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계씨족공동체사회

 

△ 부계씨족공동체사회의 형성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사회적재부와 사회적관계는 다 사람이 창조하는것입니다.》  

신석기시대 중기이후 자신의 힘으로 생활을 개척해나가려는 사람들의 자각과 창조적능력이 한층 더 높아지면서 그에 맞게 사회적재부가 늘어나고 사회관계가 개선되여 점차 모계씨족공동체사회로부터 부계씨족공동체사회로 이행하게 되였는데 그 이행시기는 신석기시대 중기(B.C. 6000년기 후반기~ B.C. 5000년기 전반기)이다.

신석기시대 《조선옛류형사람》들이 살고있던 지역에서 제일먼저 부계씨족사회를 이룬 곳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이였다.

 

 

 

조선옛류형사람들의 생활 

 

모계씨족제도의 태내에서 싹트기 시작한 부계제적인 요소는 신석기시대 중기부터였다.

이 시기에 볼수 있는 부계제적인 요소는 경제생활에서 남성의 생산로동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그에 따라 재부가 급격히 늘어난것과 관련된다.

- 그것은 당시의 기본생업이였던 농업의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장성되였으며 그 주되는 담당자가 남성으로 바뀌게 된데서 찾아볼수 있다.

평양시 사동구역 금탄리유적1기층,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유적2기층, 마산리유적을 비롯하여 여러곳에서 발굴된 돌보습을 비롯한 유물들은 이 시기에 농업생산에서 커다란 진보가 이룩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새로운 농기구들은 당시 사람들이 괭이농사보다 비할바없이 우월한 보습농사 즉 갈이농사를 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갈이농사에 의한 농업생산에서 남성은 결정적역할을 놀았다. 돌보습을 메운 연장을 끌어 땅을 갈아엎는 일을 비롯하여 농사일의 힘든 부문은 남자들이 아니고서는 할수 없었다.

생산활동에서 남성이 결정적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생산의 조직과 지휘를 비롯하여 공동체의 관리에서 점차 남성의 발언권이 커지게 되였다.

- 이 시기에 볼수 있는 부계제적인 요소는 혼인풍습에서의 변화를 통해 찾아볼수 있다.

사회생활, 경제생활에서 남자들의 역할과 발언권이 높아지면서 종래와는 달리 남자들이 처와 아이들을 자기씨족으로 데려다가 가정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신석기시대 전기에 특징적이던 대우혼은 점차 일부일처제로 바뀌게 되였다.

이것은 늘어난 살림과 재부를 생산에서 주도적역할을 논 남성편으로 물려주어야 할 사회적요구를 반영하여 일어난 현상이였다.

이와같이 녀성이 높은 사회적지위를 차지하고있던 모계제적인 사회관계는 뒤흔들리게 되고 부계제가 싹트게 되였다.

대동강류역의 유적들에서 알려진 자료들은 신석기시대 중기에 싹트고있던 부계제적인 요소가 사회생활전반에 보편화되여 모계씨족제도로부터 부계씨족제도에로의 이행이 이루어진것이 신석기시대 후기였다는것을 보여준다.

- 사회관계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당시의 무덤들과 거기에서 나온 유물들에 뚜렷이 반영되여있다.

신석기시대문화층에서 나온 조상숭배를 반영한 인형들은 녀자를 형상한것이 대부분이지만 청동기시대문화층에서 드러난 인형들은 남자신숭배를 반영한 부신의 형상으로 바뀌여졌다.

 

남자를 형상한 조각품

 

이것은 모신숭배로부터 부신숭배로 넘어갔다는것을 의미하며 그때 사회가 부계씨족사회였다는것을 말해준다.

부계씨족사회에로의 이행은 청동기시대 초기에 나타나는 남자중심의 매장풍습에 의해 증명할수 있다.

남자중심의 가족무덤인 황해북도 황주군 침촌리고인돌무덤은 주변의 다른 무덤들과는 달리 특별히 공을 들여 큰 판돌을 날라다 지은것이다.

또한 긴동5호고인돌, 천진동5호 및 6호고인돌은 부부함께껴묻기무덤으로서 남녀간의 공고한 관계를 반영하는 부계제의 무덤형식이다.

부계씨족사회의 초기에는 가부장적가적공동체(가부장제) 또는 가부장적세대공동체로 불리우는 가족형태가 보편적이였지만 점차 생산이 장성하여 잉여생산물이 생겨나고 대우혼제가 공고화됨에 따라 가족공동체는 한쌍의 부부와 그 자식들로만 구성되는 소가족으로 분화되여갔다.

