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료동원정군의 출동과 반역적인 《위화도회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투쟁하여온 자랑찬 력사를 가지고있습니다.》

고려군의 료동원정은 고구려, 발해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정의의 투쟁이였다.

그러나 리성계는 왕이 될 야심을 가지고 위화도회군을 하여 료동원정을 파탄시켰다.

고려는 1370년대부터 1380년대에 여러차례에 걸쳐 료동원정을 단행하였다.

△ 1360년대 말~1370년대 료동원정

고려는 1360년대 말~1370년대 초에 3차에 걸쳐 료동지방에 대한 대규모적인 원정을 진행하였다.

고려가 이때에 료동원정을 단행한것은 압록강이북에 둥지를 틀고있던 원나라침략세력을 료동지방에서 몰아내고 고구려-발해의 옛땅을 되찾으려는것이였다.

당시 료동지방은 원나라의 잔여세력인 봉건할거세력들의 은거지였다. 1368년 주원장의 세력이 대도(베이징)를 강점하자 료동일대는 쫓겨난 북원의 통제로부터 떨어져 독립적인 봉건세력들의 활무대로 되여버렸다.

한편 원나라는 료양에 철페했던 《동녕부》라는 침략기구를 다시 설치하고 고려를 침공하려고 발악하였다.

원나라통치배들은 료동지방에서 고려인, 녀진인들의 반원투쟁을 진압하며 친원반역자들을 규합하여 고려를 침략할 준비를 서두르고있었다.

고려에서는 이런 정세에 대처하여 북방의 방비를 강화하면서 동녕부를 들이쳐 적의 침공기도를 파탄시키는 동시에 료동지방에서 원나라침략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을 계획하였다. 이 원정은 또한 고려통치배들이 1356년이후 고조된 고려인민의 반원기운에 의거하여 원침략세력을 몰아낼뿐아니라 통치령역을 이 지방에로 확대하려는 기도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 고려군의 제1차원정은 1369년-1370년 초에 두방면에서 벌어졌다.

양백연이 지휘하는 고려 서북면군대는 1369년 말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를 향하여 진격하여 적군을 동녕성(료양성)에 몰아넣고 족친 다음 두목 50여명을 포로해가지고 1370년 2월 하순에 개선하였다.

한편 1만 5 000명으로 구성된 동북면군대는 1370년 1월 함흥을 떠나 황초령과 설한령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적의 주요거점인 올라산성(환인부근) 으로 진격하였다. 원정군은 올라산성을 함락시키고 적장 50명을 비롯한 적의 유생력량을 체포하거나 소멸하였으며 2 000여필의 말을 비롯한 여러가지 전투물자를 로획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계속하여 그 이북, 이남의 넓은 지역을 장악하였다. 당시 거기에 살고있던 1만여호의 인민들이 고려군의 진격을 반가이 맞이하였다. 이때 리원경이라는 적의 장수는 자기의 선조는 원래 고려사람이였다고 하면서 스스로 투항해오기까지 하였다.

고려군은 료동지방의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그 일대의 인민들에게 큰 영향을 준 다음 개선하였다.

― 고려는 1370년 11월 제2차료동원정을 진행하였다.

그것은 기새인첩목아(기철)가 원정군이 철수한 다음 다시 료양성을 타고앉아 군대를 모으면서 고려의 북부국경에 침입하려고 꾀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1370년 11월 서북면상원수 지룡수가 지휘하는 수만명의 원정군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료양성을 진격하였다. 원정군은 진격도중에 료양성에서 200리 되는 리장탑에 이르러 후방부대와 물자는 이곳에 남겨두고 7일간의 군량만을 휴대하고 료양성으로 접근하였다. 원정군은 행군을 다그치면서 먼저 포고를 내여 원정의 목적이 고려에 대한 침략을 꾀하는 원의 잔당을 쳐부시는데 있다는것, 본래부터 고려땅이며 고려인이 많이 살고있는 료동지방은 고려의 통치권에 들어와야 한다는것 그리고 백성들과 우두머리들은 귀순하라고 선언하였다.

원정군에서 선발된 3 000여명의 기병이 먼저 료동성을 공격하였고 뒤이어 주력군이 적들의 화살이 비발치는 속을 과감하게 뚫고 들어가 료동성을 점령하였다. 료동성을 함락한 고려군은 우두머리를 비롯한 많은 적들을 포로하였다.

