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고구려의 강성, 후부여의 통합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는 넓은 령토와 발전된 문화를 가진 강대한 나라였으며 고구려인민들은 매우 용감하고 애국심이 강하였습니다.》  

고구려시기는 지난날 우리 나라 력사에서 가장 강했던 때였다. 고구려는 오랜 기간 동방의 강성대국으로 이름을 떨치였다.

고구려가 강대한 나라로 될수 있은것은 고구려인민들이 높은 애국심과 상무적기풍을 지니고있었으며 외세에 아부굴종하는 사대주의를 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1) 고구려의 강성

△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

- 고구려의 상무기풍(尙武氣風)

고구려의 강성은 고구려사람들속에서 상무적기풍이 강하게 지배하였으며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기풍으로 되여있은것에서 표현되였다.

자기 나라를 방위하는것을 가장 영예로운 일로 여겼던 고구려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무술을 련마하고 체력을 단련하기 위하여 힘썼다. 어려서부터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 등 무술을 즐겨배웠으며 달리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체육을 통하여 늘 몸을 튼튼히 단련하였다. 그것은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동명왕과 그의 맏아들이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는것과 고구려에서는 마을들에 《경당》을 지어놓고 청소년들에게 글과 무술을 가르쳐주었다는 옛 기록이 잘 보여준다.

고구려에서는 오락과 경기도 모두 무술을 기본으로 하였다.

 

 

고구려사람들이 제일 즐겨한것은 사냥과 사냥경기, 말타기와 활쏘기였다. 약수리무덤벽화, 덕흥리무덤벽화를 비롯한 무덤벽화들에는 말을 타고 내달리면서 활로 범, 곰, 사슴들을 사냥하는 통쾌한 장면들이 묘사되여있다. 이것은 실지의 분위기속에서 진행되는 일종의 무술경기였다.

고구려사람들은 씨름, 수박 등의 경기와 놀이도 널리 진행하였다.

씨름무덤, 안악3호무덤(고국원왕무덤) 등의 벽화에 나타난 씨름, 수박 등의 장면은 그것을 말해주는 자료의 하나이다.

이처럼 고구려에서는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무술련마와 신체단련에 힘썼기때문에 누구나 강한 육체적힘과 의지, 훌륭한 무술을 지니고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평가하고 등용하는데서도 무술에 능하고 지혜와 용맹성이 있는가를 중요하게 보았다.

이러한 상무적기풍이 고구려사람들의 고유한 생활적기풍으로 되게 된것은 나라가 세워진 초기부터 강대한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방위하기 위한 전쟁을 끊임없이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고구려력사발전의 특성과 관련되여있었다.

― 강대한 군사력

고구려군대는 보병과 수군으로 구성되여있었는데 보병에서 기본은 기병부대였다. 고구려는 용감하고 무술에 능한 30만의 상비무력을 유지하고있었으며 외래침략자들이 달려들면 전민이 떨쳐나서 적들과 싸우군 하였다.

고구려의 30만 상비무력은 애국심이 높고 무술에 능한 군인들로 이루어져있었다. 여기에서 상무기풍은 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자주권을 지킬수 있게 한 중요한 담보였다.

고구려군대는 당시로서 우수한 무기무장과 방위시설을 갖추고있었다.

고구려의 수십만 대군은 강철제무기를 비롯한 당시로서 가장 훌륭한 여러가지 무기로 장비되여있었다.

공격용무기로서는 활, 칼, 창이 기본이였다. 고구려의 맥궁과 고리자루가 달린 긴칼, 긴창 등은 성능이 좋아 이웃나라들에까지 널리 알려져있는 무기였다. 이밖에 쇠뇌, 도끼, 갈구리, 포차, 등 성능이 좋은 무기로 준비되여있었다.

방어용무장인 쇠갑옷과 쇠투구로 무장하고 쇠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돌진하는 고구려의 기병이 유명하였는데 이것은 침략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 되여있었다.

 

 

고구려는 온 나라에 견고한 산성을 조밀하게 배치하여 강력한 방어요새를 이루어놓았다.

고구려의 성방어체계는 전연방어체계, 종심방어체계 및 위성방어체계 등 세가지로 되여있었다.

전연방어체계에 속하는 성들은 모두 국경선부근에 두었으며 종심방어체계에 속하는 성들은 모두 수도로 들어오는 통로들에 배치되여있었다. 그리고 위성방어체계에 속하는 성들은 수도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그 둘레에 세워져있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강력한 성방위체계를 세우고 그 어떤 침략자도 물리칠수 있게 나라의 방위를 튼튼히 하였다. 

