나누어 인물들의 전기가 서술되여있다. 년표는 B.C. 57년부터 936년까지 왕력을 적은것이다.

《삼국사기》는 왕조사로 서술된 책으로서 신라중심으로 세나라력사를 서술하고 외국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리용한것, 신라의 사대외교를 긍정한것, 삼국이전 즉 고대사자료들을 전혀 서술하지 않은것 등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옛 력사책가운데서 제일 오래된것으로서 삼국시기 력사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된다.

이 시기 개별적인 학자들의 연구성과로 볼수 있는 력사책으로서는 1287년 리승휴에 의하여 편찬된 《제왕운기》와 13세기 말 중 일연에 의하여 편찬된《삼국유사》가 있다. 《제왕운기》는 우리 나라 고대사연구를 비롯한 력사연구에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가치있는 력사책이며 《삼국유사》는 고대중세사연구의 기본사료의 하나로 된다.

2) 기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려사람들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출판업을 크게 발전시키고 색과 문양, 모양이 특출하여 세상사람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고려자기를 만들어내여 우리 나라의 명성을 온 세상에 떨쳤습니다.》   

뛰여난 슬기와 재능을 가진 우리 인민은 고려시기 과학적창조와 발명으로써 인류문화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 목판인쇄기술과 금속활자의 발명

고려시기 기술분야에서 특출하게 발전한 부분의 하나는 목판인쇄기술과 금속활자의 발명이였다.

- 오랜 력사와 전통을 가지고있으며 고려시기에 더욱 발전한 목판인쇄기술의 면모는 대장경의 출판에서 잘 보여주고있다.

대장경은 불교경전들을 종합하여 인쇄한것이였다.

고려봉건통치배들은 불교를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11세기에 대장경출판사업에 달라붙었다. 이 사업은 1011년부터 시작하여 70여년동안 진행되였는데 이때 찍어낸 불경책은 6 000여권에 달하였다.

그후 1090년에 불교학자이며 중이였던 의천이 수집한 1 000여종의 불경책 4 769권을 더 찍어냈는데 이 두차례에 걸친 대장경출판에 든 판목은 10만여매에 달하였다.

이것은 비록 불경책들을 모아놓은것이지만 목판을 만들고 글자를 새기여 책을 찍어낸것은 인민들이였다.

고려인민들의 재능과 지혜가 깃들어있는 10만대장경은 당시 세계적으로 꼽히는 큰 규모의 인쇄문화적창조물이였다. 그런데 이 판목들은 1232년 몽골침략자들에 의하여 불타버렸다.

고려에서는 13세기에 몽골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면서 1236년부터 시작하여 16년동안에 목판 8만여매를 만들어 6 793권에 달하는 불교전서를 인쇄하였다. 이것을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렀다.

 

 

《팔만대장경》목판

 

《팔만대장경》은 봉건통치배들이 이른바 《부처의 도움》으로 몽골침략자들을 물리쳐보려는 허황한 의도에서 출발한것이지만 거기에는 고려의 인민들과 인쇄기술자들의 창조적지혜와 노력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목판인쇄물들은 세계적으로도 앞자리에 꼽히는 출판인쇄문화재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팔만대장경》을 잘 보존할데 대하여 일일이 밝혀주시면서 묘향산에 훌륭한 보관고를 건설하도록 하시였다.

《팔만대장경》은 국보로 최신설비를 갖춘 《팔만대장경보존고》에 정히 보관되였다.

 

 

- 고려시기 인쇄기술발전에서 특기할 사실은 금속활자가 발명된것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한것도 우리 조선민족입니다.》

금속활자의 발명은 고려인민들의 꾸준한 노력과 탐구의 결과였으며 고대로부터 발전해온 우리 인민의 높은 금속가공기술이 낳은 열매였다.

 

 

고려시기 목판인쇄는 당시의 조건에서는 매우 발전된것이였지만 그것은 로력이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였다. 고려인민들은 이러한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려고 탐구를 거듭하는 과정에 나무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는데 성공하였다. 나무활자에 의한 인쇄기술의 발전면모를 다는 알수 없으나 1101년부터 1122년까지에 걸쳐 출판한 《석원사림》이라는 책은 나무활자로 찍은것이였다.

