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에서 봉건적관계의 발전

 

△ 봉건적통치체제의 강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국가주권은 정치적지배권이며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는 기본요인입니다.》 

고구려의 집권자들은 봉건적통치체제를 강화하는데 큰 힘을 넣었다.

- 중앙집권적인 통치기구의 정비강화

고구려의 집권자들은 중앙집권적인 봉건통치체제를 정비보강하면서 그에 의거하여 인민들에 대한 정치적지배를 강화하였다.

국왕은 하늘의 자손으로 자처하면서 전제군주로서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초기에 왕권(봉건적중앙집권력)은 일정한 제한을 받았다.

고구려의 국왕은 계루부,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중 계루부출신이 하였으며 5부귀족을 중심으로 제가평의회(諸加評議會)를 운영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후국(侯國)을 인정하였으며 후국에는 자기의 통치기관과 왕이 있었다.

고구려는 점차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제가평의회와 후국을 없애고 4세기 중엽에 국왕은 황제, 천자로서의 체모를 실질적으로 갖추었다. 고구려의 왕은 처음부터 천자, 대왕으로 행세하였다.

• 중앙통치기구

국왕밑에 최고의 관직으로서 국상(國相)이 있었는데 국상은 왕밑에서 나라의 전반사업을 총괄하는 최고실권자였다.

국상직의 명칭은 건국초기에는 대보였으나 2세기이후 정식 실시되였다.

국상은 종신이며 나라의 군정을 다 장악하고있었다. 166년에 연나부출신의 명립답부가 고구려의 첫 국상국상으로 되였다. 고구려후반기에 국상은 막리지로 바뀌였다.

국상(막리지)밑에는 세분된 중앙통치기구들이 갖추어져있었고 매 관청들에는 해당한 벼슬아치들이 배치되여있었다.

• 지방통치기구

고구려는 초기 여러개의 후국과 부(部), 성읍(군, 현)을 두었다가 점차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지방통치기구를 개편하였다.

고구려는 전국을 왕기와 외방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왕기는 수도부근의 직할지로서 5부로 이루어져있었는데 장관은 녹살이라고 하였다.

외방은 기본상 국가직할지인 고을로 이루어져있었는데 고을은 크기에 따라 주, 군, 현의 세등급으로 나뉘여있었다.

고을들의 소재지는 거의다 방어시설인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있었기때문에 많은 경우 성 혹은 성읍으로 불리웠다.

고구려에서 지방행정구역단위를 성을 중심으로 하여 설치한것은 지방행정체계가 그대로 국방체계로 되여있었음을 보여주는것이였다.

고구려의 지방통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별도(부수도, 림시수도)제의 실시였다.

평양천도후 별도로는 졸본, 국내성, 북평양(봉황성), 남평양(신원-한성) 등이 있었다.

별도제는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후 첫 수도였던 졸본을 별도로 삼은것이 그 발단으로 되였다.

별도는 부수도, 림시수도로서 수도와 거의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국왕이 와있게 되면 곧 수도의 기능과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견지에서 설정한 하나의 정치적중심지였다.

• 벼슬등급제도(品階, 位階)정비

고구려에서는 벼슬등급제도와 법률제도도 정비하였다.

통치기구가 정비강화되면서 봉건관료대렬이 늘어났다. 그에 따라 벼슬등급제도 정비하였는데 고구려 후기의 벼슬등급은 1품~9품(매품에 正, 從의 구별이 있음)으로 되여있었다.

고구려의 벼슬등급은 후기에 이르러 토졸(대대로)로부터 선인에 이르는 15개이상의 등급으로 분화되였다.

이 벼슬등급을 다시 크게 묶어보면 세마디로 갈라볼수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관료층이 크게 3개층으로 이루어져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각종 법률과 규정들을 제정실시하면서 법률제도를 정비하였다.

373년 고구려는 각종 법률과 규정들을 종합체계화하여 률령을 발포하였다.

△ 봉건적토지소유제도와 수탈체제의 정비

- 봉건적토지소유제도

고구려시기의 토지소유형태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고구려의 봉건적토지소유형태에는 크게 봉건지주들의 사적토지소유형태, 국가적토지소유형태, 소농민적토지소유형태가 있었다.

봉건지주들의 사적토지소유형태는 고구려에서 주도적이며 지배적인 토지소유형태였다.

이 사적토지소유형태는 지주가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소작농민들에게 부치도록 하고 대신 그 소작료를 현물로 수탈하는 지주적경리형태를 말한다.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나라안(수도, 경기)의 만여명이나 되는 대가(大家)들이 농사짓지 않고 놀고먹는데 하호(下戶)들이 멀리서 곡식과 물고기, 소금 등을 날라다 바친다.》고 하였다.

국가적토지소유형태는 국가기구운영을 비롯한 국가적용도의 충족을 위하여 국가기관에 배당된 토지와 왕실의 소유지에 대한 경영을 대부분 농민들로부터 지대를 착취하는 방법으로 운영하는 경리형태였다.

