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구려

 

△ 구려국의 성립과 령역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적사실들을 바로 평가하여 우리의 새 세대들에게 옳은 인식을 주도록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 구려국의 성립

구려는 우리 나라에 존재한 고대국가의 하나이다.

처음에 고조선의 정치적지배를 받는 후국으로 존재하다가 B.C. 15세기에 고조선에서 분리되여 B.C. 12세기 이전에 독자적인 노예소유자국가로 발전하였다.

고조선의 후국이였던 혼강류역의 구려지역에서는 B.C. 2000년기 중엽에 이르러 농업과 목축업, 각종 수공업들이 그 이전시기에 비하여 더욱 발전하였다.

구려는 초기에 고조선(전조선)의 령역안에 포함된 후국정치세력으로 존재하다가 고조선에서 분리되여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등장하였다.

생산의 장성으로 보다 많은 재부를 축적한 구려의 통치자들은 강력한 군사력에 의거하여 자기의 정치적지배권을 더욱 강화하면서 고조선의 왕권에 대립되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라났다.

당시 구려지역에는 연나부, 관나부, 순나부, 계루부, 절나부 등 5부의 정치세력이 자라나고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세력은 연나부세력이였다.

후국통치층의 중추를 이루고있던 연나부세력은 점차 주변의 관나부, 순나부, 계루부, 절나부 세력들을 규합하여 보다 강력한 세력으로 자라났으며 전조선말기에 이르러서는 후국왕으로서의 의무를 잘 집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B.C. 15세기 중엽에 고조선(전조선)에서 왕조교체가 일어나자 그 지시에 복종하지 않았다. 이것은 구려후국이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등장하게 되였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결국 구려국은  B.C. 12세기 이전에 고조선(전조선)으로부터 분리되여 독자적인 국가로 발전하게 되였다.

고대중국의 력사를 기록한 《상서》나 《일주서》에서는 B.C. 11세기경에 구려가 중국의 고대국가들과 대외관계를 가지였던 력사적사실을 전하고있다. 

고대중국의 력사를 전하는 문헌중의 하나인 《일주서》 권7, 왕희해 제59에서는 B.C. 1059년에 건설된 성주의 락성식에 초청되여 온 당시 주나라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종족들의 명칭을 기록하고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락성식에는 여러 나라 사신들이 참가하였는데 그들의 좌석은 그 나라들이 위치한 방향과 대체로 일치하였다.

《일주서》에는 그러한 방향과 멀고 가까움에 따라 주나라 동북방에 있었던 나라와 종족으로서 고죽(孤竹), 불령지(不令支), 불도휴(不屠休), 산융(山戎) 등과 또 북방에 있던 고이(高夷)도 들어있다.

진나라 오경박사였던 공조는 이 고이에 대해 주석하면서 《고이는 동북이로서 고구려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이는 고구려가 아니라 구려로 보는것이 옳을것이다.

진나라 공조가 생존한 시기는 동진시기(317~420년)로서 이때에는 이미 오래전에 구려가 종말되고 그 계승국인 고구려가 강성하고있던 시기였다.

고구려가 존재해있던 당시의 사람인 공조로서는 혹 고구려에 선행한 나라로서 구려가 존재했다는것을 몰랐다든가 아니면 고구려의 전신국 구려가 곧 고구려와 같은 나라인것으로 인식하고 실제상 구려를 의미하는 고이를 고구려라고 주석한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공조의 이 주석은 일리있는 근거라고 인정된다.

《일주서》 왕희해편에 기록된 동방의 여러 나라 이름들은 실재한 력사적사실을 반영한것만큼 B.C. 11세기 서주의 동도-성주의 락성식과 관련된 기사에 구려의 명칭이 올라있는것은 당시 구려가 서주와 외교관계를 가지고있던 독자적인 나라였음을 말하여준다.

이것은 구려국이 고조선에서 분리된후 이 시기에 독자적인 고대국가로서 당당히 등장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 구려국의 령역과 중심지

• 고대국가 구려의 초기중기 령역

구려는 후국당시의 령역을 그대로 가지고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발족한 후에 나라의 통치체계를 확립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고조선에서 왕조교체과정에 조성된 정치적혼란기를 리용하여 얼마간 령토를 확장하였다.

구려국의 서변

구려국이 고조선(전조선)의 후국으로 존재하였을 때에는 대체로 오늘의 중국 료녕성 환인, 청원, 신빈현지역을 서쪽경계로 삼고있었다.

