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만조선의 성립과 발전, 한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한 고조선인민들의 투쟁

 

△ 만조선의 성립

후조선에서 B.C. 1000년기 후반기에 들어설 무렵부터 움터 자라나기 시작한 봉건관계는 B.C. 3~B.C. 2세기경에 이르러 더욱 눈에 띄게 장성하였다. 그에 따라 계급적대립이 더욱 첨예화되고 지배층안에서 알륵과 대립도 날로 격화되였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B.C. 2세기 초에 서쪽변방 후국왕이였던 만이 정변을 일으켜 후조선왕조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세웠다.

바로 이 만왕조가 통치하던 시기의 고조선을 만조선이라고 한다.

 

※ 만왕조에 대한 외곡된 견해와 그에 대한 비판

연나라사람인 위만이 B.C. 195년에 1 000명의 망명객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와서 정변을 일으켜 왕이 되였다. 즉 만은 연나라 사람이니 만왕조(만조선)는 연나라사람의 왕조라고 주장

중국력사책 《사기》(B.C. 1세기책)에서 처음 이러한 주장이 나옴

만은 결고 연나라사람이 아니다.

근거;

ㆍ조선으로 올 때 조선옷을 입었다는것

ㆍ준왕이 결코 중국망명객을 후왕으로 임명하여 서부지역의 방어책임을 맡길수 없다는것

ㆍ정변이후 나라이름, 수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는것

ㆍ통치제도 역시 조선식으로 유지하였다는것

새 왕조를 세운 만이라는 사람은 원래 연나라의 료서지방에 살고있던 고조선사람이였다.

B.C. 3세기 초 연나라 진개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고조선이 서부지역을 얼마간 잃게 되였을 때 대부분의 고조선사람들은 강점지역을 벗어나 고국으로 왔으나 일부는 본래의 거주지역에 남게 되였다.

만은 그러한 잔류민의 후손이였다.

 

조선사람의 넋을 간직하고있던 만은 진나라말기에 폭동이 일어나 온 중국땅에 혼란상태가 조성되자 그 틈을 타서 B.C. 209년경에 1 000여명의 고조선사람들을 거느리고 조선옷차림으로 패수(대릉하)를 건너 귀국하였다.

후조선의 준왕은 이러한 만을 높이 신임하여 그에게 박사의 벼슬과 함께 서변100리 땅을 떼주어 후국의 왕으로 임명하였으며 복잡한 서부국경지대에 대한 방비를 책임지게 하였다. 당시 만의 후국은 패수동쪽, 요양하서쪽지역에 자리잡고있었고 그의 도읍지는 험독에 있었다. 후국의 왕이 된 만은 외적방어무력을 키우고 주변의 크고작은 토호세력을 묶어세워 정치군사적지반을 다져나갔다.

자기의 세력이 커지자 후조선왕조를 뒤집어 엎을것을 꾀하면서 정변의 기회를 엿보고있던 만은 B.C. 194년경에 준왕에게 침략군이 10개의 방면으로 쳐들어오니 왕궁을 호위하여야 하겠다고 거짓보고를 한 다음 기마대를 이끌고 왕검성으로 달려가 준왕을 몰아내고 왕자리를 빼앗아냈다.

준왕은 하는수없이 배를 타고 남쪽의 마한지역으로 쫓겨갔다. 그리하여 천수백년간 존속해온 후조선왕조가 무너지고 만왕조가 새로 서게 되였다.

이렇게 왕조교체가 일어났으나 새 왕조도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불렀고 수도 역시 왕검성(평양)에 그대로 자리잡고있었다.

△ 만조선의 발전

새로 선 만왕조의 집권층은 낡은 노예주계급과 결탁하는 한편 신흥봉건세력도 흡수하면서 왕권의 정치, 경제, 군사적지반을 강화해나갔다.

- 통치기구의 정비강화

만조선은 선행시기 왕조들 특히 후조선의 관료체계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앙과 지방에 보다 정연한 관직제도와 통치기구를 갖추어놓았다.

• 중앙통치제도

만조선시기에도 왕이 나라의 최고통치자로서 전제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그의 지위는 세습되여 왕자리는 만으로부터 아들, 손자 우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계승되였고 우거왕도 자기의 왕자리를 물려주기 위하여 아들을 태자로 삼았다. 만조선의 왕은 발전된 관료체계에 의거하여 전국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였다.

후조선과 마찬가지로 만조선에는 왕밑에 비왕, 상, 장군 등 중앙관직이 있었다.

