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분렬주의자들의 반통일로선을 분쇄한 기치

하나의 조선로선, 통일로선의 기치를 언제나 높이 추켜든 우리 당의 투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변화되는 정세의 요구에 맞게 북남대화로 안팎의 분렬주의자들의 반통일로선을 분쇄한것이다.

① 우리 당은 급변하는 정세의 추이에 맞게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의 길을 주동적으로 개척해나갔다.

1960년대말-1970년대초에 이르러 국제국내정세에서는 주목할만 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미제는 국제무대에서 저들의 힘의 정책, 전쟁정책이 파산되고 반미반전투쟁에 의하여 국제적인 고립의 함정에 빠져들게 되자 1969년에 이른바 《닉슨주의》를 표방하면서 《대화》와 《협상》, 《평화공존》으로 정책전환을 하였다. 한편 평화통일에 대한 지향과 기운이 높아가는 속에 미제가 대결로부터 《대화》와 《공존》에로의 정책전환을 표방하면서 닉슨의 중국방문계획을 발표하자 남조선당국자들은 대세에 편승하여 안팎의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보려고 《평화통일구상》이라는것을 들고나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변화된 정세에 주동적으로 대처하시여 주체60(1971)년 8월 6일 폭넓은 북남협상방침을 제시하시고 북남대화를 통하여 안팎의 분렬주의자들의 《두개 조선》조작책동을 저지파탄시키고 조국통일운동을 힘있게 전진시켜나가실것을 결심하시였다.

미제와 남조선반동들의 악랄하고도 집요한 반통일책동속에서도 북남사이의 대화와 협상을 실현하기 위한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는 숭고한 민족애와 확고한 원칙성, 용의주도한 령활성으로 일관된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60(1971)년 8월 6일 력사적인 연설에서 남조선의 위정자들이 참말로 나라의 통일을 바란다면 무엇때문에 북과 남이 접촉하고 협상하는것을 두려워하고있는가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시였다.

《우리는 남조선의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인사들과 아무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때까지 없었던 획기적제안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조국통일에 대한 뜨거운 념원과 포옹력으로 제기하신 폭넓은 북남협상방안은 대세의 흐름을 틀어쥐고 북과 남사이의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이고도 주동적인 발기였다. 폭넓은 북남협상방안은 내외의 광범한 인민들과 정계와 사회계인사들, 해외동포들, 진보적력량의 열렬한 지지찬동을 받았으며 남조선위정자들로 하여금 내외정세의 흐름에 역행하여 파멸의 길을 계속 걷는가 아니면 평화와 협상으로 정책전환을 하는가 하는 갈림길에 서게 하였다.

② 우리 당은 북남공동성명의 발표로 자주적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획기적전환의 계기를 열어놓았다.

새로운 협상방침을 실현하기 위한 우리 당의 주동적인 조치에 의하여 더는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수 없게 된 남조선당국자들은 하는수없이 8월 12일 남조선적십자사 총재성명을 통하여 《가족찾기운동》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열것을 제의해왔다. 이것은 원래 우리가 정치협상을 주장해온것만큼 저들이 적십자회담을 제의하면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을것이라는 타산과 함께 그를 기회로 역선전의 효과를 노린 교활한 술책이였다.

이러한 간교한 술책을 꿰뚫어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60(1971)년 8월 13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적십자회담을 받아들여 주동적으로 대화를 적극화해나갈데 대하여 가르쳐주시고 9월 17일 회담관계 일군들과 회담대표단성원들을 몸소 만나시여서는 적십자회담과 관련한 원칙적문제들을 밝혀주시였다. 그리고 9월과 10월 일본 《아사히신붕》 편집국장과 교도통신사 기자를 만나시여 북남대화와 통일문제에 대한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의 정당한 립장에 대하여 다시금 명백히 밝히시였다.

북남대화를 주동적으로 령활하게 진행하도록 이끄신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에 의해 주체60(1971)년 9월 20일부터 주체61(1972)년 8월 11일까지의 사이에 25차례에 걸치는 쌍방적십자단체 예비회담과 13차의 쌍방실무자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적십자회담과는 별도로 주체61(1972)년 5월초에는 첫 북남고위급정치회담이 평양에서 마련되였다.

이 력사적인 북남고위급정치회담과 위대한 수령님의 비범한 령도에 의하여 력사적인 7.4북남공동성명의 채택이라는는 조국통일사에 영원히 아로새겨질 거대한 정치적사변이 이룩되게 되였다.