△ 청동기시대의 시작

 부계씨족공동체는 그후 신석기시대 후기(B.C. 5000년기 후반기~ B.C. 4000년기 전반기), 청동기시대(B.C. 4000년기 후반기)초에 더욱 발전하였다.

- 사람들은 청동주조기술을 발명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시대인 금속기시대를 열어놓았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창조적로동을 벌리는 과정에 보통의 석기와는 다른 광석을 발견하게 되였고 그 광석에 열을 가하여 거기에 포함되여있는 금속을 녹여서 얻어내는 야금기술을 개발하게 되였다.

사람이 로동도구와 그밖의 제품을 만드는데 쓴 첫 금속은 구리였다. 그러나 구리가 무른 금속이였기때문에 사람들은 오랜 노력끝에 구리에 주석 혹은 연, 아연 등을 합금하여 놋 즉 청동을 제련하는 기술을 알아내였다.

우리 선조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에서 B.C. 4000년기 후반기에 벌써 청동기시대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금속으로 로동도구를 만들어쓰게 된것은 인류문화발전에서 획기적인 사변이였으며 석기시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금속문화의 시작을 의미하는것이였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전기간을 통하여 석기도 광범히 썼다.

그것은 청동의 합금 및 제련기술이 발전하지 못하여 그 강도에 있어서 아직 돌보다 무른데 있었고 또 청동의 원료도 흔하지 않았기때문이다.

하지만 청동기시대의 석기는 그것을 만든 솜씨나 그 종류에 있어서 신석기시대의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 만큼 세련되고 풍부하며 그 갖춤새전반에서 석기시대의것과는 명확하게 다르므로 쉽게 가려낼수 있다.

- 청동기시대의 문화는 그보다 앞선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계승한 토대우에서 발전하였다.

우선 석기들은 신석기시대의것에 비하여 매우 세련된것이지만 그 생김새에서는 같은것이 많다.

즉 곰배괭이, 반달칼, 활촉, 창끝 등과 같은 도구와 무기의 생김새는 신석기시대 마지막시기의것과 같으며 흙을 빚어 구워서 만든 가락바퀴나 뼈를 갈아서 만든 여러가지 생활용품과 장식품의 형태에도 같은것이 많다.

 

 

 

 반달칼, 활촉, 창끝, 가락바퀴 

 

또한 질그릇의 갖춤새에서도 이전시기의 전통이 반영되여있다.

《조선옛류형사람》들은 청동기를 쓰게 되면서 질그릇으로는 팽이그릇을 주로 쓰게 되였다. 다시말하여 청동기시대와 팽이그릇을 쓰게 된 시기는 대략 일치하다.

신석기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새김무늬그릇이 팽이그릇으로 바뀌는 과정은 단꺼번에 진행된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진행되였으며 또한 팽이그릇은 전혀 다른 갈래의 질그릇갖춤새가 아니라 새김무늬그릇의 계승발전이였다.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지역에서 청동기시대는 B.C. 4000년기 후반기부터 B.C. 30세기 초 (국가성립이전)까지이다.

이 시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송림시 석탄리유적, 남경유적1기층의 팽이그릇시기1기의 집자리, 긴동, 천진동고인돌무덤 등을 들수 있다.

△ 청동기시대생산의 발전과 교환관계의 발생

우리 선조들은 B.C. 4000년기 후반기에 벌써 청동기를 생산함으로써 물질문화적재부를 창조하는데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 청동기시대에 생산의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전진이 이룩되였다.

우선 농업이 결정적인 생산분야로 되여 알곡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이 시기 갈이농사가 전반적으로 진행되면서 부침땅이 넓은 면적으로 확대되였다. 그것은 이 시기 유적들에서 토지개간을 위해 산림을 채벌하는데 쓰인 큰 도끼들이 흔하게 발견된것을 통해 알수 있다.

이와함께 이미 일군 땅을 몇해씩 묵였다가 농사를 짓는 휴경농법이 널리 보급되였다.

또한 이 시기 땅을 뒤집거나 고르는데 쓴 경작농기구와 알곡을 거두어들이는데 쓴 수확농기구가 개량되여 농사일에서 능률을 높이였다.

수확농기구로서는 능률적인 반달칼이 널리 쓰이였다. 석탄리유적에서 반달칼이 60개나 나온것은 그것을 실증해준다.

청동기시대사람들은 농업과 함께 집짐승기르기도 이전시기보다 한층 더 발전시켜나갔다.

이 시기 주민들이 기른 집짐승은 개, 돼지, 소, 닭 등이였다.

그 가운데서 돼지는 고기원천으로, 소는 부림짐승으로 길렀다.

