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31년 봉건몽골침략군을 쳐물리친 인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인민은 예로부터 침략자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조국을 보위하는 성스러운 싸움에 한사람같이 일어나서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쳤으며 조국을 영웅적으로 방위하면서 반만년의 슬기로운 력사를 창조하였습니다.》

△ 13세기 초 나라에 조성된 정세

- 13세기 초 나라의 형편은 매우 어렵고 복잡하였다.

그것은 최충헌일파의 사적권력기구가 강화되면서 왕권이 유명무실해진 사정과 관련되였다.

이 시기 도방, 교정도감, 정방, 그리고 가병제도는 최충헌의 아들 최우(최이)의 대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였다.

특히 최가는 도방아래에 《가병》으로 불리우는 수많은 사병을 가지고있었는데 무려 3 000여명이나 되였다.

국가의 공적권력기구밖에 있는 이러한 사적권력기구들이 강화되면서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억압과 착취는 더욱 혹심하였으며 나라의 방위력은 급격히 약화되였다.

군사제도가 해이해져 중앙군인 2군6위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다나니 봉건정부는 병력의 부족을 메꾸기 위하여 일이날 때마다 림시로 《별초》를 조직하여 대응하는 형편이였다.

봉건통치가 혼란되는속에 인민대중에 대한 국가와 개별적봉건통치배들의 억압과 착취가 더욱 가혹해져 사회계급적모순은 날로 격화되여갔다.

- 이 시기 대외정세도 매우 긴장하였다.

국력이 약화되고있던 고려는 이 시기 포악한 봉건몽골(1271년부터는 원나라)의 수십년간에 걸친 침략을 받게 되였다. 원래 몽골족은 북쪽의 바이깔호로부터 남쪽의 고비사막에 걸치는 넓은 지역에 퍼져 살고있던 유목종족이였다. 12세기 말 몽골족안에서는 공동체적관계가 급속히 무너지고 국가수립과정이 다그쳐졌다.

여러개의 부족으로 나뉘여살던 몽골은 1206년 령주의 한사람인 테무친에 의하여 통합되였다. 이때 테무친은 귀족회의에서 칭기스한(큰 왕이라는 뜻)의 칭호를 받았는데 이 시기부터 비로소 몽골은 봉건국가의 체모를 갖추게 되였다. 20만안팎의 강한 기병을 가지고있던 봉건몽골은 이웃 나라들을 닥치는대로 정복해나갔다. 1211년부터 금나라(녀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북부중국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였다.

금나라에 의하여 료나라가 망한 후 료하상류지역에 흩어져 살고있던 거란인들은 봉건몽골에 쫓기여 고려경내로 밀려들어오게 되였다.

수만명의 거란인들은 1216년 8월에 1차, 1216년 9월~1217년 7월에 2차, 1218년 4월 3차로 고려에 들어와 략탈과 만행을 감행하였다.

3차로 기여든 수만의 거란군은 고려에 의하여 성천에서 패하고 일부는 도망쳤으며 나머지는 강동성으로 몰려들었다.

이 시기 봉건몽골은 거란인들을 추격한다는 구실밑에 1218년 12월 3만의 병력으로 고려에 침범하였다.

고려는 봉건몽골이 거란을 소멸하겠다는 구실을 내대고 들어온 조건에서 몽골군을 리용하여 1219년 1월 강동성을 포위공격하여 100여명의 거란우두머리들을 처단하고 5만여명을 포로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강동성전투에서 고려군의 위력을 체험한 봉건몽골군은 일단 물러갔으나 그해 가을부터 자주 고려에 사신을 보내여 위협공갈을 일삼으면서 여러가지 물품을 내라고 강박하였다. 고려-몽골관계가 긴장해지는 가운데 1225년 6월 몽골사신 저고여일행이 고려에 들어와 막대한 물자를 강요하면서 횡포한 행동을 감행하고 돌아가던중 압록강가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봉건몽골은 이 사건을 고려침공의 좋은 구실로 삼았다. 서방정복을 일단 끝내고 만주일대를 점령한 봉건몽골은 1230년 금나라를 공격함과 동시에 고려에 대한 대규모의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려에 대한 봉건몽골의 침략과 략탈의 력사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 봉건몽골침략군의 제1차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

칭기스한의 뒤를 이어 1229년에 대한의 자리에 오른 오고타이는 1230년 직접 대군을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하면서 부하인 살례탑에게 일부 병력을 주어 고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 1231년 8월 살례탑이 거느린 수만명의 침략군이 고려에 대한 무력침공의 길에 들어섰다.

