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학과 예술

 

△ 발해의 문학과 예술

ㅡ 문학

발해의 문학은 고구려문학의 우수한 특성들을 그대로 이어받아 중세문학을 발전풍부화하는데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발해문학의 특징은 주제사상적내용에서 애국적기백이 강하고 예술적형상에서 민족적정서가 치밀하고 서정성, 서사성이 풍부한것이다.

발해의 문화유산으로는 국문가요와 한시가 있다.

• 국문가요는 《답주곡》이 알려졌다.

《답주곡》은 제목자체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씩씩하고 명랑한 정서가 있는 군중창작의 인민가요였다.

• 발해에서는 한시도 발전하였다.

한시의 대표작들로는 8세기 중엽에 창작된 양태사의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듣고》와 왕효렴의 《달을 보고 고향을 생각하여》, 배정의 《산꽃을 노래하여》, 《봄비》 등이 있다.

특히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듣고》는 시인이 귀덕장군이라는 벼슬을 가지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깊은 밤 어디선가 고요를 깨뜨리며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를 듣고 고국을 못견디게 그리워 지은것이라고 한다.

 

  

 

작품에서 시인은 고향과 부모처자에 대한 그리움을 민족적정서가 흘러넘치게 절절히 노래하였다.

발해의 시작품들에는 발해사람들의 풍부한 정서와 아름다운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진보적인 내용을 담은것도 있지만 인정의 《궁중에서 이레동안 연회를 받고》와 같이 봉건통치배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찬미하는 제한성도 가지고있다.

ㅡ 음악과 무용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대로부터 음악과 무용이 발전하였습니다. 선조들은 가야금, 거문고 등 매우 훌륭한 민족악기를 만들어 음악을 발전시켰고 률동이 우아한 민족무용을 발전시켰습니다.》

발해에서는 가요들이 널리 창작되고 무용도 발전하였다.

•  기록에 의하면 발해에서는 《납소리》, 《진소리》, 《신소리》 등이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민간음악을 《소리》, 《타령》으로  불러온것으로 보아 당시 발해인민들의 생활감정을 담은 작품들이라고 보아진다.

악곡으로는 《릉절》, 《부수》, 《팔선》 등이 알려져있다.

발해에서는 민족악기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는데 탄쟁, 봉수공후, 수공후, 화공후, 비파, 오현, 생, 소요고, 철판, 패, 소피리, 대피리 등 수십종의 악기가 있다. 이 악기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악기를 그대로 리용하거나 개량한것들이였다.

발해에서는 20여가지 악기로 무은 관현악연주집단이 있었으며 가무예술가들로 구성된 《교방》이라는 국가적기구까지 있었다.

• 발해의 무용으로는 《답추》라는 군중가무가 알려져있는데 그것이 일본에까지 보급되였던것으로 전해지고있다.

ㅡ 공예, 조각과 그림

• 발해에서의 공예발전은 당시로서 높은 수준에 있었다.

발해공예의 특징은 꿋꿋하고 힘찬 정서가 풍기고있는것이다.

대표적인것은 고구려의 자기공예를 직접 계승하여 만든 삼색유약단지, 구름모양자배기 등을 비롯한 여러가지 자기들이다.

 

 

 

구름모양자배기

 

발해인민들은 흰빛, 푸른재빛, 람색자지빛 등의 자기와 함께 노란색, 밤색, 풀색을 비롯한 3가지색을 한꺼번에 바른 《삼색자기》를 많이 만들어냈다.

발해에서는 무늬박이(상감)수법으로 만든 자기도 만들었다.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절터에서 나온 자기는 우리 나라에서 상감자기의 력사가 매우 오래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이처럼 발해의 자기는 고구려의 자기공예를 계승하였고 그후 고려의 자기공예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 발해에서는 조각이 발전하였다.

발해의 조각으로는 정혜공주무덤의 돌사자조각과 다른 곳에서 발굴된 돌불상을 비롯한 여러가지 불상조각들이 있다. 특히 돌판우에 앞발을 버티고 앉은 사자를 형상한 조각은 높이가 51cm인데 억센 기상을 보여주고있다.

발해의 조각은 불교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제한성도 있지만 그것을 창조한 인민들의 지혜와 재능을 잘 보여주고있다.

• 발해에서는 미술도 발전하였다.

중국 길림성 화룡현 룡두산에서 새로 발견된 정효공주무덤의 벽화는 발해회화미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무덤칸의 동, 서 두 벽에 주인공에게 복무하던 문지기, 시위(호위무관), 내시, 악사 등을 여러가지 채색으로 잘 형상하여 그렸다.