- 경제력의 강화

고구려에서 농업생산력은 중세기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한 대표적인 실례로서 645년전쟁시 개모성에 10만석, 료동성에 50만석의 식량이 저축되여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런 기준으로 보면 전국적인 저장량은 수백만석에 달하는것으로 되였다.

농업과 함께 목축업도 발전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소, 말, 양, 돼지, 개 등 집짐승기르기를 많이 하여 특히 말을 많이 길렀는데 고구려의 《과하마》(果下馬)가 유명하였다.

645년 안시성전투때 고구려응원군은 소와 말을 각각 5만마리이상 가지고있었다. 따라서 전국적인 수자는 대단히 많았을것이라고 보아진다.

소와 말의 증대는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 되였다.

수공업 특히 제철제강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무순 고이산성에서 여러가지 종류의 철기가 한꺼번에 대량출토되였으며 강원도 철령에서 각이한 고구려의 기마모형이 모두 64개나 나왔다. 이것은 고구려의 제철제강업이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발전되여있었다는것을 뚜렸이 보여주고있다.

2) 고구려의 령토확장과 후부여의 통합

△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고구려강성은 반침략투쟁을 통하여 령토를 확장한데서 표현되였다.

고구려는 국토통일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나라를 세운 첫 시기부터 서쪽의 침략세력을 물리치는 어려운 전쟁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힘을 기을이였다.

• 전한(前漢)의 침략을 반대한 투쟁

한나라침략자들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북쪽땅을 강점하였을뿐아니라 고구려에까지 침략의 마수를 뻗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한나라침략세력을 맞받아 타격을 가하였다.

고구려인민들은 자기 나라로 밀려드는 침략의 마수를 꺾어버리고 더 나아가서 동족의 나라인 고조선의 북쪽지역(한4군지역)을 강점한 침략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따라서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은 처음부터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과 밀접히 결합되여 벌어졌다.

고구려인민들의 용감한 투쟁에 의하여 현도군은 계속 서쪽 무순방면으로 밀려나고 B.C. 82년에 진반, 림둔 2개군이 페지되게 되였다.

• 후한(後漢)침략을 반대한 투쟁

28년 위나암성(집안)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적들은 고구려의 중심부에까지 기여들어 성을 수십일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장수 을두지의 계략으로 대참패를 당하였다.

고구려는 그후 49년에 후한의 북부지대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여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에서 적의 뒤통수를 타격하였으며 105년에는 료동을 공격하여 료동방면의 6개현을 함락하였다.

그리하여 현도군소속 3개현이 200리 서쪽으로 쫓겨갔다.

146년 고구려는 서안평(료동반도 동남, 압록강하구지방)으로 진격하였다.

고구려군은 이곳에 와있던 락랑군태수를 포로하였으며 락랑군 대방현령을 처단하였다.

172년에는 좌원전투에서 승리를 이룩하였다. 172년 11월 후한은 대군을 보내여 고구려땅 깊이 침략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명림답부(67년-179년)의 청야수성전술(淸野守城戰術)에 걸려 패하였으며 고구려군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 고구려는 239~246년 고구려-위전쟁에서 정예기병 5 000명으로 적 8 000여명을 살상함으로써 위나라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

• 고구려의 유주진출

342년에 연나라(전연-모용선비가 세운 나라)침략군이 모용황의 지휘밑에 고구려의 환도성을 공격하여 고구려태후를 잡아갔으며 미천왕의 시체를 가져갔다.

고구려는 그후 연나라에서 큰 혼란이 조성된 기회를 리용하여 370년 10월 전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10여일만에 만리장성을 넘어 유주지역까지 진출하여 악질관료들을 처단하고 그 지역의 13개군을 차지하고 진을 유주자사로 임명하였다.

고구려는 376년 초까지 유주지역에 주둔해있으면서 전연침략세력의 잔여분자들을 철저히 진압소탕하였다.

 

※ 1976년에 발굴된 덕흥리무덤 벽화자료(600여자의 묵서)

유주진출이 가지는 의의

ㆍ고구려서쪽에 형성된 전쟁의 발원지를 없앤것

ㆍ고조선의 옛땅을 완전히 수복한것

ㆍ삼국통일위업을 적극적으로 밀고나갈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것

ㆍ대외적지위를 한층 높여준것

 

△ 삼국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고구려강성은 삼국통일을 성과적으로 추진한데서 표현되였다.

고구려가 국토통일을 중요시하고 거기에 힘을 넣은것은 동족의 나라인 백제와 신라를 통합하여 대강국을 일떠세우려는 목적에서 나온것이였다.

