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 실린 고구려관계기사들에 대한 몇가지 분석​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우리 나라 력사와 관련한 참고서적들을 볼 때 반드시 주체적립장에서 비판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난날의 력사를 연구할 때 우리는 언제나 주체적립장에 튼튼히 서서 해당 력사자료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평가하고 리용하여야 한다. 특히 고구려력사와 관련된 주변나라들의 력사책을 볼 때에는 그것이 해당한 력사적사실을 정확히 반영하였는가를 잘 따져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중국 24사의 하나인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 실린 고구려관계기사들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고구려력사의 일면을 해명하려고 한다.

 

《신당서》는 1044~1060년에 송나라의 구양수, 송기 등이 편찬한 당왕조의 력사책이다. 《신당서》는 본기, 지, 표, 렬전으로 구성된 기전체력사책으로서 모두 225권으로 되여있다. 이러한 《신당서》의 권220에 고구려에 대하여 서술한 고려전이 있다. 여기에는 고구려의 위치와 수도, 정치제도, 풍속, 고구려ㅡ당관계자료 등이 실려있다.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 반영된 기사들을 통하여 무엇보다먼저 고구려의 건국시기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B.C.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현도군을 설치한 이후시기로 보면서 고구려의 초기력사를 외곡하고있다.

그러나 중국정사의 하나인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 실린 기사들을 통하여서도 고구려가 현도군설치이전에 성립된 나라였다는것을 찾아볼수 있다.

고구려가 현도군설치이전에 성립된 나라였다는것은 우선 주몽의 사당에 연나라시기 하늘에서 내려보낸 갑옷과 창이 있었다는 기사를 통하여 알수 있다.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는 《(료동)성에 주몽의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쇠사슬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는데 망녕되게 이전 연나라시기에 하늘에서 내려보낸것이라고 한다.》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여기에서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사당에 갑옷과 창이 있었다는것은 주몽과 이것들사이에 어떤 련관이 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갑옷과 창은 이전 연나라시기에 하늘에서 내려보낸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자료의 《이전 연나라시기》가 언제인가 하는것이다.

645년 고구려ㅡ당전쟁이전시기에 중국력사에는 주나라의 제후국이였던 연나라 그리고 5호 16국시기(304-439년)의 전연, 후연, 남연, 북연이 있었다. 이 중에서 4세기 중엽이후에 존재하였던 전연, 후연, 남연, 북연이 주몽과는 련관이 없다는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때문에 자료에 나오는 이전 연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이였던 연나라일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전 연나라시기라고 할 때 그것은 연나라가 진나라에 통합되기 전인 B.C. 222년이전으로 된다.

이것은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이 B.C. 222년이전에 활동하였으며 《삼국사기》에는 그가 22살나는 해에 고구려를 세웠다고 되여있으므로 적어도 B.C. 3세기말이전에 고구려가 성립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다시말하여 고구려의 건국시기가 현도군설치이전시기라는것을 명백히 말해준다.

고구려가 현도군설치이전에 성립된 나라였다는것은 또한 고구려가 900년동안 존재하였다는 기사를 통하여서도 알수 있다.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는 668년 고구려ㅡ당전쟁시기에 당고종이 군대형편에 대하여 묻는 말에 누군가가 《<고려비기>(고구려비기)에 <900년이 못되여 80대장이 있어 마땅히 멸망시킬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고씨가 한나라시기 나라를 가지고있은 때로부터 지금 900년이 되였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우의 자료에서 나오는 《한나라시기 나라를 가지고있은 때로부터 지금 900년이 되였다.》는것은 한나라시기 혹은 그 이전에 고구려가 국가로 존재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며 실제로 한나라가 성립된 B.C. 206년부터 고구려가 존재를 마친 668년까지는 870여년 즉 거의 900년이 된다. 이것은 고구려가 B.C. 3세기말~B.C. 2세기초 즉 현도군설치이전시기에 성립된 나라라는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 나오는것처럼 고구려는 B.C. 3세기말~B.C. 2세기초에 성립된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학계가 밝힌것처럼 B.C. 277년에 성립되였다.