비왕(작은 왕)은 왕의 정치를 보좌한 최고급의 측근관료였다. 왕의 위임을 받고 한나라 사신을 바래준 사실과 벼슬의 이름 등으로 보아 비왕은 왕을 도와 나라의 중요한 정사를 처리하였다. 비왕은 단군조선시기의 호가(봉가)에 해당하는 관직이였다.

비왕이 맡은 중요한 임무의 하나는 왕을 도와 군사를 통솔하는것이였다.

고조선의 상은 고위급의 중앙관료였다. 상은 나라의 중요한 정사와 관련하여 왕에게 자기의 의사를 직접 표명할수 있고 왕의 그릇된 처사에 대하여 《충고》할수도 있는 지위에 있었다.

고조선에는 상이 여러명 있었다. 《사기》조선렬전에 의하면 고조선-한전쟁(B.C. 109~B.C. 108년) 때 적에게 투항한 상만 하여도 3명이나 되였다고 한것을 보면 상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고 볼수 있다. 이러한 중앙의 상들가운데는 지방을 맡아 다스릴 임무를 지닌자들도 적지 않았다.

중앙에 상을 여러명씩 두는 관직제도는 대신급의 많은 가들을 둔 단군조선시기의 중앙관직제도에 따른 고조선의 고유한 제도였다.

장군은 군사를 맡아보는 고위급의 무관직이였다.

만조선에는 상이나 장군밖에도 후조선말기의 벼슬인 대부나 박사와 같은 관직도 있었고 또 상, 장군과 같은 대신급관직밑에 다시 여러 등급의 관직들로 이루어진 관료집단과 통치기구들이 갖추어져있었다.

• 지방통치제도

만조선에는 중앙통치기구와 함께 지방통치제도도 정비되여있었다.

만조선의 지방통치제도는 선행시기의 제도들을 거의 유지하고있었다.

만조선시기에도 지방행정단위는 크게 국왕이 직접 다스리는 지역과 후왕들이 관할하는 후국들로 갈라져있었다.

나라의 중심지역인 평양을 비롯한 적지 않은 부분은 국왕의 직할지로서 여러 지역으로 나누고 중앙의 상들에게 분담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B.C. 109년경에 수도 왕검성일대를 관할한것은 조선상 로인이였고 니계지방을 다스린것은 참이였다. 이러한자들은 다 그 지방출신이거나 해당지역과 깊은 인연을 가진자들이였다.

이것은 단군조선시기에 구가라는 중앙관료 한명이 지방행정을 담당하였던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만조선시기에 이러한 제도를 실시한것은 단군조선초기와는 달리 왕의 직할지가 크게 확장된 조건에 맞게 왕권의 지방침투를 보다 원활하게 실현할 목적에서 출발한것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신들의 세력지반을 증대시켜 왕권에 대립되는 세력을 낳는 공간의 하나로 변모되여갔다.

만조선에는 국왕의 직할지밖에 여러개의 후국들이 있었다. B.C. 128년경의 예군 남려나 부조예군 등은 다 그러한 후국의 통치자들이였다.

만조선에는 부수도제도도 정비되여있었다. B.C. 109~B.C. 108년전쟁 때 한나라침략군과의 최후격전이 벌어진 왕검성은 부수도 왕검성(중국 료녕성 개주시일대)이였다.

• 경제, 군사력의 강화

만조선의 통치층은 피압박대중에 대한 정치적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통치기구와 함께 법과 군대제도도 정비보강하는데 큰 힘을 넣었다.

만조선은 발전된 무기로 장비된 상당히 많은 상비무력을 유지하고있었다.

고조선-한전쟁당시에 전투에 직접 참가한 고조선군대는 대략 10만명으로 추산되고있다.

만조선의 군대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편성되여있었는데 그 수는 10만이 훨씬 넘었을것으로 인정되고있다.

만조선의 군대는 활과 창, 검(장검, 단검), 도끼, 과, 쇠뇌 그리고 방패와 갑옷 등 여러가지 무기, 무장으로 장비되여있었다.

만조선시기의 무장에서 주되는것은 철제무기였다.

만조선말기 부조예군무덤 하나에서 출토된 무장만 보아도 3자루의 쇠장검을 비롯하여 철제단검, 창끝, 극, 비수와 도끼 등 10여점이나 되였으며 철갑옷의 패쪽도 수십개나 되였다.

만조선의 강한 군사력은 발전된 경제력에 안받침되여있었다.

- 생산의 발전

만조선의 강한 군사력에는 나라의 발전된 경제력이 안받침되여있었다.