그러나 구려는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된 후 서쪽으로 일정하게 령역을 넓혔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자료들에 대하여 본다면 료녕성 본계시 남분역부근의 한 움무덤에서 1개의 청동단검이 발견되였는데 관측자들은 이 청동단검이 구려지역에서 나온것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또 중국 길림성 동풍현 대양진 조추구의 변형고인돌무덤에서는 비파형단검과 검자루맞추개 등이 나왔는데 그 일대의 유적유물은 화전현 서황산형의것과 류사하다.

B.C. 2000년기 중엽~B.C. 1000년기 초엽에 해당되는 유적유물가운데 돌관무덤과 그밖의 껴묻거리에서 무순, 신빈, 본계지구 등 태자하 중상류지역이 공통성을 보이고있는 사실은 구려의 령역이 서쪽으로 오늘의 본계시일대의 태자하류역-후에 량맥국지역까지 넓어졌다고 볼수 있게 한다.

구려국의 북변

구려는 고대국가로 등장한 후 남쪽으로는 후조선과 경계를 삼고 북쪽으로는 고대국가 부여와 린접하였다.

이 시기 구려, 부여 두 나라의 문화갖춤새에서의 차이점은 구려의 북변으로 보아지는 혼하상류의 청원현, 휘발하상류의 류하현, 두도강류역의 정우현, 무송현지역에서 부여와는 달리 고인돌무덤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분포되여있고 또 부여에는 없는 돌무지무덤들이 발견된것이다. 이 지역들에서는 돌무지무덤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할뿐아니라 도끼날형의 쇠활촉을 비롯하여 특색있는 유물들이 드러났다.

특히 장백현 14도구진 간구자에서는 강상무덤과 축조형태가 같은 돌무지무덤이 발견되였다.

지난 시기 고구려돌각담무덤의 연원을 강상무덤과 련결시켜 생각한것은 좀 거리가 있으며 구려나 고구려의 경우에는 간구자돌무지무덤에서 그 연원을 찾는것이 옳을것이다.

구려지역에서 부여와는 다른 무덤짜임새가 나타난 사실은 구려가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등장하면서 고조선의 돌무지매장풍습을 받아들였던 사실을 반영한 동시에 구려의 령역이 이 시기 합달령산줄기를 계선으로 북쪽으로 혼하상류의 청원현, 류하현, 매하구시(해룡), 정우현, 무송현일대에까지 미치고있었음을 짐작할수 있게 한다.

구려국의 남변과 동변

후조선시기 고조선의 령역에서는 일련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였다. 즉 후조선은 서쪽으로 령역을 더욱 확대하여 란하계선에 이르게 되였으며 이로부터 후조선의 서북변경은 료녕성 철령시일대에서 부여국과 접하게 되였다.

후조선의 령역은 오늘의 본계시, 관전일대를 거쳐 피난덕산줄기계선을 지나 평안남도 동북부계선에 이르게 되였으며 그것은 곳 구려의 남변으로 되였다.

구려의 동변은 옥저지방이였던것으로 볼수 있다.

《삼국지》동옥저전의 기록에는 옥저가 개마대산의 동쪽바다가에 있으며 그 지형은 동북이 좁고 서남은 길이 1 000리나 되며 북쪽으로 읍루, 부여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예맥과 접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알수 있는바와 같이 옥저(동옥저)가 고조선의 령역에 포함된 지역이라는것을 알수 있으며 동시에 옥저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구려가 동쪽으로 동옥저, 북옥저와 접하고있었다는것을 확인할수 있다.

따라서 구려의 동변은 백두산남부지역 량강도일대에까지 미치고있었다.

• 고대국가 구려국의 말기 령역

구려의 령역은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을것이나 그 말기에는 초기 고구려의 령역과 일치하였다.

그것은 구려지역에서 고구려가 성립되였기때문이다. 고구려 초기의 유적유물의 분포정형으로 보아 그 지역은 오늘날의 혼강을 중심으로 하고 압록강 중상류, 태자하 상류,혼하 상류, 이통하류역을 포괄하는 지금의 중국 료녕성 환인현, 신빈현, 청원현과 길림성 류하현, 통화현, 집안시, 림강현 그리고 우리 나라의 자강도지역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말기 구려의 령역도 대체로 이 지역을 포괄하였다고 볼수 있다.

