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봉건적억압과 착취를 반대한 인민들의 투쟁

 

△ 대토지소유의 장성과 봉건적착취의 강화

16세기 봉건통치배들이 더욱더 타락하여 봉건국가의 통치질서를 유린한 결과 대토지사유가 장성하고 반면에 농민들에 대한 착취는 더욱 강화되였다.

- 이 시기에 이르러 봉건국가의 토지에 대한 지배가 약화되자 토지겸병이 더욱 심하였다.

왕실과 대관료들은 권력을 배경으로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내여 저들의 사유토지를 급속히 늘여나갔다. 그리하여 왕실은 물론 수백수천결의 토지와 근 1만명의 노비를 가진 대토지소유자들이 적지않게 생겨났다.

1511년경에 대신 류순정의 농장은 《없는 고을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대관료들뿐아니라 지방관리를 비롯한 중소량반에 의해서도 토지겸병이 진행되여 그들의 토지소유도 눈에 띄게 장성하였다.

일부 평민들속에서도 부유한 상인들이 토지를 사들여 대토지소유자로 되여갔다.

이러한 현상은 봉건적토지소유관계에서의 순 봉건적인 신분적속성이 느리게나마 점차 와해되기 시작하였다는것을 보여주었다.

토지겸병의 확대는 토지에 대한 봉건국가의 지배력을 심히 약화시켰으며 조세수탈을 비롯한 봉건적착취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토지겸병으로 인하여 령락된 농민들의 많은 부분이 봉건지주들의 소작농민으로 전락되였다.

- 16세기에 봉건국가는 여러가지 명목의 전세와 함께 묵은 땅과 재해을 입은 땅에까지 억지로 전세를 부과함으로써 인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다.

신역(身役)착취는 이 시기에 이르러 직접적인 로동력착취대신에 천으로 바치게 하는 가포(價布)에 의한 착취로 점차 변화되여갔다.

이것은 각이한 신분의 신역이 동일한 면포 한가지로 단일화되여가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즉 량인과 천민사이의 신분적차이가 일부 해이되기 시작했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인민들은 신역착취를 반대하여 오래동안 여러가지 형태의 투쟁을 벌려왔다. 당시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가 신역을 부담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피지배신분인민들가운데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신역을 대신 서게 하고 그 대가로 그에게 일정한 포화를 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대립현상이라고 하였고 그 대가로 무는 포화를 《가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신역착취에 대한 인민들의 반항의 결과로 생긴것이다.

가포제도의 출현은 로역에 의한 착취에 비하여 당면하게는 육체적고통을 덜어주고 개체살림을 정상적으로 꾸려나갈수 있다는 점에서 인민들에게 초기에는 일정한 유리성이 있었다.

그러나 가포착취는 매우 파렴치하고 가혹한것이였다.

이 시기 봉건적착취의 강화는 농민들의 령락과 노비화를 촉진시켰다. 많은 농민들이 병작농민으로, 노비로 굴러떨어졌으며 제 고장을 떠나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였다.

△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한 인민들의 투쟁

16세기 봉건통치배들의 착취의 강화는 인민들을 더큰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착취와 압박이 있는곳에서는 반드시 인민들의 혁명투쟁이 일어나는 법이며 압제자들의 폭압이 강화될수록 그에 항거하는 인민들의 투쟁은 더욱 조직화되고 완강하여지는 법입니다.》

이 시기에 인민들은 여러가지 형태로 봉건적억압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렸다.

그 가운데서 가장 적극적인 투쟁은 농민무장대의 투쟁이였다.

농민무장대는 깊은 산골, 으슥한 길목에 의거하여 관리들과 량반지주를 비롯한 착취자들을 처단하거나 대낮에 관청을 습격하였으며 때로는 수많은 관군과 정면으로 맞서싸우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것은 홍길동부대와 림꺽정부대였다.

- 1500년경에 한성근처에서 활동한 홍길동부대는 여러 고을의 관청을 습격하여 통치배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홍길동부대의 기묘한 활동으로 피동에 빠진 지방관리들은 그들을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이 무장대오의 의로운 투쟁은 당대사회에 심각한 영향과 큰 충격을 주었다.