삼국의 통일은 당시 우리 나라 력사발전의 합법칙적요구였다.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여 고구려는 삼국의 통일을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밀고나갔다.

고구려는 4세기 70년대까지 주로 외래침략세력을 몰아내고 고조선시기의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에 힘을 넣으면서 남방진출도 꾸준히 벌려나갔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3세기 말경에 황해도일대까지 진출할수 있었으며 그에 토대하여 3세기 중엽(247년)에는 지금의 평양을 나라의 림시수도로 꾸리고 4세기 중엽에는 장수산일대에 남평양을 건설하여 삼국통일을 위한 중심기지, 전방기지로 삼았다.

고구려는 삼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외래침략을 반대하는 투쟁과 밀접히 결합하여 힘있게 밀고나감으로써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았을뿐아니라 온 강토와 겨레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외래침략세력을 물리치고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에 주되는 힘을 넣으면서도 삼국통일을 위해 남방진출을 꾸준히 진행해나갔다.

• 고구려는 4세기 후반기부터 남방진출을 본격적으로 다그쳤다.

당시 삼국통일을 추진하는 고구려에 맞선 주되는 세력은 백제였다. 4세기 중엽경에 백제는 강화된 국력에 토대하여 고구려의 남방진출을 가로 막고 북상을 기도하고있었다.

고구려와 백제사이의 첫 충돌은 369년에 치양(배천)에서 벌어졌다. 이때 고구려는 2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의 치양을 공격하였으나 백제군의 반격을 받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371년 10월 3만명의 백제군의 평양성(남평양)공격을 물리치고 375년 수곡성(황해북도 신계군)을 쳐서 함락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이러한 일진일퇴가 한동안 계속되였다.

390년 광개토왕(374~412년)시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는 남방진출을 본격적으로 다그쳤다.

396년 광개토왕이 거느린 고구려군대가 백제수도로 육박하였다. 당황한 백제의 아신왕은 급히 화의를 제기하고 자기가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고구려는 백제를 제압함으로써 세나라 호상관계에서 결정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남방진출을 더욱 강력히 밀고나갈수 있게 되였다.

고구려는 백제를 꺾어놓고 군대를 점령지역에서 대부분 철수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것은 백제가 속국으로 전락된 조건에서 점차적방법으로 통일을 이룩할수 있으리라고 타산하였기때문이였다.

그러나 백제통치배들은 고구려앞에서 한 맹세를 배반하고 비밀리에 보복준비를 갖추었다. 백제는 399년 왜(백제, 가야계통의 왜)의 군사를 끌어들여 고구려의 보호를 받던 신라를 굴복시키고 다음 고구려를 치려고 꾀하였다. 백제-가야-왜련합군이 신라로 밀려들기 시작하자 신라왕은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광개토왕은 이 요청을 접수하고 400년에 5만명의 군사를 보내여 신라군과 협력하여 백제-가야-왜의 련합군을 짓부시면서 임나가라(오늘의 김해지방)지역에까지 진출하였다. 신라의 나물왕은 감격하여 직접 고구려에 찾아와 광개토왕에게 사의를 표시하고 조공을 하였다. 407년에 고구려는 또다시 5만명의 대군으로 백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광개토왕시기 고구려는 세나라 호상관계에서 결정적우세를 차지하였으며 삼국통일을 더욱 강력히 밀고나갈수 있는 확고한 담보를 마련해놓았다.

광개토왕시기 고구려는 남방진출에 힘을 넣으면서도 국경지대에 이따금 침입하여 소란을 일으키군하던 서북쪽의 비려와 식신을 정복하였으며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복하고 완전히 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광개토왕시기에 고구려의 령역은 사방으로 각각 수백리이상 더 확장되였고 전례없이 강대한 나라로 되였다.

• 평양천도와 새수도건설

고구려는 427년(장수왕 12년)에 기본수도를 국내성으로부터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였다. 당시 평양의 중심은 오늘의 대성산일대였다. 고구려는 수도건설을 크게 벌려놓았다.

처음 대성산일대에 천도하여 안학궁, 대성산성을 건설하였다.

고구려는 대성산 소문봉 남쪽기슭에 38만㎡의 굉장히 큰 궁성을 쌓고 그안에 수십채의 웅장한 궁전(중궁은 길이 87m, 너비 27m나 되는 큰 건물)들을 앉히였다. 또한 대성산에는 수도방위성인 7 076m의 큰 산성을 쌓았다.

고구려는 평양천도를 하면서 시조 동명왕의 무덤도 함께 옮겨왔다.