• 구려국의 중심지

구려국의 중심지역은 고구려가 구려국을 직접 계승하였던 고구려 초기의 령역과 일치하였다고 볼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동방국가들에서는 도읍지(수도)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로 되여왔다.

고대국가 구려의 경우에도 례외가 아니였다.

고구려는 고대국가 구려를 계승하여 세워진 봉건국가인것만큼 고구려의 초기수도는 구려국의 말기수도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볼수 있다.

고구려의 초기수도인 동시에 구려의 중심지로 볼수 있는 졸본(홀본)지역은 고구려의 초기유적유물이 가장 많이 분포되여있는 환인지역이다.

오늘의 중국 료녕성동남부에 자리잡고있는 환인현은 료녕성의 동북산악지대로서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의 중류류역에 위치하고있다.

중심지는 환인진인데 북쪽은 신빈현, 서쪽으로는 본계현, 서남으로는 관전현, 동북으로는 통화현, 동쪽으로는 집안시가 있다.

구려의 중심지인 환인지역에는 현재까지 구려 및 고구려의 초기성으로 볼수 있는 적지 않은 성유적들이 조사확인되였다.

대표적으로 환인지역에서 오랜 성으로 볼수 있는것은 사고성자토성, 오녀산성이 있다.

오녀산성은 구려의 수도성이였다.

 

 

 

결국 구려국의 중심지는 흘승골성(졸본)으로서 오늘의 환인현일대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 구려국의 통치체제, 생산의 발전

- 통치체제

구려국의 최고통치자는 이였다. 구려국에서 최고통치자의 지위는 세습제에 의하여 계승되였다.

구려국의 국왕으로는 그 중심지역인 5부가운데서 오직 연나부출신귀족들만이 될수 있었으며 그밖의 4부의 귀족들은 왕의 지위를 차지할수 없었다.

이것은 구려국을 이룬 5부가운데서 연나부가 다른 부들에 비하여 가장 강한 정치세력이며 따라서 국왕은 다름아닌 연나부에서만 나오게 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구려국에도 제가평의회가 있었다. 이 제가평의회에는 구려국가의 상층통치배들과 각부의 지배층을 이룬 유력한 자들이 참가하였다. 이 제가평의회는 나라의 중요정사들을 협의하는 귀족민주주의적협의기구로서 소수 특권층들의 리익을 옹호하는 정치기구였다.

구려에도 부여에서와 같이 마가, 우가, 양가, 구가 등 가로 불리우는 중앙급관리들과 그 아래 관청들이 있었다.

구려국에서는 왕밑에 연나부출신의 귀족들이 중앙의 대신급관료로 임명되였다. 구려국의 지방행정단위는 5부로 편성되여있었다.

구려에서 중앙통치기구는 지배계급인 귀족들의 리익을 옹호하기 위한 기구였으며 제가평의회는 부분적으로는 국왕의 지나친 전횡을 제한하면서 연나부출신 국왕의 정치를 보좌하기 위한 귀족민주주의적합의기구로서 본질상 노예소유자계급의 독재기구였다.

구려국에는 또한 전국을 통치하기 위한 중앙관료들도 있었다고 보아진다.

구려에서는 지방통치기구도 중앙통치기구의 발전과 함께 정비되여있었다.

구려에서는 전국을 5부와 그밖의 여러 소국들로 갈라서 통치하였던것으로 인정된다.

원래 5부는 각기 독립적인 소왕국을 이루고있다가 그중 강한 연나부세력에 의해 통합되여 하나의 구려국을 이루게 되면서 구려국의 지방행정단위로 개편된것이였다.

5부가운데서 연나부는 국왕이 직접 다스린 직할지였다.그밖의 4부에 대해서는 국왕이 4부의 우두머리들인 대가들을 통하여 지배하였다.

구려국의 군대는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졌다.

군대의 주요무기는 비파형단검, 비파형창, 좁은놋단검, 좁은놋창, 청동도끼, 쇠도끼, 쇠창, 쇠활촉 등이였다.

집안시 오도령구문무덤에서 드러난 좁은놋단검, 청동창끝, 청동도끼, 도끼날형의 쇠활촉과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 남파동유적 웃문화층에서 드러난 쇠도끼, 쇠활촉, 자강도 위원군 룡연구 돌각담무덤에서 드러난 쇠도끼, 쇠비수, 쇠창 등은 그 일단을 보여준다.