한편 금속주조 및 가공기술이 발전하면서 11세기 말~12세기 초에 금속활자주조법과 꼭같은 방법으로 《해동통보》, 《동국통보》 등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진 구리돈을 부어낼수 있게 되였다.

 

 

고려시기 주조된 구리돈 《동국통보》

 

나무활자의 창안과 리용, 금속주조 및 가공기술의 이러한 발전에 토대하여 마침내 금속활자의 주조와 그에 의한 인쇄방법을 창안해낼수 있었다.

금속활자의 사용과 관련한 가장 오랜 기록은 1234~1241년에 출판된 《상정례문》(고금상정례 1123~1146년경에 씀)의 서문이다. 리규보(1168~1241년)가 쓴 이 서문에는 50권에 달하는 상당히 큰 《상정례문》이라는 책을 강화도에서 금속활자로 28부나 인쇄하였다는것이 기록되여있다. 그리고 1076년에 쓴 《남명증도가》라는 책을 1239년에 강화도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는데 그 책은 이미 이전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던 일이 있었다.

《고려사》기록에 의하면 금속활자로 출판하는 일을 《서적점》에서 전문적으로 맡아보았는데 이 기관은 1047~1088년에 설치되여있었다.

도이췰란드의 구텐베르그가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책을 인쇄한것은 1450년대이며 네데를란드의 코스타가 금속활자를 발명한것은 1423년이였다.

이러한 사실은 슬기롭고 지혜로운 고려사람들이 유럽보다 300년이상이나 앞서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우리 나라의 출판업을 발전시켰으며 세계인쇄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 도자기생산기술의 발전

고려인민들은 이미 이룩된 자기제조기술에 토대하여 아름다운 색갈과 무늬, 형태에서 우수하고 독특한 특징을 가진 고려자기를 만들어냈다.

 

 

 

고려자기는 그 색갈이 특출하였으며 그 여러가지 색갈가운데서 가장 훌륭한것은 비색이였다. 비색은 비취옥과 같은 푸른색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조선의 맑고 깨끗한 가을하늘처럼 민족적정서가 진하게 풍기는 아름다운 색갈이다.

고려자기는 또한 그 문양에 있어서도 특출하였다.

고려사람들은 독특한 상감수법(무늬박이수법)을 적용하여 자기의 아름다운 공예미를 한층 더 돋구는데 성공하였다.

상감수법이란 그릇표면에 홈을 파서 문양을 새기고 거기에 흰 흙과 검은 흙, 붉은 흙 등을 잘 메운 다음 그우에 사기물을 발라 구워내는 수법이다.

상감수법에 의하여 형상된 문양들은 매우 아름답고 다양할뿐아니라 참신하고 기발한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고려사람들은 상감수법과 함께 돋을새김, 오목새김, 뚫음새김 등 다양한 문양새김수법들을 다같이 발전시켰다.

고려자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양의 아름다움에 있다.

고려사람들은 자기의 형태를 사랑스러운 동물이나 식물의 모양을 본따서 만들었다. 특히 참대순과 조롱박, 참외와 수박, 포도와 같은 식물의 모양을 본따 만든 주전자, 비둘기와 원앙새, 원숭이, 오리와 같은 동물의 모양을 본따 만든 벼루물그릇, 룡대가리를 본따 만든 붓꽂이 등은 볼수록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처럼 고려자기는 실용성과 예술성이 통일되고 색갈과 문양, 모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되여있는 높은 수준의 예술품이다. 고려자기가운데서 우수한것들은 모두 봉건통치배들의 사치생활에 리용되였으나 거기에는 그것을 만들어낸 고려인민들의 훌륭한 창조적재능이 깃들어있다.

△ 무기제조와 배무이기술의 발전

- 고려의 무기제작자들은 그전부터 쓰던 석포(돌을 멀리날리는 포)나 노(화살을 기계적힘을 빌어 멀리쏘는 활)를 새롭게 개선하였으며 그밖에 힘있는 무기들을 창안제작하였다.