당시 사람들은 집짐승기르기와 함께 짐승사냥, 물고기잡이도 널리 진행하였다. 신흥동유적2호, 4호집자리, 금탄리유적1호집자리유물들은 그것을 잘 실증해주고있다.

청동기시대에는 또한 원시적인 수공업도 발전하였다.

우선 로동도구와 무기제작에서 일련의 발전이 있었다.

이 시기 로동도구는 보다 다양해지고 용도별에 따라 세분화되였으며 무기로 쓸수 있는것들도 많이 드러났다.

또한 무기류도 단검, 달도끼, 별도끼 등 그 형태가 다양해졌다.

 

 

 달도끼, 별도끼

 

 청동단검 

 

다음으로 청동기시대수공업에서는 질그릇제작업에서 큰 발전이 이룩된것이다.

이 시기 질그릇은 팽이그릇이다. 섞음재료로는 모래와 활석, 운모를 썼으며 색은 갈색을 띤다.

청동기시대질그릇은 신석기시대질그릇과 뚜렷한 차이를 가진다.

- 청동기시대에 생산이 확대장성하여 공동체안에 잉여생산물이 축적되고 사회적분업이 발생하여 기본생업을 달리하는 종족들이 생겨남에 따라 교환이 발생하였다.

처음에 교환은 종족이나 씨족들사이의 물물교환의 형태로 진행되였다.

 

 

 

 물물교환 

 

교환관계발전에서 특히 커다란 의의를 가진것은 사회적분업의 발생이였다.

생육조건이 서로 다른 5곡의 재배를 보여주는 남경유적36호집자리의 낟알자료와 금탄리11호집자리, 남경유적31호집자리를 비롯한 여러 유적의 질그릇들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이러한 사회적분업의 발전은 기본생업이 다른 주민들사이에서의 교환이 활발히 벌어지게 하였고 점차 항시적인 성격을 띠게 하였다.

또한 교환이 확대발전하면서 교역을 전업으로 하는 상인이 나타나게 되였으며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페가 생겨나게 되였다.

초기에 일반적등가물로 쓰인것은 집짐승, 짐승가죽, 쌀 또는 조개껍질같은것이였으나 후에 돌돈이 출현하였다.

신흥동유적이나 표대유적에서 나온 돌돈들은 다 규격제품으로서 이 시기에 교환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 생활풍습에서의 변화

청동기시대에 이룩된 생산의 장성과 사회관계에서의 변혁은 주민들의 생활풍습에서도 일련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ㅡ 생활풍습에서의 변화는 당시 사람들의 거주생활에서 찾아볼수 있다.

청동기시대사람들은 자기 고장의 지리적조건과 기후풍토에 맞게 신석기시대보다 훨씬 개선된 여러가지 형태의 살림집을 짓고 살았다.

- 생활풍습에서의 변화는 질그릇갖춤새의 변화에서도 잘 나타나고있다.

새김무늬그릇이 주류를 이루던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청동기시대에는 팽이그릇으로 변천되였다.

팽이그릇이란 아구리 끝을 밖으로 겹싸넘겨 두텁게 하고 몸체는 둥실하며 밑창은 오똑하여 마치 팽이를 련상시키는 생김새를 가진 갈색민그릇을 말한다.

- 생활풍습에서의 변화는 새로운 무덤형식이 출현한것이다. 고인돌무덤, 돌관무덤은 신석기시대에는 볼수 없던것이다.

 

 

 고인돌무덤 

 

고인돌무덤에는 키높은 《오덕형고인돌》과 키낮은 《침촌형고인돌》이 있다.

돌관무덤은 땅속에 얇은 판돌로 상자처럼 관을 무어 주검을 묻은것인데 네벽을 각각 한장의 판돌로 만든것과 여러개의 판돌로 이어 만든것이 있다.

-  이 시기 주민들의 식생활풍습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주민들은 벼, 기장, 조, 수수, 콩, 보리 등 알곡을 재배하고 여러가지 형식으로 음식을 해먹었다.

청동기시대집자리들에서 나온 질그릇들에 굽이 달려있는것은 당시에 밥상을 리용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또한 시루가 나오는것으로 보아 쌀을 쪄서 떡을 치기도 하고 술과 같은 음료를 만들어 먹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청동기시대사람들은 물고기와 육고기도 주로 끓여서 먹었다.

이것은 당시의 질그릇가운데서 아구리가 넓은 바라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집자리들에 화독이 설치된것 등을 통해 알수 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부계씨족공동체시기에 사회생활전반에 걸쳐 큰 전진을 이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