군대의 상층은 가들이였으나 주력을 이룬것은 자급자족적자영소농민들이였다.

군대의 최고통수권은 국왕에게 있었으며 각 부의 군사들은 부의 우두머리들인 대가들에 의하여 지휘되였다.

- 생산의 발전

• 청동야금기술 및 제철수공업의 발전

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청동야금기술과 제철수공업이 발전하였다. 혼강류역과 압록강 중류일대를 중심으로 한 구려지역에서는 B.C. 1000년기에 들어서면서 청동기생산이 더욱 발전하였다.

B.C. 9~B.C.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 오도령구문의 한 돌각담무덤에서 나온 초기의 좁은놋단검, 좁은놋창 등 청동무기와 함께 청동도끼류와 잔줄무늬거울, 검집금구 등 청동기들은 당시에 청동주조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거기에는 또한 도끼날형의 쇠활촉도 끼여있었다.

이것은 구려지역에서 청동기생산의 발전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철기생산도 진행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구려에서의 제철수공업은 일찍부터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B.C. 1000년기 후반기의 유적들에서 철기가 많이 드러난 사실이 잘 말해준다.

압록강 중류의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 남파동유적 웃문화층(B.C. 4~B.C. 3세기)에서 나온 철기는 수십점에 달한다.

그중에는 도끼와 손칼, 송곳류, 활촉류, 낚시, 띠고리 그리고 고리쇠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자강도 위원군 룡연구의 한 돌각담무덤에서 나온 철기에는 도끼, 괭이, 호미, 낫, 반달칼, 비수 등 농공구류와 함께 두자루의 창이 끼여있었다. 이러한 철기자료들은 B.C. 1000년기 후반기에 구려지역에서 이미 철기가 분리, 보급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 농업 및 목축업의 발전

철기의 보급은 부침땅을 훨씬 늘일수 있게 하여 알곡생산을 증대시켰다. 농업이 발전하여 알곡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개, 돼지, 소 등 집짐승도 많이 길렀다.

특히 구려에서는 키가 작은 말들을 길렀는데 이러한 말들은 험준한 산발을 잘 달렸다.

각종 철제공구류의 생산과 보급은 목공업, 직조업 등 여러 부문의 수공업을 더한층 발전시켰다.

무성한 수림지대에서 산 구려사람들의 경제생활에서는 사냥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구려사람들은 또한 이름난 약초로 널리 알려진 산삼을 비롯한 여러가지 약초와 각종 산나물, 산열매류의 채집, 산천어와 같은 물고기잡이도 널리 진행하였다.

• 상업의 발전

구려에서 상업도 발전하였다.

그것은 B.C. 4세기-B.C. 3세기에 서북조선으로부터 중국의 하북성, 하남성에 이르는 지역에서 널리 류통된  명도전이 압록강 중류의 구려지역에서 많이 드러난데서 알수 있다.

구려에서 노예로동은 농업생산과 함께 제철야금업분야에 널리 리용되였다.

구려에서 노예소유자층은 국왕을 비롯한 연나부출신 대가들과 각부의 우두머리들이였다. 구려에는 자영소농민경리와 함께 공동체적경리형태도 존속하였다.

△ 구려국의 종말

자연지리적조건으로 하여 구려국에서는 농업분야에서 대규모노예제가 발전하지 못하였고 중소규모의 노예제정리, 특히는 개개의 가정이 한두명 또는 몇명의 노예를 부리는 정도의 노예제정리가 보편화되였다.

B.C. 1000년기 중엽부터 구려지역에서는 제철기술이 발전하여 주강제품을 생산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 남파동유적에서 나온 일부 철기를 분석한 결과는 구려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2300~2400년전에 주강제품을 생산하였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것은 구려사람들이 B.C. 4~B.C. 3세기에 이미 고온야금에 의한 주강제품생산을 진행하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값싸고 우월한 철기의 대량생산과 보급은 로동생산성을 높이는데서 결정적의의를 가지였다.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에 토대하여 구려사회에서는 봉건적생산관계가 확립되여갔다.

구려국 5부의 하나인 계루부에서 봉건적관계가 발생하고있던 B.C. 3세기 초에 부여에서 고주몽집단이 이동하여왔다.

그들은 계루부를 장악한 다음 B.C. 277년에 연나부왕권을 대신하여 고구려국가를 세웠다.

그리하여 노예소유자국가였던 구려국은 종말을 고하였다.

 

△ 복습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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