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해와 후기신라에서 봉건적통치체제의 강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착취사회에서는 국가주권을 쥔 착취계급만이 지배권을 가지고 모든 권리를 행사하며 국가주권을 쥐지 못한 근로인민대중은 아무런 자유와 권리도 못가지고 오직 착취와 억압의 대상으로만 됩니다.》   

발해, 후기신라에서의 봉건관계는 삼국시기에 비하여 한층 더 강화되였다.

이러한 봉건관계의 강화과정은 인민들을 봉건적인 제관계속에 더욱더 얽매여놓는 과정이였다.

△ 발해의 대외적지위의 공고화, 봉건적통치체제의 강화

― 대외적지위의 공고화

발해는 건국후 초기에 국력을 키우면서 대외적지위를 공고히하고 당나라침략세력을 견제하는데 큰 힘을 넣었다.

당나라침략자들은 새로 선 발해를 요람기에 압살하려고 말갈7부의 하나였던 흑수말갈을 부추겨 량쪽에서 공격할것을 기도하였다.

발해는 당나라의 이러한 침략책동에 대처하여 주동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발해는 대일하를 지휘자로 하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726년에 먼저 동북쪽의 흑수말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732~733년에는 장문휴가 지휘하는 수군을 동원하여 서쪽의 당나라 동부해안지대인 등주(산동반도 봉래현 동남)를 공격하여 등주지사를 잡아죽이고 계속 서쪽으로 진격하여 변방수비군을 족친 다음 철수하였다.

수군의 등주공격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발해 무왕이 거느린 륙군이 료하, 대릉하를 건너 만리장성의 마도산일대에까지 진격하였다. 적들은 하북일대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만리장성계선 400리구간에 참호와 성벽방어시설들을 만들어놓고 대항하였으나 발해군은 적에게 큰 타격을 준후 주동적으로 철수하였다.

이처럼 발해는 당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과정에 더욱 장성강화되고 자기의 대외적안정을 이룩하였다.

그후 발해는 대내외적으로 급격히 장성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 동방의 강성한 나라)으로 불리우며 위력을 널리 떨치였다.

발해는 755년에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룡천부로 옮기였다.

 

 

 

발해의 상경룡천부(상상도)

 

― 봉건적통치체제의 정비강화

발해는 나라의 국력에 어울리게 통치기구와 군대제도를 정비강화하였다.

• 통치기구

ㆍ발해의 최고의 권력자는 왕이였다.

발해는 나라의 왕을 대왕(大王), 황상(皇上)으로 칭하였고 왕의 명령을 《조》로, 왕의 맏아들을 부왕, 그 다음 아들은 왕자라고 하였으며 독자적인 년호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것은 발해가 당당한 주권국가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의 왕위는 세습되였다.

ㆍ발해의 중앙통치기구로서 많은 관청들이 있었으나 기본을 이룬것은 3성 6부였다.

3성은 정당성(政堂省-6부를 관할하는 최고행정기관이며 장관은 대내상), 선조성(宣詔省-왕의 명령지시를 선포하거나 왕에게 올라오는 보고를 전달하는 기관이며 장관은 좌상), 중대성(中臺省-왕의 명령지시초안을 작성하는 기관이며 장관은 우상)이며 그 장관들인 대내상, 좌상, 우상을 3재상이라고 하였다.

6부는 충부(문관관리의 임면, 파면 등 장악), 인부(토지, 호구, 조세 등 장악), 의부(각종 의례, 제사, 교육, 대외관계 등 장악), 지부(무관의 임면, 군사관계사무 등 장악), 례부(감옥, 형벌, 노비, 재판 등 장악), 신부(산림, 도로, 건축, 관청수공업 등 장악) 등이였고 매 부의 장관을 경이라고 하였다.

발해에는 3성6부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치에 참가하는 《3사3공제도》도 있었다.

3사는 태사, 태부, 태보였는데 국왕은 이들을 신하로 대하지 않고 스승으로 대우하였다. 3공은 태위, 사도, 사공으로서 국왕을 도와 나라의 정치를 하며 어느 부서나 다 통관할수 있었다. 이 외에도 관리들의 죄행을 다스리는 중정대와 문적원, 전중시, 종속시, 태상시, 사빈시, 대농시, 사장시, 주자감, 항백국, 화간원 등이 있었으며 이것들은 봉건귀족들 특히 왕실의 사치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기관들이였다.

ㆍ발해의 지방통치기구는 8세기 중엽에 5경 15부 62주로 정비되여있었고 각 주 밑에는 여러개의 현들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5개부에 경(京)을 두었다. 상경룡천부는 발해의 수도(녕안현 발해진)였으며 중경현덕부는 화룡, 남경남해부는 북청, 서경압록부는 집안, 동경룡원부는 부거에 위치하고있었다.

부의 장관을 도독, 주의 장관을 자사, 현의 장관을 현승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관할지역의 민사행정뿐아니라 재판권, 군사권까지도 그러쥐고 인민들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던 왕권의 대리자들이였다.

• 군대제도

발해의 군대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어져있었다.

ㆍ중앙군은 위(衛)라는 이름을 가진 8개의 군부대로 편성되여있었는데 매 위에는 대장군, 장군을 비롯한 무관들이 있고 평균 12~15개의 사(작은 부대)가 소속되여있었다.

발해의 중앙군에는 왕을 호위하는 금군이 따로 있었다.