이 투쟁을 주제내용으로 한 소설 《홍길동전》에 형상된 홍길동의 뛰여난 지략과 신비한 행동은 신묘한 전술로 하루속히 계급적원쑤들을 징벌하고 소탕할것을 열망하는 인민들의 지향을 반영한것이였다.

- 이 시기 가장 규모가 큰것은 림꺽정농민무장대였다.

림꺽정은 경기 양주의 백정출신으로서 지혜있고 용감하고 날래기로 이름이 났었다. 그는 천대받는 인민들 수십명을 집결하여 무장대의 골간과 지휘부를 꾸렸다.

림꺽정폭동군은 1559년부터 1562년까지 황해도를 중심으로 하여 한성, 경기, 평안도, 강원도일대에서 활동하였다.

폭동군은 구월산을 본거지로 하여 주로 황해도와 경기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멀리 평안도, 강원도에까지 자기 세력을 뻗쳐 그곳에도 투쟁기지를 꾸려놓았다.

림꺽정농민무장대는 깊은 산속에 본거지를 두고 관청이나 량반지주들의 집을 습격하여 원쑤들을 처단하고 략탈당하였던 재물들을 빼앗아내는 투쟁을 활발히 벌리였다. 그들은 서울과 평양사이의 큰길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공물이나 진상을 실은 짐바리들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아내는 대담한 투쟁도 진행하였다.

1560년 8월 림꺽정부대는 서울시내에 진출하여 봉건통치배들에게 된벼락을 안기였다.

그해 가을 또다시 서울로 진격하였으며 지어 봉건국가의 폭압기구의 하나인 전옥서를 파괴할 계획까지 세웠었다. 이에 당황망조한 봉건통치배들은 서울의 성문을 닫고 시내를 샅샅이 뒤지면서 무장대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인민들과 련계를 맺고 활동하는 그들의 종적을 찾을수 없었다.

1560년 11월에 봉건정부는 황해도안의 몇개 군들에서 군사 수백명을 파견하여 평산 마산리에서 무장대와 맞다들었으나 무장대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관군과 격전을 벌려 적들을 섬멸하였다.

림꺽정부대는 그후 1561년 말 구월산으로 들어가 험준한 곳에 자리잡고 계속 활동하였다.

림꺽정부대는 3~4년이라는 오랜 기간 고정된 투쟁거점에 못박혀 피동적인 방어에 머무르지 않고 평안도, 강원도의 험준한 산간지대에서 기동적이고 민활한 활동을 벌려 봉건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기였다.

봉건통치배들은 이 무장대의 모사로 들어가있던 서리출신 서림이라는 자의 변절을 리용하여 1562년 초 겨우 무장대를 진압하였다.

림꺽정농민무장대의 활동은 투쟁대상과 방법, 그 조직성에서 전 시기에 비하여 한단계 올라선 투쟁으로서 우리 나라 농민전쟁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처럼 16세기 농민폭동군들은 줄기찬 투쟁을 벌려 봉건통치배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 시기 농민폭동군의 활동에서는 그 이전시기의 투쟁과 구별되는 특징들이 있다.

그것은 이 시기의 폭동군들은 비록 봉건적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집권관료배들을 대상으로 투쟁을 벌려나간것이며 깊은 산속에 일정한 본거지를 만들어놓고 그곳을 거점으로 군사적, 물질적준비를 갖추면서 투쟁을 벌려나간것이다.

또한 인민들이 처음부터 자신들의 력량으로 대오를 뭇고 독자적인 힘으로 반봉건투쟁을 벌려나간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장구한 기간 인민들이 반봉건투쟁을 벌리는 과정에 그들의 자주의식과 능력이 그만큼 높아진 결과였다.

그러나 16세기 초중엽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은 중세기농민폭동이 가지고있는 제한성을 극복하지 못하였고 바로 그것으로 하여 실패를 면치 못하였다.

16세기 초중엽 인민들의 반봉건투쟁은 봉건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우리 나라 력사발전을 힘있게 떠밀었으며 그들의 투쟁과정을 통하여 인민들의 자주의식과 투쟁능력을 더욱 증대시킨것으로 하여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큰 의의를 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