고구려는 평양을 건설하면서 수도방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방 100~120리 거리에 큰 산성을 쌓아 위성방위체계를 이루어놓았다. 북쪽의 청룡산성, 서쪽의 황룡산성, 남쪽의 황주산성, 동쪽의 흘골산성 등이 바로 그러한 위성방위성들이였다.

강화된 국력에 기초하여 586년에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기였다.

552~586년까지 35년간 평양성을 건설하였다.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큰 력사적의의를 가지였다.

고구려는 평양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고조선계승국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뚜렷이 하며 평양의 전통적지위에 의거하여 강대한 통일국가를 일떠세울수 있는 조건을 지어놓았다.

고구려는 수도천도를 계기로 평양을 남방진출의 책원지, 후방기지로 더욱 튼튼히 꾸리고 그에 의거하여 삼국통일위업실현에 새로운 박차를 가할수 있게 되였으며 백제, 신라와의 접촉과 래왕을 보다 활성화하여 정치, 경제, 문화적 공통성을 더욱 강화할수 있게 되였다.

• 평양천도후 삼국통일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본격화

5세기 중엽이후 남부정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즉 신라가 차츰 백제편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신라를 견제하면서 백제에 계속 공격의 화살을 집중하였다.

고구려는 중 도림을 백제에 파견하여 개로왕으로 하여금 대규모건설을 벌리게 함으로써 국고를 비우고 혼란이 조성되게 하였다.

그리고는 475년 9월 3만의 군대로 백제 수도 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철수하였다.

529년에 다시 대규모적인 공세를 취하여 오곡벌전투에서 백제군을 완전히 격퇴하였으며 아산만-금강계선까지 밀고나갔다.

이와 함께 신라에 대한 공세도 취하였다.

480년대 중엽부터 고구려는 백제-신라의 련합을 짓부시면서 남방진출을 강화하였다.

고구려는 481년 3월에 호명성 등 7개성을 점령하고 계속하여 신라수도로부터 120리밖에 안되는 미질부(경상북도 흥해)까지 진격해들어갔다.

이 공격작전을 계기로 고구려는 청하계선을 확보하고 그 이북지역에 지기의 군, 현을 설치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남쪽경계는 아산만-금강-소백산줄기-청하계선에 이르게 되였다.

고구려의 남방진출은 국토통일위업을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게 하고 삼국통일정책실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가 차지한 령역은 서북-내몽골동부, 북-흑룡강남쪽류역, 동북-우쑤리강류역을 넘어 흑룡강하류, 남-아산만으로부터 청하계선에 이르게 되였다. 즉 동족의 나라 전령토의 90%를 차지하였다. 이것은 백제, 신라, 가야를 합친것의 10배에 달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사실상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대강국으로서 우리 나라 정세전반을 좌우지하였다.

고구려의 선진적인 정치, 경제, 문화적인 성과들이 백제, 신라, 가야 등 나라들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였으며 고구려의 강대한 정치군사적위력을 내외에 널리 시위할수 있게 되였다.

△ 후부여의 통합

- 후부여국의 변천

후부여는 성립후 비교적 짧은 기간에 국력을 회복하고 봉건국가로서의 발전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후부여는 3~4세기경부터 급격히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285년 모용선비족이 후부여의 수도에까지 침입하여 많은 재물과 주민 1만여명을 랍치해갔다.

346년에는 전연왕 모용황이 1만 7 000명의 기병으로 침입하여 왕이하 5만명을 랍치해갔다. 이 전쟁에 의하여 후부여는 동부여와 북부여로 갈라지고 실제상 국가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였다.

- 후부여국의 통합

고구려는 동족의 나라인 부여통합에 큰힘을 넣었다.

346년전쟁후 고구려는 후부여의 파국적상태를 포착하고 4세기 70년대 부여지역에로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후부여의 대부분과 북부여를 통합하였다.

광개토왕(391~412년)시기 고구려는 동부여통합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광개토왕비문자료에 의하면 대왕이 20년(경술)에 공격하여 점령한 성이 64개, 촌이 1 400개라고 되여있다.

494년에 동부여는 고구려에 자진하여 병합되였다.

5세기 말경 후부여는 물길세력의 부단한 침습으로 나라를 유지하기 힘들게 되였다.

당시 동부여의 민심은 이족의 지배밑에 들어가는것보다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에 병합될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동부여왕은 494년에 고구려에 찾아와 투항하게 되였다.

고구려에 의한 후부여국의 완전통합은 국토와 겨레를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고구려의 력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리정표로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