북남공동성명의 발표는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세계 많은 나라들에서는 북과 남사이에 협상의 길이 열리고 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된것을 《세계사적으로 헤아릴수 없이 큰 의의를 가지는 사변》으로 평가하였으며 《수령님의 숭고한 념원과 불면불휴의 노력의 결실》이라고 높이 찬양하였다.

7.4북남공동성명의 발표는 줄기차게 벌려온 우리 당의 조국통일투쟁에서 하나의 커다란 봉우리를 마련한 력사적사변으로서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통일리념과 탁월한 령도력의 결실이였다.

7.4북남공동성명의 발표는 우리 당의 하나의 조선로선, 통일로선의 구현인 자주적평화통일방침의 빛나는 승리이며 특히 북남협상방침이 가져온 훌륭한 열매였다. 북남고위급정치회담과 공동성명의 발표는 통일운동을 북남대화를 통하여 새로운 높이에서 이끌어나가는데서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를 열어놓았다.

③ 우리 당은 하나의 조선로선으로 내외 반통일세력의 분렬로선에 준엄한 철추를 내리였다.

우리 당은 그후 남조선당국자들이 무분별하게 《대화있는 대결》, 《대화있는 경쟁》, 《대화있는 공존》을 떠벌이면서 전쟁준비를 다그치고 7.4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되여 1년도 못되던 1973년 6월 23일 《두개 조선》의 유엔가입안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특별성명》이라는것을 들고나와 분렬영구화를 정책으로 선포하였을 때에도 그것을 통일애국적인 방침으로 여지없이 짓부셔버렸다.

남조선당국자의 《특별성명》이라는것은 국제적으로 《두개 조선》을 합법화하고 영구분렬을 기정사실화하자는것으로서 사실상 7.4북남공동성명의 원칙들을 뒤집어엎고 북남대화를 거부한 대화포기선언이였으며 나라의 통일을 반대하고 분렬을 영구화하기 위한 분렬선언이였다. 하기에 일본잡지 《겐다이노메》는 남조선당국자들의 《6.23성명》을 론평하면서 이것은 동서도이췰란드방식을 모방하여 《1 민족, 2 국가, 2 정부》로 하여 《두개 조선》을 만들자는것이라고 그 검은 속심을 까밝혔다.

남조선당국자의 《특별성명》에 대한 소식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오후 2시 평양시군중대회장의 연단에서 《민족의 분렬을 방지하고 조국을 통일하자》라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면서 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는 조국통일5대방침을 천명하시였다.

조국통일5대방침은 전쟁과 민족적불신의 시대, 외세의존과 분렬의 시대와 함께 분렬주의세력이 통일세력에 의해 필연코 종말을 고하고야 만다는것과 내 나라, 내 민족의 통일의 력사가 반드시 다가오고야 만다는것을 예고하는 선언이였다.

통일로선에 호되게 얻어맞은 분렬주의자들은 아우성을 쳤다. 서울주재 한 외신은 《청와대집권층안에서는 평양에서 발표된 조국통일5대방침으로 하여 기대를 걸었던 〈특별성명〉이라는 〈산아〉가 태여나자마자 된서리를 맞았다는 감출수 없는 실망감과 허탈감에 빠져있다.》라고 보도하였다.

남조선인민들은 조국통일5대방침이 나오자 그것을 《영구분렬의 위기를 막고 우리 민족이 나아갈 통일의 길을 환히 밝혀준 등대》, 《자주적평화통일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고 그것을 승리에로 종착시킬수 있는 위대한 강령》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동강난 조국을 잇기 위하여 5대강령실현에 힘쓰자.》고 주장해나섰다.

세계인민들은    《이것은    정치에서    흔히    말하는    단순한   림기응변이   아니라   만사를   꿰뚫어보시는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만이 창조하실수 있는 정치사의 일대 기적이다.》, 《평양에서 울린 통일선언으로 〈6.23특별성명〉은 4시간만에 휴지쪽이 되였다.》 고 격찬하였다.

조국통일5대방침이 발표됨으로써 통일문제해결에서 애국과 매국간의 계선, 통일로선과 분렬로선간의 계선이 더욱 명백히 그어지게 되였다.