후조선시기부터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제철제강업이 만조선시기에 더욱 발전하였으며 그에 기초하여 농업을 비롯한 생산전반이 크게 장성하였다.

후조선말기, 만조선시기의 집자리들에서 철제농기구들이 수많이 드러나고 특히 쇠도끼가 많이 나온것은 이 시기 농경지가 대대적으로 개간되여 경지면적이 크게 늘어나고 여러가지 철제농기구들이 널리 보급되여 알곡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났다는것을 말해준다.

이 시기에 또한 목축업도 발전하였다.

B.C. 109~B.C. 108년전쟁시기 고조선의 태자가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담판장에 나섰을 때 이 부대가 가지고있던 말만 하여도 5 000필이나 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전국적으로 말이 상당히 많았으리라는것을 쉽게 짐작할수 있다.

이와 같이 만조선시기에 목축업이 발전하여 집짐승 특히 말과 소의 마리수가 크게 늘어났는데 이것은 역축과 군마를 증대시켜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담보의 하나로 되였다.
- 국력의 발전

만조선은 성립이후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그 나날에 국력이 한층 강화되였다.

만조선은 바로 이러한 국력에 의거하여 주변의 소국과 정치세력들을 통합하고 사방 수천리의 령토를 가진 나라로 자라났으며 대외적으로 외래침략세력에 당당히 맞서 나라의 존엄을 고수하였다.

만조선이 성립이후 큰 발전을 이룩할수 있었던것은 새 왕조의 집권층이 신흥봉건세력을 흡수하는 등 봉건적관계발전에 일정하게 부합되는 당시로서는 긍정적인 정책을 실시한것과 관련되여있었다.

그러나 만조선의 이러한 정책은 낡은 세력의 도전에 부딪쳐 큰 위기를 겪게 되였다.

△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한 고조선인민들의 투쟁과 고조선(만조선)의 종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투쟁하여온 자랑찬 력사를 가지고있습니다.》  

우리 인민은 고조선시기부터 끊임없는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 나라를 굳건히 지켜왔다.

후조선말기에 연나라, 진나라의 거듭되는 침략책동을 짓부신 고조선인민들은 만조선시기에는 한나라의 집요한 침략책동에 맞서 굴함없이 싸웠다.

- 전쟁전야의 정세

고조선에 대한 한나라의 침략책동은 벌써 B.C. 2세기 중엽 문제때부터 로골화되기 시작하였다. 한나라 문제는 나라의 정세가 일시 안정되자 고조선을 넘겨다보며 침략을 기도하였으나 고조선의 위력에 눌리워 감히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한나라의 침략책동은 B.C. 2세기 말엽 무제시기에 극도에 이르렀다.

B.C. 128년에 고조선의 예군 남려가 한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한무제는 이것을 계기로 고조선의 서쪽지역에 창해군이라는 침략거점을 설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나라침략자들은 고조선인민들의 완강한 투쟁에 부딪쳐 3년만인 B.C. 126년에 막대한 인적, 물적손실을 당한채 쫓겨나고 말았다.

무제는 창해군설치기도가 수포로 돌아간 후 북쪽과 남쪽, 서쪽의 여러 지역에 대한 정복전쟁을 벌려놓았다.

B.C. 119년에 흉노를 공격하여 9만명을 포로하였고 B.C. 111년에는 남방의 밀월과 남월을 정복하였으며 서역에 대하여서도 여러차례의 공격전을 벌려놓았다. 이러한 정복전쟁을 통하여 힘을 키운 한나라통치배들은 동방의 고조선에 대한 침공작전에 집중하였다.

고조선은 한나라의 침략책동에 대처하여 서북방의 중요한 요새인 부수도 왕검성(료녕성 개주시일대)을 튼튼히 다지고 나라의 전반적인 방비를 한층 강화하면서 한나라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 한나라의 무력침공과 왕검성방어전

B.C. 109년 가을에 무제는 섭하란 자를 《사신》의 명목으로 파견하여 생트집을 걸면서 저들에게 복종할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우거왕은 한나라의 압력을 단호히 배격하였다. 이렇게 되자 섭하는 돌아가면서 자기를 바래워주는 비왕 장을 패수(대릉하)가에서 죽이고 도망치는 비렬한 행위를 감행하였다.

그후 고조선인민들은 료동군을 습격하여 섭하를 처단하였다. 이것은 침략자, 도발자에 대한 주권국가의 응당한 자위적조치였다.

그런데도 한나라통치배들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곧 고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도발하였다.