우에서 본것처럼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 나오는 자료들을 통하여서도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현도군설치이후로 보는 그릇된 주장들의 부당성에 대하여 잘 알수 있는것이다.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 반영된 기사들을 통하여 다음으로 고구려의 강대성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서 고구려의 강대성은 우선 고구려가 640년대 중엽부터 660년대 전반기까지 당나라의 거듭되는 침공을 성과적으로 물리친데서 찾아볼수 있다.

645년에 당태종은 100만의 침략군을 직접 거느리고 고구려를 반대하는 전쟁을 도발하였지만 고구려군대와 인민들의 거세찬 항전에 부딪쳐 참패만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고구려군은 신성과 건안성을 굳건히 지켜냈을뿐아니라 료동성에서 적들의 공격을 17일간이상이나 저지시키고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기였다. 그후 고구려의 안시성방위자들은 80여일간이나 적들의 맹렬한 공격을 물리치고 성을 지켜냄으로써 645년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였다.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 의하면 당태종은 안시성에서 철수하면서 성의 군민들이 성을 지켜낸것을 《기쁘게》 여겨 안시성 성주에게 비단 100필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퇴각하는 저들을 추격하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뢰물이였다. 그후 647년, 648년에도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단행하였지만 그때마다 커다란 타격을 받고 쫓겨갔다. 그리하여 당태종은 649년에 죽으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기였다고 한다. (《삼국사기》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 8년 4월)

 

그러나 당나라통치배들은 그후에도 응당한 교훈을 찾지 못하고 660년대 전반기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그때마다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고 저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처럼 640년대 중엽부터 660년대 전반기까지 진행된 고구려ㅡ당전쟁에서 고구려인민이 이룩한 자랑찬 승리는 고구려강대성의 뚜렷한 증시로 된다.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서 고구려의 강대성은 또한 당나라의 통치배들과 백성들이 고구려의 강대성을 인정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당고조는 수양제시기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에 관여한것으로 하여 고구려의 강대성을 목격하게 되였다. (《신당서》권 1 본기 제1고조) 더우기 이 시기 북방의 정세가 복잡한 조건에서 당나라가 동방의 강대국인 고구려와 충돌하는것은 어느모로 보나 불리하였다. 그리하여 당고조는 고구려와 대등한 관계를 맺으려고 하였던것이다. 물론 이것이 대국주의적관점에 물젖어있던 시중 배구, 붕서시랑 온언박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사실은 수나라를 무너뜨린 당나라통치배들도 역시 고구려를 강대한 나라로 생각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당고조뿐아니라 당태종도 역시 고구려의 강대성에 대하여 인정하고있었다.

 

645년 2월 락양에서 정주에 이른 당태종은 《지금 천하가 크게 평정되였는데 오직 료동(고구려를 가리킴)이 평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후대(고구려의 제33대왕 보장왕을 가리킴)가 군사와 말이 강성함을 믿고 모의하여 정벌을 이끄니 전쟁이 바야흐로 시작되였다. 때문에 내가 직접 그것을 쟁취하여 후세에 근심이 없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태종이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하였다는것을 어느정도 인정하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게 해준다.

고구려의 강대성에 대하여서는 당나라의 통치배들뿐아니라 관료들과 백성들도 인정하고있었다.

 

644년에 당태종은 상리현장을 파견하여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지 말것을 요구하는 부당한 내정간섭행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연개소문이 강경한 립장을 취하자 당태종은 고구려를 반대하는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이때 간의대부였던 저수량은 《페하의 군사들이 료하를 건너가서 이기면 참으로 좋으나 만분의 일이라도 통하지 않으면 또다시 군사를 써야 하며 다시 군사를 쓰면 편안하겠는지 위태롭겠는지 헤아릴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저수량이 당태종의 고구려침략에 대하여 강한 우려를 품고있었고 그의 이러한 우려는 고구려의 강대함을 인식한데로부터 오는것이였다.

 

당시 고구려와의 전쟁을 우려하면서 반대한 사람은 저수량만이 아니였다.

 

644년 11월 당태종은 조서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이길수 있다는 이른바 《다섯가지 조건》을 조목조목 렬거한 끝에 《이번 싸움에 대하여 의심을 품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하였다. (《삼국사기》권21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3년 11월) 이것은 당시 당나라사람들속에서 강대한 고구려와 싸워이길 승산이 없다는 패배주의, 염전사상이 적지 않게 떠돌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특히 이에 앞서 당태종은 고구려를 직접 치기 위하여 장안의 늙은이들을 불러 위로하면서 《늙은이들과 약속하건대 아들과 손자들이 나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내가 잘 위무할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즉시 천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고 한다. 이것도 역시 사람들이 고구려와의 전쟁에 잘 응해나서지 않기때문에 당태종이 직접 그들을 안심시키기에 무진애를 썼다는것을 말해준다.

