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발해와 후기신라에서의 경제발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자연을 변혁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것도 인민대중이며 물질적부를 창조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것도 인민대중입니다.》   

발해와 후기신라인민들은 간고한 조건에서도 생산활동을 꾸준히 벌려 생산의 여러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 발해에서의 경제발전

발해에서는 8~9세기 인민들의 창조적로동에 의하여 농업, 수공업, 대내외상업이 발전하였다.

― 농업의 발전

농업은 발해에서 기본생산분야의 하나였다.

발해에서는 밭곡식재배가 위주였는데 기후가 따뜻하고 비옥한 벌방지대에서 조, 보리, 콩, 수수, 기장, 밀, 벼를 재배하였다.

중경현덕부 산하의 로주를 비롯한 강류역벌방의 벼재배와 옛 고구려의 수도 환도지방의 추리, 락유지방의 배 등 과일생산이 유명하였다.

― 축산, 사냥도 적지 않게 진행

초원지대들에서 돼지, 말, 소, 양과 같은 짐승들의 방목을 많이 진행하였다.

특히 발해는 명마의 산지로 널리 알려졌다.

발해에서는 사냥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북부 및 동부산악지대들에서 토끼, 사슴, 노루, 삵, 곰, 범 등을 잡았으며 그것은 식용, 옷재료, 약재의 해결에서 의의가 있었다.

― 수공업의 다양한 발전

발해에서는 수공업의 여러 류형이 발전하였다.

수공업자들은 베, 명주 등 질좋은 천과 도자기, 금은세공품, 가죽제품, 나무공예품, 철제품을 생산하였다. 특히 831년 당나라에 수출한 《자지빛나는 자기쟁반》이 유명하였다. 당나라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크기는 반섬들이나 되고 안팎이 투명한 순보라색이며 두께는 한치가량 되고 무게는 새털과 같이 가볍다》고 찬양하였다.

― 국내외상업의 발전

수도 상경과 지방행정중심지들에서 여러가지 상품교류가 활발하였으며 신라를 비롯한 린접 나라들과 무역을 진행하였다. 발해사람들은 서해, 동해를 건너다니며 당, 일본 등과도 무역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상업은 주로 사신들이 오가는 기회에 많이 진행하였다.

 △ 후기신라에서의 경제발전

후기신라에서도 인민들의 창조적로동에 의하여 경제가 발전하였다.

― 농업의 발전

농업분야에서는 농경지가 새로 개간되고 관개시설들이 복구신설되였다. 790년에 《벽골제》(관계용저수지)의 중축공사를 진행하여 호남벌의 1만 4 000결의 농경지에 물을 댈수 있게 되였다.

농업에서 철제농구리용비중이 훨씬 높아지면서 농업이 개선되였다.

신라에서의 농업의 발전은 알곡생산량이 늘어난데서도 뚜렷이 찾아볼수 있다.

752년 경덕왕이 중 진표에게 7만 7 000섬의 곡식을 희사하였다는 자료와 707년 1~7월 《구제곡》(비싼 리자를 붙여 되받아내는 고리대착취)으로 30만 5 000섬을 지출하였다는 자료를 통하여 잘 알수 있다.

이 자료들은 국가창고에 상당한 량의 알곡이 축적되여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라통치배들의 악랄한 수탈상과 함께 농업생산이 일정하게 발전하고있었다는것을 증시하여준다.

― 수공업도 발전

후기신라의 수공업에서는 관청수공업이 상당히 세분되고 발전되였다.

천, 무기, 금속가공품, 철기, 가죽제품, 문방구, 도자기, 치레거리 등 여러가지 제품을 생산하였다.

어아주, 조아주 등 비단품종이 다양해지고 생산이 늘어났으며 노포, 차노, 천보노 등 성능이 높기로 다른 나라에 알려진 무기들을 생산하였다.

후기신라에서는 금속제련업이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대형주조물을 능숙하게 부어냈는데 봉덕사종(771년 주조, 12만근 단번주조), 황룡사종(49만근), 분황사 약사동상(30만 6700여근)은 그 주조술을 잘 보여준다.

― 상업의 발전

국내상업은  주로 장을 통해 진행되였다. 경주, 5소경, 9주, 군현의 소재지들에서 시장(경주에 3개의 시장)이 발전하였다.

청해진에는 1만명의 군대와 싸움배가 배치되여있었고 대사로는 장보고가 임명되였다. 이때로부터 후기신라에서는 남해 및 서해진출을 강화하여 한때 동방의 해상무역을 거의 독차지하다싶이 하였다.

 

 

신라방과 청해진

 

후기신라는 발해, 당, 일본 등과 대외무역을 진행하였다. 특히 당나라와의 해상무역이 활발하였다.

신라사람들의 해상활동은 대체로 두길로 진행되였는데 처음에는 당은포(남양만) 또는 혈구진(강화)을 떠나 서해안, 료동반도를 거쳐 산동반도로 가다가 차츰 산동반도로 직접 건너갔다. 그후  령암에서 양자강하구로 건너갔다.

이처럼 인민들의 로동과 지혜로 발해와 후기신라시기에 생산이 훨씬 늘어나고 상업도 활기를 띄였다.

그러나 인민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사회적재부는 인민자신의 향유물이 되지 못하고 통치배들의 사치와 향락에 탕진되였다. 인민들은 생산장성에 관계없이 빈궁속에 허덕이였다.

 

복습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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