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진조국전쟁전야의 국내외정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리조시기에 와서도 우리 인민들은 외적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웠습니다. 그러나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방비를 강화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처할 대신에 태평성세만 부르고 안일한 생활에 파묻혀있었습니다.》

△ 16세기 초중엽이후 일본침략자들의 거듭되는 도발행위

1419년 쯔시마원정이후 일본해적들은 한동안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지 못했으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적들의 침략책동이 더욱 로골화되였다.

-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것은 1510년의 《삼포왜란》이였다.

1510년 4월 부산포(부산), 냉이포(창원군 제포리), 염포(울산) 등 세개의 포구들에 와서 살면서 장사를 하고있던 일본상인 수천명은 조선측의 통제에 불만을 품고 쯔시마령주와의 련계밑에 침략적도발행위를 감행하였다.

적들은 쯔시마령주가 무어 보낸 해적선 100여척의 무력과 합세하여 냉이포, 부산포에 달려들어 인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략탈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것을 력상에서 《삼포왜란》이라고 한다. 이 란동은 제때에 진압되고 일본해적들에게 해당한 징벌조치가 취해졌으나 그후에도 적들의 침략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1510년 삼포왜란이 있은 이후 조선봉건정부는 일본봉건세력들과의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였으나 그들의 배신적침략행위에 대한 적극적인 징벌대책을 취하지는 못하였다.

그후에도 일본해적들은 1544년과 1555년에 대규모침입을 감행하였는데 당시 남해안에 있던 조선수군들은 침입해오는 해적들을 그때마다 소멸하였다.

1544년 4월 12일 일본해적선 20여척이 경상도 고성 사량진(통영시 사량면 금평리)에 침입하여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일본해적들은 성을 점령하려고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전투는 새벽부터 한낮까지 계속되였다.

사량진을 지키고있던 군인들과 인민들은 용감하게 싸워 적들을 쳐물리쳤다.

이것을 력사에서 《사량왜변》이라고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봉건정부는 왜구의 침략이 계속 있을것을 우려하여 그 대책으로서 가덕도에 새로 성을 쌓고 진을 설치하였다. 또한 왜구에 대한 징벌조치로서 조선에 와있는 일본인들에 대한 대우를 낮추고 또 일본국왕(막부의 장군)이 보내는 무역선외의 다른 무역선의 왕래를 금지하였다.

그후 쯔시마령주는 저들의 죄과를 사죄하고 금지령의 해제를 간청하여왔으므로 조선봉건정부는 1548년에 종래보다 훨씬 제한된 범위의 무역을 허가하였다.

《사량왜변》이 있은후 일본해적들은 정신을 차릴대신 1555년 또다시 대규모적인 침입을 감행하였다.

명나라 연해일대에서 해적행위를 하다가 돌아가던 일본해적떼의 한 집단이 1555년 5월 11일 70여척의 배를 끌고 전라도 령암군 달량포에 침입하였다.

적들은 성밖에 사는 주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략탈을 감행한후 달량성을 포위공격해왔다. 달량성의 군민들은 수량상 우세한 적들과 맞서 3일간이나 용감히 싸웠다.

우세한 력량으로 달량성을 강점한 적들은 한동안 이곳에서 로략질을 감행한 다음 5월 21일에는 전라도병영에, 이튿날에는 장흥부에 침입하고 24일 령암성을 공격해왔다. 령암성의 군민은 25일 적들과 치렬한 싸움을 벌리였다. 날래고 용감한 군인들로 무어진 습격조는 향교에 있는 적지휘부를 들이쳤다. 아군의 일제사격에 적장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심한 부상을 입었다. 령암성방위자들은 불화살을 쏘아대면서 적진지에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다. 때마침 서풍을 타고 불화살이 날아가 적들에게 불벼락을 들씌웠다.

바빠맞은 적들은 도망쳐 저들의 지휘부가 있는 향교안으로 모여들었다. 방어군은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일본해적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들이대였다. 기가 꺾인 적들은 변변히 대항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향교전투에서 령암성의 군민들은 왜적 104명의 목을 자르고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여 무리로 쓸어눕혔다. 령암성전투에서 군인들과 인민들은 모두 200여명의 해적들을 소멸하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다.