이처럼 발해에서는 인민들의 창조적지혜와 재능에 의하여 문화가 발전하였다.

△ 후기신라의 문학과 예술

ㅡ 문학

후기신라에서의 문학은 현실비판정신과 고루한 봉건적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지향이 강하고 새로운 문학형태인 참요, 려행기, 산문 등이 발생발전한것이다.

• 시가문학(詩歌)

후기신라의 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민요의 특수한 형식인 《참요》가 발생발전한것이다.

그 대표작들인 《남무망국가》와 《지리다도파가》는 전횡과 부화방탕한 생활로 세월을 보내는 진성녀왕과 봉건통치배들을 비판하며 썩을대로 썩은 신라봉건국가의 멸망을 예고하였다.

향가도 한층 발전하였다.

후기신라에서 향가가 빨리 발전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시기 향가는 10구체(초기에는 4구체)의 시가형식으로 완성되였다.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득오고의 《모죽지랑가》, 월명의 《제망매가》, 충담의 《찬기파랑가》, 《안민가》, 《헌화가》를 들수 있다.

이 작품들은 제한성도 있으나 서정성과 예술적수준이 높았다. 888년에는 향가작품들을 수집하여 《삼대목》(향가작품집)을 출판하였다.

후기신라의 문학에서는 한시가 특수한 자리를 차지한다.

최치원은 부패한 현실을 비판한 《강남녀》, 《소박한 생각》, 《붓길가는데로》 등의 작품들을 남기였다.

• 후기신라문학의 발전면모는 설화와 산문분야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후기신라에서는 봉건통치배들과 불교승려들의 부패상을 폭로하고 인민들의 아름다운 정신도덕적풍모를 그린 구전설화들이 창작보급되였다.

신라 48대왕 경문왕의 추악한 몰골 습성을 풍자적으로 폭로한 《왕의 귀는 노새귀》와 어질고 착한 형 방이와 욕심이 많고 심술사나운 동생을 풍자한 《방이와 그의 동생》, 인민들의 재물은 물론 어린 생명까지도 마구 빼앗아가는 중놈들의 악행을 폭로한 《에밀레종》, 《무영탑》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봉건통치배들의 착취와 불교의 기만성을 폭로하였으나 항거의 정신이 부족한것이 특징이다.

후기신라시기 산문작품가운데서는 우화소설과 려행기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설총의 우화소설인 《할미꽃의 충고》는 봉건통치배들의 무능력한 몰골을 의인화의 수법으로 폭로하였다.

설총이 쓴 이 작품은 봄을 맞으며 온갖 꽃들이 활짝 피여난 아름다운 꽃동산에서 꽃왕인 모란과 함께 장미와 할미꽃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통하여 봉건통치배들의 부패무능성을 폭로하고있다.

그리고 《왕오천축국전》(혜초)이 우리 나라의 첫 려행기작품으로서 그 일부가 발굴보존되였다.

《왕오천축국전》은 우리 나라의 첫 려행기작품으로서 불교연구를 목적으로 려행한 과정이 기록되여있다.

혜초는 당나라를 거쳐 바다길을 통하여 인디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5개의 천축국)와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방, 서남아시아의 일부 나라를 답사하고 727년 11월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10여년간 10여만리의 긴 로정을 답사하면서 그 과정에 보고 느낀것들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이 려행기는 1910년 중국 돈화지방의 한 동굴에서 발굴되였다.

후기신라에서는 《수이전》식의 작품이 새로 출현하였다.

《수이전》이란 비현실적이고 미신적이며 환상적인것을 실재한 일인것처럼 묘사해놓는것을 말한다.  《머리에 꽂힌 석남》, 《지귀》,  《쌍녀분》등을 들수 있다.

《쌍녀분》(雙女墳)에는 당시 위선적인 도덕륜리를 반대하고 그러한 통제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지향이 일정하게 반영되여있다. 과거에 급제하고 률수(중국강소성)현위로 부임된 최치원이 어느날 초현탄에 놀려갔다가 그곳 《두 녀자의 무덤》속에 묻혀있는 이 지방 초설향의 큰 부자 장씨의 두 딸과 서로 알게 되여 하루밤 애정관계를 맺고 헤여졌다는것이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수이전체산문은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인 제한성도 있지만 개성의 자유를 억제하는 봉건적륜리도덕의 부당성을 폭로한 진보적인 측면도 있다.

ㅡ 예술

• 건축

후기신라에서는 세나라시기의 건축술을 이어받아 수많은 건축유산을 남겼다.

가장 우수한것은 불국사, 석굴암, 석가탑과 다보탑 등이다.