ㆍ지방군은 부, 주, 현을 단위로 조직된 부대(지방장관 지휘)와 요충지(거란, 당, 신라 등과 린접한 지역)들에 독립적인 체제를 가진 부대들로 이루어져있었다. 그중에서도 기본은 부, 주, 현을 단위로 편성된 부대들로서 이 부대들은 도독(혹은 절도사), 자사, 현승 등 지방관들이 겸임하여 지휘하였다.

발해의 군대수는 성립 초기에 10만이였던것이 9세기경에 이르러서는 20만으로 장성하였다.

• 발해에서는 토지제도와 착취제도도 정비되여있었다.

발해통치자들은 699년에 문무관료들에게 벼슬등급에 따라 일정한 토지의 수조권과 산판의 사용권을 주는 《전시과》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전세는 토지 1결에서 30말씩 받도록 정해놓았다.

이와 함께 인민들로부터 공물, 부역을 통한 착취제도도 정비하였다.

△ 후기신라에서의 봉건관계의 강화

후기신라도 봉건적통치체제를 정비강화하였다. 후기신라의 통치배들은 인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중앙과 지방의 통치기구, 군대제도를 정비해나갔다.

― 통치기구

• 후기신라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제부터 강화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귀족민주주의합의기구인 《화백》의 기능을 약화시키여 왕의 정치를 위한 자문기관으로 만들고 수석인 상대등의 권한을 제한하였다. 그리고 전기신라때 꾸려진 중앙통치기구를 확대강화하면서 새 기구를 내왔다.

ㆍ주요통치기구

이미 651년에 설치한 《집사부》(829년에 집사정으로 고침)의 지위를 더욱 높이였다. 즉 《집사부》를 여러관청우에 서서 그것들을 통제하며 왕의 명령을 직접 집행하는 최고행정기관답게 더 강화하였다.

그리고 다른 중앙급기관들을 늘이거나 새로 설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관리들의 임명과 해임을 담당한 관청인 위화부의 기구를 늘이고 그 격을 훨씬 높이였다.

이밖에 각 부문을 담당한 좌, 우 리방부, 사정부, 선부, 공장부, 례작부 등 관청을 새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전기신라때부터 내려오던 중앙행정기관들인 병부, 조부, 창부, 례부, 습부의 기구정원을 훨씬 늘이였다.

ㆍ지방행정구역을 전면적으로 재편성

후기신라는 왕권의 지방침투를 강화하는 방향에서 지방통치기구를 정비강화하였다.

7세기 후반기에 지방통치기구는 9주(도급행정단위) 5소경(주요지방도시)에 117개의 군, 293개의 현으로 되여있었다. 주의 장관은 도독, 소경의 장관은 사신, 군의 장관은 태수, 현의 장관은 소수 혹은 현령이라고 불렀다.

지방장관들은 모두 국왕이 직접 임명, 파면하며 관할지역의 행정, 재판, 군사 등 전반적권력을 틀어쥐고 인민들을 억압착취하던 왕의 대리자였다.

후기신라는 중요한 행정단위에 외사정(外司正)을 파견하였는데 매주에 2명, 매군에 1명씩 파견하여 지방관리들에 대한 감찰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 군대제도의 정비강화

후기신라는 군대제도를 더욱 정비강화하고 군대수를 늘이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는데 특히 중앙군을 많이 늘이였다.

중앙군으로는 9서당, 6정, 4설당 등이 있었다.

9서당은 9개의 군부대였는데 3개의 서당은 신라사람들로 이루어져있었고 2개 서당은 이전 백제사람들로, 다른 3개 서당은 이전 고구려사람들로, 1개 서당은 이전 말갈사람들로 편성한것이였다. 9서당밖에도 중앙군에는 계금당, 백관당, 경어갑당 등이 있었다.

6정은 대당, 귀당, 한산정, 우수정, 하서정, 완산정 등의 이름을 가진 6개 부대였고 4설당은 노당, 운제당과 충당, 석투당의 이름을 가진 기술병종부대였다.

후기신라는 중앙군을 수도와 그 주변에 많이 배치하였는데 그의 기본임무는 수도를 방위하는것이였다.

지방군의 기본은 10정, 5주서, 9주만보당 등으로 불리우는 여러개의 부대로 편성되여있었다.

지방군의 군종으로서 륙군과 수군이 있었다.

륙군(기본)은 보병, 기병,  특수병종(4설당<노당, 운제당, 충당, 석투당>, 개지극당, 장창당)으로 이루어졌으며 무관들로는 장군, 대감, 제감, 소감, 당주 등이 있었다.

후기신라의 군대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봉건국가를 지키면서 자주성을 위한 인민들의 투쟁을 억누르고 봉건적지배를 강화하는데 복무하였다.

―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적지배권의 강화

전국의 토지와 인민에 대한 장악과 지배는 중앙집권적봉건국가의 물질적기초를 이룬다.

후기신라의 통치배들은 정치적권력의 힘에 의거하여 인민들과 토지에 대한 국가적인 장악과 지배를 강화하려고 책동하였다.

816년에 작성된 신라장적을 통해 그 일단을 엿볼수 있다.

후기신라는 722년에 《정전제도》를 실시하였다.

《정전제도》는 일반농민장정(15살~60살)들에게 일정한 규정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주고 생산물을 착취하는 제도였다. 즉 장정당 2결의 토지를 주고 조세, 공물, 부역 등의 착취와 군역의 의무를 지웠다.

이처럼 후기신라의 통치배들은 인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더욱 강화할수 있도록 봉건적통치제도를 신속히 정비보강하여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