대보(大輔)인 협보가 유류왕에게 쫓겨나 관원(官園)의 관리원으로 임명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관청소유지(국유지)의 관리원이 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소농민적토지소유형태는 농민이 적은 토지를 소유하고 자기힘으로 운영하는 경리형태였다.

194년 진대법(賑代法)을 실시한 사실을 통하여서도 알수 있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농호를 대상으로 실시한 국가적인 고리대착취였다.

- 봉건적수탈체계

착취계급은 토지에 대한 봉건적소유에 기초하여 인민들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였다.

고구려봉건국가의 근로대중에 대한 착취형태에는 봉건지주들에 의한 착취형태와 조세와 공물, 부역 등에 의한 착취형태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조세, 공물, 부역에 의한 착취가 기본을 이루었다.

봉건지주들에 의한 착취형태에서 기본은 지대에 의한 수탈(지대의 주되는 형태는 생산물지대)이였다.

관료지주들은 관권과 신분적특권을 리용하여 경제외적수탈을 가혹하게 감행하였다.

봉건국가에 의한 수탈도 가혹하였다.  최대의 수탈자는 봉건국가 자체였다.

봉건국가의 기본착취형태인 조세는 봉건국가의 수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었다.

조세는 봉건국가가 전국의 토지로부터 그 수확물의 일정한 부분을 현물(낟알)로 수탈하는 세였다.

조세는 호를 단위로 하여 수탈하는 호세, 사람을 단위호 하는 인세가 있었는데 조세를 호를 단위로 징수할때에는 토지소유정도에 따라 3등급(1섬, 7말, 5말)으로 나누어 수탈하였으며 사람을 단위로 하여 징수할 때에는 곡식과 천으로 수탈하였다.

인세는 군역대상자를 기본으로 하여 징수하였는데 사람수에 따라 1인당 곡식 5섬, 천 5필을 내야 하였다.

결국 조세량은 1호에 3명의 조세대상자가 있는 경우에 호세는 곡식 1섬, 인세는 곡식 15섬, 천 15필을 내야 하였다.

공물에 의한 착취도 매우 가혹하였다.

공물은 봉건국가가 관청과 왕실에 필요한 지방특산물을 인민들로부터 현물로 빼앗아내는 착취형태였다.

농민들은 천, 물고기, 소금 등을 공물로 바쳐야 하였고 수공업자는 각종 수공업제품을 바쳐야 하였다.

부역도 역시 봉건국가가 인민들에게 부과한 강제적인 무상로동이였다.

부역은 그 종류가 매우 잡다하여 농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생산부문과 분야를 포괄하였다.

부역대상자들은 궁전건설, 성쌓기, 도로건설, 무덤만들기 등에 강제동원되여야 하였다.

이렇듯 봉건지주계급과 봉건국가의 가혹한 수탈로 말미암아 농민들은 끊임없이 파산몰락되여 빈궁속에서 헤매였다.

△ 봉건적계급신분관계의 정비

고구려의 봉건지배계급은 저들의 특권적지위를 공고히 하고 반인민적인 통치를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인민들을 신분제도라는 쇠사슬에 얽어매놓았다.

신분제도는 계급관계를 법적으로 고착시킨 제도로서 봉건사회에 이르러 더욱 째여지게 되였다.

고구려봉건사회는 신분제도에 기초하여 크게 지배계급신분과 피지배계급신분으로 갈라졌다.

지배계급신분(착취계급)에는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을 틀어쥔 왕과 귀족관료, 향류, 지주 등이 속하였다.

왕은 봉건지배계급의 대표자였으며 최고의 특권신분층(왕의 가까운 일가나 그와 동등한 대우를 받던 자로서 왕자, 왕의 장인, 연나부우두머리의 맏손자 등)인 고추가, 일반귀족관료인 가(대가-상층귀족관료, 소가-하층귀족관료), 향류, 평민출신의 지주나 대상인,  상층 중들도 지배계급신분에 속하였다.

피지배계급신분(피착취계급)은 노비, 부곡민, 평민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권리하며 매우 비참한 처지에서 생활하였다.

노비(奴裨)는 가장 가혹한 천대와 멸시를 받던 최하층신분으로서 그들의 처지는 상전들이 마음대로 사고 팔수 있었고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 수탈을 당하였다.

노비의 류형에는 소속에 따라 사노비와 공노비, 거주관계에 따라 솔거노비와 외거(별거)노비로 구분되였다.

부곡민(部曲民)은 천민들의 집단적인 거주지인 부곡에 사는 주민들을 말한다.

평민(平民, 良人)은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운》사람으로 되여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봉건국가에 얽매인 예속인이였고 평민의 최하층은 하호였는데 이들의 처지는 노비와 거의 비슷하였다.

고구려의 계급신분관계를 비롯한 제반 사회관계들은 후부여나 백제, 신라, 가야는 물론 후세의 봉건국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 나라의 중세기 봉건적제관계, 봉건제도의 기본틀은 고구려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