• 한나라침략자들의 1차침공과 그 격퇴

한무제는 죄인들까지 긁어모아 대규모적인 침략군부대를 꾸리고 여러차례의 정복전쟁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양복이나 순체와 같은자들을 장수로 임명하여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B.C. 109년 가을에 양복이 거느린 5만의 수군과 순체가 거느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륙군이 바다와 륙지에서 동시에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무제는 수군을 제(오늘의 산동반도)에서 출발시켜 고조선의 렬구(오늘의 하하구)에 상륙시킨 다음 패수를 건너 공격해오는 륙군과 합세하여 부수도 왕검성을 침공할 수륙병진작전을 꾀하였다.

고조선은 적의 이러한 수륙병진작전에 맞서 놈들의 주되는 공격목표인 부수도 왕검성의 방어력량을 증강하면서 적의 륙군과 수군을 각개격파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한나라침략군은 첫걸음부터 참패를 당하였다.

적의 륙군은 만리장성부근의 료동군을 떠나 공격해왔으나 고조선의 패수서군의 강력한 반격에 의해 큰 참패를 당하였다. 적장의 하나인 다라는 자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목을 잘리웠고 적의 수륙병진작전은 한쪽 날개가 꺾이고말았다.

한편 적의 수군이 발해를 건너 렬구에 이르렀다. 그런데 적수군은 륙군과 합세하여 차후행동에로 넘어가게 되여있었으나 양복은 공명심에 들떠 7 000명의 수군을 선발해가지고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하려고 시도하였다. 만단의 전투태세를 갖추고있던 왕검성방어군은 성문을 열어제끼고 맞받아나가 적들에게 드세찬 반격을 가하였다. 7 000명의 적수군은 거의 전멸되였다. 적장 양복은 병졸을 다 잃고 혼자 산속으로 도망쳐 10여일간이나 헤매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형편이였다.

이처럼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 일떠선 슬기롭고 용감한 고조선인민들은 침략자와의 첫 싸움에서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첫 싸움에서 큰 타격을 받은 적들은 교활하게도 외교적인 술책으로 참패를 만회해보려고 기도하면서 고조선에 화의를 제기해왔다.

무제는 위산을 담판사신으로 파견하여 군사적《위력》을 시위하면서 고조선의 우거왕을 굴복시켜보려고 꾀하였다.

우거왕은 적의 흉계에 대처하여 태자로 하여금 만여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패수를 건너 《담판》할 태세를 취하게 하였다.

고조선군대의 위력에 질겁한 위산과 순체는 무장을 놓고 건너오라고 요청하였다. 결국 담판은 결렬되였다.
적들은 이 담판의 막뒤에서 재침을 준비하였다.

한무제는 저들의 흉계가 파탄되자 위산을 죽여버리고 무력을 증강하여 더욱더 대규모적인 공격전을 감행하는길로 나아갔다.

• 적의 대규모적인 침공과 왕검성방어전

순체가 거느린 적의 증강된 륙군은 패수의 상류쪽으로 우회하여 고조선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부수도 왕검성을 서북쪽으로 포위하였다. 적의 수군도 부수도 왕검성의 남쪽을 에워쌌다. 이리하여 왕검성은 적의 포위속에 들게 되였으며 이 성에서 적아간의 치렬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였다.

당시 부수도 왕검성에는 왕과 태자 그리고 나라의 많은 중신들이 나가있었다. 그러므로 왕검성전투는 나라의 운명을 건 판가리싸움으로 되였다.

고조선인민들과 왕검성방어군은 적의  약점을 틀어쥐고 적들내부에 혼란을 조성하면서 침략군의 공격을 련속 짓부셔버렸다.

당시 적들은 왕검성을 포위하기는 하였으나 수륙군전체에 대한 통일적인 지휘체계가 없이 제가닥으로 움직이고있었으며 적장들사이에 암투(양복은 겁에 질려 화의 제기, 순체는 공격주장)가 벌어지고있었다.

고조선은 적군내부의 실정을 탐지하여 적수군과는 되도록 싸움을 피하면서 양복에게 사람을 보내여 《화의》제의에 응하는척 하는 한편 순체가 이끄는 륙군과의 싸움에 력량을 집중하였다. 적의 륙군은 련속 큰 손실을 당하였다. 이리하여 적군내부의 알륵과 대립이 더욱 격화되였다.