고려군은 이처럼 자기의 위력을 료동일대에 시위하고 그곳을 자기의 지경으로 선포한 다음 무사히 돌아왔다.

― 신돈일파가 정권에서 제거된 후 복잡한 국내정세가 일단 수습되자 이해 9월 고려정부는 료동지역에 대한 제3차원정을 단행하였다.

서경도만호 안우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압록강중류를 건너 10월에 동가강건너편의 오로산성(올라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곳에 다시 들어와 둥지를 틀고있던 원침략세력의 잔당을 소탕하였다. 고려군은 원의 추밀원부사 합랄불화를 포로한 다음 거기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당시 고려통치층내부에서 실권을 쥔 림견미, 렴흥방일당의 전횡과 중소봉건세력들의 항거 등으로 정세가 복잡해지면서 원정군은 철수하였다.

3차에 걸치는 료동원정은 우리의 옛 강토였으며 고구려후손들이 많이 살고있던 료동지방에서까지 원나라침략무력을 구축하기 위한 투쟁이였다.

고려군의 료동원정을 계기로 옛땅을 되찾을수 있는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였으나 공민왕의 그릇된 정사와 통치배들의 권력쟁찰전, 왜구의 침습이 계속되고있던 당시의 정세로 하여 완전히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370년대 고려군의 료동원정은 이 지방에서 원침략세력을 소탕하고 할거한 봉건세력들을 위압함으로써 감히 고려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결과 그후 20년간 서북면과 동북면일대에 대한 적들의 큰 침입은 없었다.

△ 1388년 료동원정과 《위화도회군》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는 일찌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나날에 1388년의 료동원정과 위화도회군에 대한 과학적인 평가를 내리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지침으로 하여 1388년 료동원정과 《위화도회군》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 1388년 료동원정군의 조직

• 14세기 말 고려의 형편은 매우 어지러웠고 명나라와의 관계는 긴장하여졌다.

1371년 신돈일파를 내쫓고 정권을 잡은 리인임, 렴흥방, 림견미 등 대토지소유자들의 전횡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자들은 1374년 공민왕이 뜻밖에 피살된 후 10살밖에 안되는 우왕을 들여앉히고 모든 실권을 걷어쥐였다. 그들은 관리임명과 소송의 처리를 제마음대로 하면서 토지와 노비, 재물들을 꺼리낌없이 빼앗아냈다. 당시 이자들은 무장한 사병들까지 끌고다니면서 물푸레나무몽둥이로 사람들을 마구 때리는 등 폭행과 강탈을 일삼았다. 이리하여 중요벼슬자리들은 모두 리인임일파의 심복들로 꾸려지고 그들이 닥치는대로 빼앗아가진 토지와 노비들이 전국 각지에 널려져있었다.

리인임일파의 부패한 통치가 계속되고 강도적략탈이 공공연히 벌어짐에 따라 이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이 사방에서 일어났으며 우왕과 최영도 왕권을 위협하는 리인임일당의 지나친 전횡과 무제한한 략탈행위를 증오하게 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인 1387년 말 봉건정부에서는 배천고을량반인 조반의 땅을 렴흥방일당이 강탈한 사건으로 하여 떠들썩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왕은 1388년 1월 도통사로 있던 최영과 협의한 후 토지분쟁사건으로 기소된 조반을 석방하고 렴흥방을 잡아가두었으며 리인임과 그 일파를 모조리 제거하였다.

이때 리인임은 경상부(경상북도 성주군)에 귀양보내고 봉건정부안에는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였다. 《전민변정도감》에서는 토지와 노비를 본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비법적으로 노비로 만든 사람들을 본래의 량인신분으로 되게 하였다. 그리고 각 도에 안무사를 파견하여 리인임일파의 가신들과 악당 1 000여명을 잡아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고려봉건정부에서 취한 조치들은 봉건왕권을 강화하고 계급적모순을 일시 완화시키는 긍정적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토지소유를 반대하여 봉건적수탈제도를 재정리할것을 주장한 최영, 리색 등이 정치적실권을 잡게 되였다. 최영은 봉건정부의 제일 높은 자리인 문하시중으로, 리색은 국가재정을 총괄하는 판삼사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 바로 이무렵에 명나라통치배들이 고려에 대한 침략기도를 공공연히 드러내놓았다.