우수한 절간건축술을 보여주는 불국사(佛國사)는 515년에 세웠는데 8세기 중엽과 18세기 중엽에 다시 지었다.

 

 

 

불국사

 

불국사의 지상목조건물은 후세의것이지만 기초부분인 석조건물들은 다 건축초기의것들이다. 기초돌축담들과 청운교, 백운교는 기발하고 솜씨있게 쌓았다.

불국사의 대웅전 앞마당에 세워진 석가탑과 다보탑은 환경에 어울리면서도 각각 자기 특색을 가지고있다.

석가탑은 그리 높지 않은 8.2m의 화강암으로 된 4각3층탑으로서 균형이 잘 잡히고 탑으로서의 고유한 특성이 강조되였다.

 

 

석가탑 

 

매우 검박하고 간결하며 매부분이 정확한 비례를 설정하였는데 전체의 균형이 잡히고 무게있으나 안정감을 준다.

다보탑은 굳은 화강석을 나무로 깎듯 섬세하게 다듬어만든 탑이다. 높이가 10.4m이고 매층의 탑몸의 크기, 구조가 다르다. 탑을 쌓은 돌의 형태도 4각, 8각, 원형 등으로 다양하다.

 

 

 

다보탑

 

크기, 구조, 형태에서 비반복성을 보장하면서 세부가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여있다.

다보탑은 어지럽고 산만한감이 없이 안정감을 주며 나무로 만든듯한 정교하고 아름다움을 나타내여 전반적으로 경쾌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감을 준다.

경주 석굴암은 8세기 중엽에 경주 토함산기슭에 세운 지하절간이다.

 

 

 

경주 석굴암내부 전경

 

석굴암은 궁륭식석조건축물인데 그 본래 이름은 석불사였다. 석굴암은 토함산의 산중턱을 깎아내고 돌을 쌓아 굴을 만든 다음 흙을 씌워 고구려의 돌칸흙무덤식으로 만든 지하절로서 주변의 자연환경과 잘 어울릴뿐아니라 내부의 구조와 공간구성에서 뛰여나다. 《지상세계》를 가상한 네모난 앞칸을 로천으로, 둥근 안칸은 지하로서 《극락세계》를 가상한것이다. 석굴의 구조, 중앙과 벽면들에 배치한 여러 부처조각들 그리고 그 모든 요소들의 건축예술적통일성 등은 신라건축술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준다.

• 조각과 그림

후기신라에서는 조각도 높은 수준에서 발전하였다.

경주 석굴암의 조각상들은 종교적인 대상을 다루면서도 현실적인간의 체격을 반영한것으로서 이 시기 우리 나라 중세조각가들의 훌륭한 재능과 기교를 잘 보여준다.

 

 

 

여래상

 

결과 다른 나라 불상조각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걸작품으로 되였다. 그 가운데서도 중심상인 높이 2. 7m의 석가여래상과 반면에 11면관음상은 특히 잘된 작품이다.

석굴암의 조각상들은 종교적도식에서 벗어날수 없었으나 그런속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남김으로써 신라조각예술의 최고수준을 보여주는것이며 이것은 세계미술사의 빛나는 한 페지를 장식하는것이다.

후기신라의 조각품들가운데는 석굴암조각밖에도 태종무렬왕릉비의 거부기조각, 룡트림조각, 괘릉의 돌사자와 돌사람조각 등이 잘된 조각품으로 알려져있다.

후기신라에서는 그림도 발전하였다.

후기신라에서는 유능한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화가 솔거에 대한 이야기는 이 시기 회화가 상당히 발전하였음을 말하여준다. 솔거의 작품으로서는 황룡사벽화밖에도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의 유마화상 등이 있었다. 경주 황룡사벽에 그린 소나무는 조선화기법으로 나무를 매우 생동하게 그리고 다채로운 색갈을 입혀 새들이 실지 소나무로 알고 날아들었다고 한다. 《근역서화징》의 자료에 의하면 솔거는 단군화상 1 000여상을 그리였는데 그것을 령밖(조령, 죽령이남)의 집들에서 걸어놓고 숭배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921년 경주 흥륭사의 중인 정화와 홍계가 함께 그린 보현보살상은 13세기경까지 전해오면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 음악과 무용

후기신라의 음악과 무용은 세나라의 성과들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후기신라에서는 가야금곡이 185곡, 거문고곡이 187곡이나 있었다.

이 시기에 이름난 거문고연주가인 옥보고와 송명득, 귀금과 같은 작곡가들이 활동하였다.

무용에서는 《해용무》, 《무예무》 등이 출현하여 후세에 알려지게 되였다.

 

복습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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