안팎의 분렬주의자들은 우리의 조국통일5대방침이 나간 후 1973년 제28차 유엔총회와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에 남북조선 《유엔동시가입안》과 남조선 《유엔단독가입안》을 상정시켜 성사시키려고 책동하는 한편 1973년 7월이후 《남북교차승인론》과 함께 1974년에는 이른바 《불가침조약》을 체결할데 대한 문제를 들고나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정세에서 주체63(1974)년 3월 4일에 하신 연설에서 조선문제는 구경은 통일이냐 분렬이냐, 하나의 조선이냐 두개의 조선이냐 하는 문제에 귀결된다고 하시면서 남조선당국자들이 분렬책동을 계속하면서 대화에 성실히 림하지 않고있는 조건에서 나라의 통일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면 이 문제를 북과 남의 당국자들사이에서만 론의할것이 아니라 전민족적토의에 붙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대민족회의와 북남정치협상회의를 열것을 다시금 제기하시였다. 그리고 《불가침조약》론의로 민족을 희롱하는 남조선당국자의 범죄행위를 폭로단죄하고 그에 대처한 대미평화협정체결안을 제기하시였다.

이와 같은 주동적인 통일방안들은 세계의 신문, 방송, 통신들로부터 《조선의 통일을 촉진하는 정당한 제안》, 《새로운 긍정적발기》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④ 우리 당은 적극적인 대화방침을 틀어쥐고 반통일세력의 분렬주의적책동을 걸음마다 분쇄하면서 조국통일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끌어나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70년대 중엽에 와서도 분렬의 위기가 더 커가는 실정에서 주체64(1975)년 10월 당창건 30돐기념대회에서 하신 력사적인 보고에서 《유엔군사령부》의 해체와 남조선주둔 미군의 철거,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에로의 전환,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의 전국적인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북남련방제의 실시 등 우리가 견지하고있는 립장과 방안을 다시금 천명하시였다. 뿐만아니라 주체67(1978)년 9월에 진행된 공화국창건 30돐기념 중앙경축대회에서 하신 력사적인 보고에서 대화를 《두개 조선》조작을 위한 수단으로 리용하려는 반통일세력의 속심을 까밝히시고 진심으로 대화를 하고 합작을 하려면 민족분렬정책을 통일정책으로 바꾸고 반공화국정책을 공화국과 련합하는 정책으로 바꾸어야 할것이라는것을 강조하시였다.

우리 당은 북남대화를 재개확대할 목적밑에 주체68(1979)년 1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성명으로 북남대화를 재개할데 대한 새로운 방안을 제기하고 4개 항목의 제안을 내놓도록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통일로선을 계속 고수할 의지를 표명하여 우리 당은 1979년 《10월사건》(박정희사살사건)과《12.12숙군쿠데타》에 의한 군사파쑈분자들의 집권으로 정세가 다시 어려운 국면에 이르게 되였을 때에도 주체68(1979)년 11월 9일 《합작, 단결, 통일로 민족의 출로를 열자》라는 《로동신문》 사설을 발표하는 한편 주체69(1980)년 1월에는 또다시 북남대화를 마련하고 나라의 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다무적 또는 쌍무적접촉을 가질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남조선의 각 정당, 사회단체, 당국의 책임적인 인물들에게 보냈다.

이러한 우리 당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하여 7차례의 북남적십자회 본회담과 3차례의 북남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들의 회의가 진행되고 상설적인 공동기구로서 북남조절위원회가 구성되여 3차례 운영되였으며 그후 북남조절위원회의 실무운영기구인 간사회의가 세차례 진행되고  10차례의 북남조절위원회 부위원장접촉이 진행되였다. 그리고 6차례의 북남적십자회담 쌍방대표들사이의 접촉이 진행된데 이어 본회담의 의제와 본회담의 재개문제를 토의할 10여차례의 적십자실무회의가 진행되였다.

뿐만아니라 주체68(1979)년 2월 17일부터 3월 14일까지기간에 판문점에서 민족통일준비위원회를 내오기 위한 북과 남의 련락대표들의 세차례의 접촉과 2월 27일부터 3월 12일까지의 기간에 제35차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북남통일팀출전에 관한 4차례의 회담이 진행되였으며 북과 남의 총리접촉을 위한 실무자회담이 주체69(1980)년 2월 6일부터 판문점에서 9차례에 걸쳐 진행되였다.

1970년대에 막이 열리고 적극적으로 진행된 북과 남의 대화과정은 우리 당의 조국통일방침, 북남대화방침의 정당성과 뜨거운 민족애로 일관된 수령님의 한없이 넓은 도량과 숭고한 인덕을 내외에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겨레의 마음속에 그 누구도 우리 민족을 절대로 둘로 갈라놓을수 없고 서로 마주앉아 통일의 방도를 모색하고 마음을 합치면 반드시 통일위업을 이룩해나갈수 있다는 굳은 확신을 안겨주었으며 국제적범위에서 하나의 조선로선, 통일로선의 지지자, 동정자대렬을 더욱 늘여나갈수 있게 하는데서도 실로 커다란 의의를 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