1010년 11월 거란침략군의 제2차침입을 물리치는 통주싸움에서는 적기병을 효과적으로 막아낼수 있는 검차라는 무기를 썼으며 1032년에는 혁차, 수질노, 뢰등석포, 팔우노 등 여러가지 이름과 성능을 가진 무기들을 련이어 창안하였다.

또한 1040년 10월에 만들어진 수질구궁노는 매우 신기하게 잘 만든것으로 하여 동서변방의 여러 진들에 배치되였다.

12세기에 들어와서는 수백근이나 되는 큰 돌 또는 화구(불덩어리포탄)를 쏘아던지는 포가 창안되였다. 이 시기 인민들과 기술자들의 창조적지혜와 높은 기술에 의하여 창안제작된 무기들은 거란을 비롯한 외래침략자들을 쳐물리치는 싸움에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고려말기에 우수한 화약무기들을 만드는 기술적밑천으로 되였다.

- 13~14세기에는 화약제조법이 새롭게 알려지고 화약무기들이 창안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이름난 발명가인 최무선은 새로운 화약제조방법을 창안하고 그것을 토대로 화약무기를 만들어 전함들에 설치하는데 성공하였다고 교시하시였다.

14세기 후반기 최무선은 자기 집에서 실험을 거듭하여 마침내 화약제조법을 창안하였으며 생산에 적용하였다.

화약을 만들어낸 최무선은 1377년 10월에 정부안에 설치된 《화통도감》의 책임자가 되였다.

그는 여기서 대장군포, 2장군포, 3장군포, 륙화석포, 화포, 신포, 질려포 등 여러가지 포들과 화전, 철령전, 피령전, 류화, 주화 등 불화살 또는 포탄들을 만들어냈다.

또한 화약무기를 배우에 설치하기 위하여 종래의 전투함구조를 개조하였다. 배전의 높이를 낮추고 갑판의 구조를 견고하게 한 다음 대포를 고착시켰다. 화통도감에서 만든 화포들의 위력은 특히 1380년 진포해전과 1383년 박두양해전에서 훌륭히 발휘되였다. 이처럼 배우에 화포를 설치하고 전투를 진행한것은 세계해전력사에서 처음있은 일이였다.

유럽에서는 1571년 레빤도해전에서 제노아, 베니스, 에스빠냐련합함대가 뛰르끼예함대를 격파할 때 화포를 사용한것이 처음이였다.

- 당시 고려에서는 배무이기술과 항해기술도 발전하였다.

배무이기술자들은 여러가지 형태와 성능을 가진 배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특히 10세기 초에 만든 큰 전함은 길이와 너비가 16보(96자)였다. 배무이기술수준이 높았는데 그것은 설계가 독특하고 배무이속도가 매우 빨랐던것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고려에서는 1274년 1월 16일부터 5월말까지 불과 130일동안에 크고작은 배 300여척을 무어냈다.

- 13~14세기 농업과 수공업에서 이룩된 기술적성과는 목화재배법과 무명실낳이 및 천짜는 기구들이 새롭게 창안된것을 놓고 잘 알수 있다.

 

 

 

문익점(1329~1398년)은 1363년 원나라에 사신단의 한 성원으로 갔다가 남방의 운남에서 목화씨 10알을 붓대속에 감추어가지고 귀국하여 1364년 경상도 진주에 있는 장인 정천익에게 주어 재배하게 하였다. 재배방법을 잘 알지 못했던탓으로 첫해에는 겨우 한그루만을 살려냈는데 거기에서 100여알의 씨를 얻었다. 그것을 가지고 널리 퍼쳐 고려의 많은 지방에서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목화송이에서 씨를 빼는 씨아와 무명실을 뽑는 물레가 창안되여 보급되였다. 이처럼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온것은 공예작물의 재배와 무명천짜기기술을 새롭게 발전시키는데서 획기적계기로 되였다.

의복으로는 베옷(토스레옷)밖에 모르던 우리 인민은 이때부터 무명천으로 옷을 해입게 되였으며 솜이불도 만들어쓰게 되였다.

- 고려에서는 또한 푸른기와와 유리기와를 만드는 기술이 높은 수준에 올랐다.

 

 

1277년 5월 강화도에서 유리기와를 구어냈는데 그 품질과 색채가 매우 우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