고조선군민들은 이처럼 림기응변하면서 1년 가까이 성을 지켜 완강히 싸움으로써 포위하고 달려드는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적들의 완전포위속에서 전쟁이 오래 지속되는데다가 적의 좌장군 순체가 수륙군을 통일적으로 관할하게 되면서 적의 공세가 한층 강화되자 고조선집권자들속에서 동요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동요분자들은 비겁하게도 투항을 모의하면서 왕에게 그것을 권고하였다. 왕이 투항을 거부하자 정체가 로출되게 된 조선상 로인과 상 한음, 장군 왕협 등은 조국을 배반하고 적진으로 도망치는 반역행위를 저질렀다. 지어 니계상 참이라는 자는 항전을 지휘하던 우거왕을 살해하고 도망치는 죄악을 저질렀다.

한나라침략자들은 우거왕이 살해된 다음 왕검성에 대한 공격을 더 한층 강화하였으나 고조선군민들은 대신  성기의 지휘밑에 사태를 수습하고 성을 지켜 결사적으로 싸웠다. 이렇게 되자 한나라침략자들은 저들에게 투항한 우거왕의 아들과 조선상 로인의 아들놈들을 시켜 대신 성기를 암살하도록 하였다.

고조선인민들은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투항변절자들의 거듭되는 반역행위로 말미암아 방어진에 큰 혼란이 일어났으며 B.C.108년 여름에 왕검성(부수도)이 강점되고 고조선왕조도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게 되였다.

만조선은 고조선의 왕조였기때문에 만조선의 멸망은 고조선의 멸망으로 된다.

한나라는 그후에도 침략을 더 확대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인민들의 완강한 투쟁에 부딪쳐 압록강이남으로 더 기여들지 못하였다.

• 한나라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고조선인민들의 투쟁

한나라는 저들이 차지한 강점지역(오늘의 료동지방)에 락랑, 현도, 진반, 림둔의 4개군을 설치하였다. 이것을 력사에서 《한4군》이라고 한다.

 

※ 한4군의 위치에 대한 외곡된 주장

ㆍ한사군이 고조선령역전반을 포괄한듯이 주장

ㆍ특히 락랑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조선일대에 있었다고 함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것이다.

한4군의 중심을 이루고있던 락랑군의 소재지 조선현은 고조선의 부수도 왕검성이 자리잡고있던 오늘의 개주시일대에 있었으나 락랑군의 령력은 패수현, 렬구와 같은 속현들의 이름으로 미루어보아 오늘의 대릉하(패수)와 료하(렬수)일대의 넓은 지역을 망라하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후 B.C. 1세기 전반기에 한4군에서 큰 변동이 일어나 락랑군의 위치도 일정하게 변화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오늘의 료동지방에 자리잡고있었다.

평양일대에는 한나라의 락랑군이 아니라 조선사람의 락랑국이 있었다.

 

고조선인민들은 고구려인민들과 힘을 합쳐 한나라침략세력, 한4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줄기차게 투쟁을 벌렸다.

고조선멸망직후인 B.C. 105년경에 벌써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조선유민들의 투쟁은 그후에도 한4군지역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완강하게 전개되였다. 그리하여 현도군이 계속 서쪽으로 쫓겨나고 B.C. 82년에는 림둔, 진반 2개군이 페지되였다.

A.D. 30년에는 료동의 락랑군일대에서 왕조의 지휘밑에 고조선유민들의 대규모적인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군은 태수를 처단하고 락랑군일대를 차지하였다. 바빠난 한나라의 광무제는 왕준을 락랑군태수로 임명하고 많은 군대를 료동지방으로 내몰아 폭동군을 가혹하게 탄압하도록 하였다.

왕조의 폭동은 실패하였으나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은 그후에도 계속되였다.

- 고조선멸망의 원인과 교훈

 고조선멸망의 원인은 한마디로 고조선통치층안에서 나타난 변절자들의 투항때문이다.

한나라침략군우두머리들인 순체, 위산, 공손수는 사형당하였고 양복은 평민으로 쫓겨났으나 변절자들인 조선상 로인, 상 한음, 니계상 참 등은 다 《후》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고조선멸망의 근본요인이 고조선통치층에서 나타난 변절자들의 투항때문이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고조선멸망의 교훈은 대오안의 변절자, 투항분자 한놈은 백놈, 천놈의 외적보다 더 무섭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력사적교훈을 잊지 말고 대오안의 이색분자, 변절자들에 대하여 언제나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

고조선인민들의 정의의 애국투쟁은 비록 최후의 승리를 이룩하지 못하였으나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고조선인민들의 불굴의 투지와 용감성을 힘있게 과시하였다.

 

△ 복습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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