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민족적통일운동의 기치

우리 당이 일관하게 견지하여 온 하나의 조선로선, 통일로선은 1980년대에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을 창립하여 나라를 통일하기 위한 전민족적통일운동을 힘차게 고무추동한 위대한 기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69(1980)년 10월에 있은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우리 나라의 북과 남에 있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 서로 련합하여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을 창립하는 방법으로 조국통일을 실현할데 대한 새로운 통일반안을 내놓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내놓으신 조국통일방안은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통일방도로서 조국통일의 앞길을 휘황히 밝혀주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당의 방안대로 련방공화국을 창립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북과 남, 해외에 있는 모든 조선동포들이 사상과 제도, 당파와 정견의 차이를 가리지 말고 조국통일의 기치아래 하나의 민족대통일전선에 굳게 뭉쳐 투쟁하여야 합니다.》  

우리 당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새로운 통일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① 우리 당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리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련이어 취하였다.

주체69(1980)년 11월에 열린 공화국북반부의 제 정당, 사회단체련석회의에서 우리 당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을 창립하기 위한 실천적조치로서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준비위원회와 같은 민족공동의 협의기구를 내올것을 발기하였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예비회의를 가질것을 제의하는 편지를 채택하고 그것을 남조선과 해외의 각계각층 인사들에게 보내였다.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준비위원회를 내올데 대한 제안은 내외 각계각층인사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남조선군사파쑈도당만은 이 제의를 비방중상하면서 편지를 받게 되여있는 대상들을 거의다 공직에서 추방하고 각종 《죄》를 들씌워 체포투옥하였다.

우리 당은 남조선군사파쑈도당의 반민족적, 분렬주의적책동을 준렬히 폭로단죄하면서 남조선과 해외에서 단결할수 있는 모든 애국적민주세력을 결속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주체79(1981)년 8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 해외동포대표들이 참가하는 민족통일촉진대회를 소집할것을 제의하였다. 이어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이듬해 2월 조국통일을 위한 협상기구로서 북과 남, 해외의 이름있는 정치인들을 망라하는 100인련합회의소집을 발기하고 그 참가대상자명단을 발표하였다.

② 우리 당은 해외민주인사들속에서 공화국에 대한 지지와 동경의 기운이 높아지는데 맞게 북과 해외동포들과의 대화와 협상을 실현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주체70(1981)년 오스트리아의 윈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그리스도교신자들간의 제1차대화가, 다음해 12월에는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제2차 대화가 진행되여 북과 해외동포사이의 련대를 실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주체73(1984)년 12월에는 북과 해외동포들사이의 대화가 마련되고 비상설협의체로서 《조국통일을 위한 민족련합》이 무어지게 되였다.《조국통일을 위한 민족련합》의 결성은 북과 해외동포들간의 련합을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시키고 민족대통일전선의 형성을 다그쳐나갈수 있는 기초로 되였다.

③ 우리 당은 해외동포들과의 련합을 강화하는 한편 북과 남사이의 민족적화해와 단합을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들을 취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73(1984)년 9월 남조선에서 수많은 수재민들이 생기자 그들에게 혈육의 정이 담긴 구호물자를 보내도록 동포애적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이에 따라 나라고 분렬되여 근 40년만에 처음을 흰쌀 5만석과 세멘트 10만t, 천 50만 m  많은 량의 의약품들이 남조선수재민들에게 전달되였다. 이것은 일찌기 국제적십자구제운동사에서 있어보지 못한 막대한 량의 구호물자였다.

남조선수재민들에 대한 구호물자전달을 계기로 민족적화해와 단합의 분위기가 조성되였다.

주체74(1984)년에 북남사이에 경제회담, 적십자회담이 여러차례에 걸쳐 열리고 북남국회회담을 마련하기 위한 예비접촉이 진행되였다. 그리고 조국해방 40돐을 계기로 민족분렬이후 처음으로 북남사이에 예술단과 고향방문단의 호상방문이 실현되였다.

④ 우리 당은 새로운 조국통일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조치들을 련이어 취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전민족적범위에서 조국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아가는 환경속에서 주체76(1987)년 11월 북과 남사이의 민족적단합을 위한 5개항목의 방안을 내놓도록 하시였으며 주체78(1989)년 1월에는 북과 남의 각당, 각파, 각계각층의 의사를 대표할수 있는 지도급인사들로 북남정치협상회의을 가질것을 제의하시였다.

주체77(1988)년 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와 정무원, 제정당, 사회단체들을 련합회의를 열고 북과 남의 당국자를 포함한 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고 각계인사들이 참가하는 북남련석회의를 소집할데 대한 제안을 담은 편지를 남조선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개별적인사들에게 보내였다. 이듬해 3월에는 공화국북반부의 정다, 단체들이 련합회의를 가지고 북과 남사이의 민간급대화를 다방면적으로 발전시킬데 대한 련합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모든 제안들은 내외의 광범한 인민들의 한결같은 지지와 찬동을 받았다.

주체78(1989)년 7월에 평양에서는 해내외동포들의 조국통일촉진대회가 열리게 되였다. 대회에서는 다음해 판문점에서 북과 남, 해외동포대표들로 조국통일을 위한 8.15범민족대회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북과 남, 해외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조국통일문제를 진진하게 협의할수 있는 전망이 열리게 되였다.

⑤ 우리 당은 조선반도에서 핵전쟁의 위험을 막고 군축을 실현하여 평화를 수호하며 평화통일의 전제를 마련하기 위한 결정적인 대책을 세워나갔다.