 

고구려ㅡ당전쟁전야에 활동한 당나라의 이전 의주자사 정천숙도 당태종의 고구려침략을 반대한 사람들중의 하나였다.

 

644년 11월 락양에 이른 당태종이 수양제를 따라 고구려를 친 일이 있다고 하여 관직에서 물러나있던 이전 의주자사 정천숙을 불러들여 고구려ㅡ당전쟁의 전망에 대하여 물어본적이 있었다. 이때 정천숙은 료동은 길이 멀어서 군량수송이 곤난하며 동이사람들이 성을 잘 지키기때문에 쉽게 항복시킬수 없다고 하면서 당태종의 고구려침략을 반대하였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정천숙은 수나라시기에 고구려에 침입해본적이 있었기때문에 고구려의 실정을 잘 알고있었던것으로 하여 고구려침략을 반대할수 있었다.

력사적사실은 고구려가 동방의 강국이라고 하던 당나라도 감히 허술히 대하지 못한 강대국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신당서》고려(고구려)전에 반영된 기사들을 통하여 다음으로 고구려-당전쟁의 성격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 

《신당서》고려(고구려)전의 기사들을 통하여서도 고구려ㅡ당전쟁이 당나라통치배들의 침략을 쳐물리치기 위한 고구려인민들의 반침략투쟁이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당태종은 645년 고구려ㅡ당전쟁을 일으키면서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들을 죽이면서 마음대로 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목을 늘이고 구원을 기다리고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마치 고구려사람들을 《폭군》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한것처럼 하면서 저들의 침략행위를 가리워보기 위한 술책일따름이였다.

 

642년에 진행된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지배계급내부에서의 권력싸움이였으며 대다수의 고구려인민들은 당나라에 대한 투항주의정책을 실시하던 영류왕을 비롯한 통치배들이 제거되고 연개소문을 비롯한 집권자들이 대당강경정책을 실시하는것을 지지하면서 그에 적극 합류해나서고있었다.

만일 이러한 연개소문의 정변이 《정벌》의 대상으로 된다면 626년에 자기 형이였던 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고 태자로 되고 나중에는 자기 애비였던 당고조까지 밀어내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당태종의 죄행도 마땅히 정벌의 대상이 되여야 했다. 그리고 고구려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하면서 전쟁을 일으킨 당나라통치배들이 취한 《조치》들도 그 기만성을 여실히 드러내보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645년전쟁때 료동성을 함락하기 힘들게 되자 화공전술로 성안의 거의 모든 집을 불태워버리고 만여명을 죽였으며 당태종은 안시성방위자들의 용감한 투쟁으로 성을 점령하지 못하게 되자 리세적에게 성을 격파하는 날에는 남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백애성(백암성)을 공격할 때 리세적은 《군사들이 떨쳐나서 앞장선것은 로획을 탐낸것입니다. 지금 성을 빼앗을 위기에 있는데 항복을 허락하여 군사들의 뜻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초기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당태종에게 항의하였다. 이에 바빠맞은 당태종은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자기 창고의 물건으로 《공로》있는 자들에게 상을 주었다. 더우기 당나라통치배들은 고구려의 개모성, 료동성, 백암성을 점령하기 바쁘게 저들의 통치단위인 개주, 료주, 암주로 개편하였으며 엄중하게는 전쟁이 끝난 다음 료동성에서 항복한 사람 1만 4 000명을 노비로 만들어 이전에 유주에 모였던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구려ㅡ당전쟁이 결국 더 많은 토지와 노비를 얻기 위한 당나라통치배들의 침략전쟁이였으며 고구려에 있어서는 침략자들로부터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반침략전쟁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구려는 현도군설치이전에 세워진 당당한 주권국가였으며 고구려ㅡ당전쟁은 고구려인민들의 반침략조국방위전인 동시에 동방의 두 강국사이의 대결이였다.

김일성종합대학 허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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