몽골침략자들의 침략목적은 고려의 령토를 점령하고 인민들을 노예로 만들며 그 재부를 강탈하자는데 있었다.

고려인민들은 나라의 존망을 판가리하는 준엄한 싸움에 한결같이 일떠섰다.

몽골침략군은 먼저 의주와 철산을 점령한 다음 두 부대로 나뉘여 9월 초에 한 부대는 서경을 향하여 계속 내려오고 다른 부대는 구주성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포악한 봉건몽골침략군의 발굽은 급속히 청천강이북 여러지역에 미치게 되였다.

- 고려인민들은 몽골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 용감히 떨쳐나섰다.

고려봉건통치배들은 실제로 방어군을 편성할만한 준비된 군대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신집권자 최이는 자기의 가병을 방어군에 넣지 않았다.

이 어려운 시기에 방어군편성에 호응해나선것은 근로하는 인민대중이였다. 특히 국내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여 싸우던 각지 농민폭동군들이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의 선두에 나섰으며 자진하여 방어군에 편입되였다. 9월 초 마산지방에서 싸우던 5 000여명의 농민폭동군이 외래침략자들과의 싸움에 나섰고 뒤이어 관악산(서울시)에서 싸우던 농민군도 방어군에 합류되였으며 충주의 노군(노비로 조직된 부대)들도 침략자와 싸울것을 결의하였다.

이것은 고려인민들의 높은 애국심의 발현으로서 언제나 인민들만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여 싸움에 나섰다는것을 보여주었다.

고려의 방어군은 9월 20일 동선역(황해북도 봉산군)에서 남쪽으로 기여들던 봉건몽골침략군과 첫 전투를 벌렸다.

방어군이 휴식하고있을 때 8 000여명의 침략군이 불의에 달려들었다.

이때 마산농민폭동군출신 병사들이 민활하게 반격해나갔다. 뒤이어 돌격전으로 침략군을 타격하여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동선역에서 적들을 격파한 방어군은 적을 안북부(안주)계선까지 밀고올라갔다. 방어군은 이해 10월 하순 안북부성밖에서 다시 적의 주력과 맞다들게 되였는데 봉건귀족출신지휘관들의 비겁성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적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농민폭동군출신병사들이 어려운 고비마다 앞장에서 용감히 싸움으로써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기였다.

다른 한편 구주성에서도 봉건몽골침략군과의 치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구주성을 포위한 적들은 대포, 루차 등 여러가지 공성기재들을 다 동원시켰으며 성주위에 기름을 친 장작으로 불을 놓고 집요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성안의 인민들은 서북면 병마사인 박서의 지휘밑에 적의 대포에는 대포로, 대목상과 루차에는 쇠물로, 화공전술에는 진흙물로 림기응변하면서 적들을 물리쳤고 때로는 과감한 돌격전을 벌려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당시 구주성인민들의 완강한 항전에 놀란 침략자들은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늘의 조화라고 아우성을 쳤으며 70살에 가까운 침략군의 한 늙은 장수는 《…나는 어려서부터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보았지만 이처럼 무서운 공격을 받고도 끄떡하지 않는 성을 본적이 없다.》고 비명을 올렸다.

구주성방위자들은 1231년 9월부터 1232년 1월까지 희생적이며 완강한 투쟁을 벌려 적들의 기를 꺾어놓고 전쟁전기간 성을 굳건히 지켜냈다.

방어군은 9월 중순에 황해북도 봉산에서 8 000여명의 침략군부대를 격파하고 적들을 안북부(안주)계선까지 밀고 올라갔다. 서경인민들은 적들의 거듭되는 공격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으며 자주(자산)의 군민들도 자모산성에 의거하여 적들이 쫓겨갈 때까지 피어린 투쟁을 벌려 큰 타격을 주었다.

충주인민들도 노군잡류별초(노비와 기타 《천민》들로 조직된 부대)와 힘을 합쳐 성을 끝까지 고수하고 침략군의 공격을 좌절시켰다.

도처에서 고려인민의 완강한 항전에 부딪친 적들은 개경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화의》에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고려정부앞에는 싸우는 인민들과 협력하여 침략자들을 완전히 섬멸해야 할 과업이 나서고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집권자들은 안북부전투후 다시는 방어군을 조직하지 않았으며 각지 인민들의 항전기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의 정권유지에만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와 봉건몽골사이에는 《화의》가 맺어지게 되였다.

《화의》가 성립된 후 몽골침략군은 1232년 1월에 일단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