1980년대에 미제는 아시아중시전략에 따라 남조선에 핵무기를 비롯한 최신형살륙무기들과 군사장비들을 대대적으로 증강하고 남조선을 핵전쟁전초기지로 전변시켰다. 더우기 1976년부터 해마다 벌려오던 《팀 스피리트》합동군사연습에 이 시기에 와서는 20여만의 대병력을 동원하고 핵전쟁연습을 광란적으로 벌리면서 북남관계를 최악의 대결상태에로 끌고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73(1984)년 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련합회의에서 우리와 미국과의 회담에 조선반도의 긴장상태격화에 책임이 있는 남조선당국도 참가시켜 3자회담을 진행할데 대한 새로운 제안을 내놓으시였다.

3자회담제안은 우리 나라와 미국사이에 체결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며 북과 남사이에 불가침선언을 채택하는것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었다.

우리 당은 3자회담제안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을 계속 주동적으로 밀고나가면서 전쟁의 위험을 가시고 첨예한 군사적대치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들을 련이어 취하였다.

주체74(1985)년 4월 북남국회회담을 마련하여 불가침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할데 대한 평화제안을 내놓은데 이어 북남고위급정치군사회담제안, 군사당국자회담제안, 조선반도에 비핵지대, 평화지대를 창설할데 대한 제안들을 내놓았다. 특히 15만명의 조선인민군 군인들은 평화적건설에 참가시켰다.

주체76(1987)년 7월에는 공화국정부성명을 통하여 대규모적인 단계적무력축감제안을 내놓았으며 12월말까지 10만명의 인민군장병들을 일방적으로 축소하여 사회주의건설장들에 진출시켰다.

조국통일의 평화적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공명정대한 조치들과 긴장상태를 완화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은 우리 당의 평화애호적인 지향과 확고한 통일의지, 민족애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이 시기 남조선인민들은 우리 당의 진지한 평화통일노력에 보조를 맞추어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이 힘차게 벌어졌다.

1970년대말에 이르러 남조선인민들의 반파쑈민주화투쟁이 날로 고조되는 속에서 1979년 10월 《유신》독재체제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러나 미제는 《유신》독재보다 더 포악한 전두환군사파쑈독재를 수립하고 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바라는 모든 애국적민주세력을 악랄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격분한 남조선인민들은 주체69(1980)년 3월 남조선전지역에서 미제와  군사파쑈도당을 반대하는 대중적인 투쟁을 벌렸다.특히 5월에는 군사파쑈도당이 남조선 전지역에 《비상게엄령》을 선포하고 파쑈적탄압을 감행하는데 항의하여 광주인민들이 대중적봉기를 일으켰다. 청년학생, 로동자, 농민 등 30여만의 각계각층 인민들이 참가한 이 투쟁은 전라남도의 대부분 지역과 전라북도에까지 확대되였다.

이에 당황한 미제는 중무장한 괴뢰군을 동원하여 력사에 류례없은 동족살륙작전을 벌려 광주시를 피바다에 잠그었다.

광주인민봉기는 미제의 식민지군사파쑈통치지반을 크게 뒤흔들어놓았다.

광주인민봉기를 통하여 더욱 각성된 남조선인민들은 투쟁의 예봉을 미제에게 돌리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을 계기로 반파쑈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이 반미자주화를 위한 투쟁과 결합되면서 새로운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남조선청년학생들을 부산과 대구, 서울과 광주에서 《미국문화원》에 대한 방화, 점거투쟁을 단행하였으며 도처에서 《성조기》를 불태우고 대중적반미자주화투쟁을 호소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반미자주화투쟁은 미제침략군과 핵무기의 철페, 《팀 스피리트》합동군사연습의 반대 등 높은 요구를 제기하고 보다 광범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남조선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은 수많은 민주화투쟁단체들과 전남조선적인 투쟁조직을 내오고 반파쑈민주화투쟁을 더욱 적극화하여나갔다. 이 투쟁은 주체76(1987)년 6월에 대중적인 반파쑈인민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군부독재타도》와 《적신제개헌》의 구호밑에 남조선전역에서 일어난  항쟁에는 연 300여만명의 각계각층 군중이 참가하였다.

6월인민항쟁은 미제과 그 앞잡이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남조선인민들의 반미반파쑈민주화투쟁에서 전환적계기로 되였다.

조국통일을 위한 남조선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의 투쟁도 힘있게 벌어졌다.

남조선의 대학총학생회들의 련합조직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주체77(1988)년에 6.10, 8.15북남학생회담, 국토종단대행진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벌렸으며 그 이듬해 평양에서 열리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대표를 파견하여 민족의 통일의지를 시위하였다.

남조선민주세력의 련합전선조직인 《전국민족민주운동련합》(《전민련》)은 《로동자, 농민, 진보적지식인이 중심이 되여 민주화, 자주화, 민족통일을 지향하여 투쟁하는것》을 자기 단체의 총적목표로 밝히고 범민족대회를 열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리였다.

남조선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은 소수의 운동이 아니라 다수의 운동으로 전환되고 일부 계층에 국한된 부분적인 운동이 아니라 각계각층을 망라한 대중적운동으로 확대되였으며 단순한 통일론의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조국통일3대원칙에 기초하여 련방제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남조선에서 《두개 조선》을 추구하는 분렬주의세력이 력사의 흐름에 도전하여 나섰지만 전반적인 정세는 의연히 우리 당의 하나의 조선로선, 통일로선을 따라 확고히 전진하였다.

1980년대에 힘있게 벌어진 전민족적인 통일운동의 전진은 전적으로 우리 당이 높이 추켜든 하나의 조선로선, 통일로선이 안아온 귀중한 결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