1369년 고려와 국교관계를 맺은 명나라통치배들은 점차 중국 동북지방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고려에 대한 침략책동을 감행하였다.

명나라통치배들은 1373년 초부터 예고도 없이 고려사신의 료동지방통과를 거부하였고 1388년 2월에는 《철령위》의 설치를 기도하면서 한때 원이 강점했던 쌍성총관부지역을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

명나라통치배들은 계속하여 강계일대에 군대와 관리를 파견하면서 료동백호 왕득명을 보내여 《철령위》설치에 대해 통고까지 하였다.

또한 강점자들을 들여보내여 정탐행위를 감행하며 많은 준마를 요구하는가 하면 료동지방에서 이주한 4만호의 인민들을 보내라고까지 강요해나섰다.

이 모든것은 명나라통치배들의 고려침략야욕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가를 말해주고있다.

• 고려는 료동지역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명나라통치배들의 침략기도를 꺾어버리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은 명나라의 침략거점인 료양을 들이쳐 침략기도를 저지파탄시키며 더 나아가 고구려-발해의 옛땅을 되찾을것을 계획하였다.

최영은 우선 명나라의 중요한 정치군사적거점이며 고려침략의 본거지로 되고있던 료양을 공격할데 대한 단호한 결심을 내리고 압록강부근에 왔던 명나라의 료동군사들을 처단하였으며 관리들을 억류하였다.

그리고 료동원정군의 편성과 그 준비를 다그쳤다. 고려정부는 1388년 4월 초 료동공격을 정식으로 선포하고 약 5만(기본부대 4만, 후방부대 1만)명의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문하시중 최영의 다음자리에 있던 리성계는 료동공격을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료동원정을 반대하는 일부 통치배들의 주장을 배격하고 원정준비를 더욱 다그쳤다.

드디여 평양에 집결한 3만 8 000여명의 원정군부대가 편성되였다.

― 료동원정군의 출동, 《위화도회군》

최영을 8도 도통사로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리성계를 우군도통사로 하여 4월 중순 원정군이 출발을 개시하였다.

원정군의 총지휘는 최영이 평양에 있었으므로 실제로 리성계가 맡았다.

고려원정군은 4월 18일 서경을 출발하여 5월 초에 압록강의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머물게 되였다.

한편 니성(창성), 강계 등지에 주둔하였던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가 적들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위화도에 도착한 리성계는 장마에 물이 불어서 건늘수 없다는 황당한 구실로 5월 말 제멋대로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력사에서 《위화도회군》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리성계가 정권을 가로채기 위하여 조작한 비렬한 배신행위였다.

리성계는 원정조직 당시부터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며 《만일 우리가 명나라를 치면 천자에게 죄를 지어 나라와 백성에게 당장 화가 미칠것이다》는 사대적망발을 늘어놓는가 하면 여름에 원정하는것은 시기를 잘못 선택한것이며 또 원정의 기회에 왜적이 쳐들어올수 있다는 등 궤변으로 료동원정을 반대해왔다.

리성계의 본심은 원래 고려왕조를 뒤집어엎고 왕권을 탈취하자는것이였다.

그는 토호출신으로서 14세기 후반기에 그 애비 리자춘을 따라 고려정계에 진출하였다. 그후 무관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적지반을 닦게 되자 왕권을 탈취하려는 야심을 품게 되였으며 위화도회군이라는 반역적인 사건까지 연출하였던것이다.

리성계는 고려봉건정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5월 말에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위화도에서 되돌려세워 6월 초에 개경으로 쳐올라와 우왕을 강화도로 내몰고 9살난 그의 아들 창을 왕으로 올려앉히였다. 그리고 이름있는 장수로서 외적과의 싸움에서 공로도 많은 최영을 《반역자》로 몰아 처형하였다.

당시 료동지방에로 진출하는것은 조성된 주객관적조건으로 보아 충분히 승리할수 있는것이였다.

료동원정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해나섰던 인민들의 념원에도 맞는것이였다.

특히 명나라의 침략기도에 타격을 주고 민족적존엄과 나라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의의있고 현실적가능성이 담보된 작전이였다.

이처럼 료동원정은 당시의 력사적조건에서 정당한것이였으나 반역자 리성계의 배신행위로 하여 실현되지 못한채 중도에서 좌절되여 고구려-발해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사업은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