령암성전투에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적들은 그후 가리포, 회령포, 록도 등지에 또다시 침입해 왔다. 이어 왜적들은 금당도에도 기여들었다가 다시금 전라도수군의 강력한 타격을 받고 패주하였다.

6월 27일에는 1 000명의 해적들이 제주도에 침입하였다가 애국적인 군인들과 인민들의 강한 반격을 받고 쫓겨갔다.

5월 중순부터 6월 하순까지 약 한달반동안이나 조선남해지방의 섬들과 연해에 기여들어 살인과 방화, 략탈을 감행하던 일본해적들은 애국적인 군민들의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무리죽음을 당하고 쫓겨갔다.

《을묘왜변》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왜적들은 그후 수십년동안 큰 규모의 해적행위와 략탈행위를 감히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렇듯 일본해적들이 침입할 때마다 현지수비군과 인민들은 적들에게 응당한 징벌을 안기였으나 봉건통치배들은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어루만지기만 하였다.

― 16세기 말에 일본침략자들의 침략책동이 더욱 강화되였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 120여년간이나 계속된 봉건령주들사이의 큰 싸움이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여러 봉건세력들을 복종시키고 전국을 통합함으로써 끝나게 되였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전 일본을 통합한 힘으로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망상하였다. 이자는 침략전쟁을 통하여 폭리를 얻고 령토를 획득함으로써 자기의 팽창주의적침략야망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굴복은 하였으나 여전히 경제군사적지반을 보유하고있는 봉건령주들의 병력과 경제력을 대외전쟁에서 소모시킴으로써 자기의 전제적지배권을 확립할수 있다고 타산하였다.

이러한 음흉한 침략야망밑에 일본침략자들은 조선에 대한 침략준비를 서두르고있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에 앞서 《일본이 앞으로 명나라로 쳐들어가겠는데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오만무례한 편지를 조선봉건정부에 보내여왔다. 거기에는 벌써 일본침략자들의 흉악한 침략기도가 력력히 풍기고있었다.

이렇듯 일본침략자들의 침략기도가 로골적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방비를 강화하고 적들의 침략에 대처할 대책을 세우지 않고있었다.

 △ 임진조국전쟁 전야의 국내형편

봉건통치배들은 전쟁에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고 태평성세만 부르고 당파싸움에만 몰두하면서 안일한 생활에 파묻혀있었다.

봉건통치배들은 개인적야심과 당파적리익만을 생각하면서 다른 당파에 속한 사람들을 모조건 배척하고 모해하였다.

그러한 표현은 1590년 3월~1591년 3월까지 조선봉건정부에서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그때 서인출신인 정사 황윤길은 적들이 인차 침입할것이라고 하였고 동인출신인 부사 김성일은 일본이 아직 그럴 형편이 못된다고 보고하면서 서로 자기 당파의 주장을 고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봉건정부는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전쟁의 위험에 대처하여 아무러한 대책도 취하지 못하고있었다.

군사제도는 헝클어지고 군대도 얼마 없었으며 성을 비롯한 군사시설들은 파괴된 형편에 있었다. 그리고 《문존무비》사상에 물젖은 썩을대로 썩어빠진 봉건통치배들은 무관의 직위에 늙어빠진 문관을 배치하거나 문관에게 겸임시켰다. 봉건국가에는 사변에 대처할만한 국가적축적도 없었다.

봉건국가는 당시 무명 10~20필이면 군대에 복무하는것을 면제해주었으며 군적에 허위등록한 대상이 많았는데 경상도의 군인등록상태만 놓고 보아도 등록군인 10만명중 실제는 2만명밖에 안되는 형편이였다. 그리고 진관제도가 심히 문란되여 군대동원체계가 전혀 없는것과 마찬가지였다.

뿐아니라 국가적축적상태를 놓고보아도 성산고을의 식량이 23만섬중 16만섬밖에 안되였으며 천도 전체량의 3분의 1로 줄어든 상태였다.

사실 봉건통치층안에서도 리이(률곡)와 같은 애국적인 관료들은 유명한 10만양병설과 같은 국방대책을 제창하였으나 그것은 부패무능한 봉건통치층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국가적정책으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나라의 형편이 이처럼 매우 어지럽고 국력이 약화되여 불리하게 조성된 정세에서 조선인민은 간악한 일본침략자들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