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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관에 대한 력사적연원에 대하여

2017-11-17   김일성종합대학 최연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발해는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옛 고구려땅에 세워진 강력한 주권국가로서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발전시켰으며 우리 나라에 대한 북방 여러 나라들의 거듭되는 침입을 막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강력한 주권국가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에 이르는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200여년동안 존재한 발해가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당당한 지위를 차지하고있었으나 발해와 관련한 력사책들이 남아있지 않음으로 하여 그 력사는 자기의 모습을 잃게 되였으며 이를 기화로 하여 외곡되고 왜소화된 발해와 관련한 력사책들이 나돌면서 발해사문제에 그늘을 던지게 되였다. 특히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하여 세워진 조선민족의 나라가 아니라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외곡하고있는 견해들도 있다. 그런 조건에서 지난 시기 력사가들이 발해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연구하였는가 하는것을 밝히는것은 발해의 진면모를 해명하는데서 기본고리 되고있다.

우리 력사학계에서는 발해사의 진면모를 해명하기 위한 오랜 기간의 연구를 통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강력한 주권국가로서 정치와 경제, 문화의 여러면에서 당시 병존해있은 후기신라보다도 훨씬 발전된 나라였다는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발해사연구에서는 발해의 고구려계승관계를 비롯하여 연구를 심화시켜야 할것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이 글에서는 이미 이룩된 발해사연구성과들을 참고하면서 발해관에 대한 력사적연원에 대하여 밝히려고 한다.

 

ㅡ 발해에 대하여 처음으로 론의되기 시작한것은 후기신라때부터였다.

발해에 대한 후기신라 당시의 력사기록은 현존하는것이 없다. 그렇지만 후시기의 기록을 통하여 그 연원을 알수 있다.

후기신라사람들의 발해관을 보여주는 자료들은 현재 최치원의 편지 및 금석문자료들과 《삼국유사》에 인용된 《신라고기》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보낸 편지가 기록되여있는데 그에 의하면 《고구려의 남은 자손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아래에 의거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라고 되여있다. (《삼국사기》권46 렬전6 최치원) 이것은 최치원이 발해가 고구려유민들이 세운 나라라는것을 인정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고기>에 이르기를 고려의 옛 장수 조영의 성은 대씨이고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남쪽에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여있다.(《삼국유사》권1 기이2 말갈발해)

 

최치원의 편지내용이나 《신라고기》의 기록들을 보면 후기신라 사람들이 발해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다. 다시말하여 후기신라 사람들은 발해가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는것을 정확히 인식하고있었다.

그러나 발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력사책들에 발해관계자료를 거의나 기록하지 않았던것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이 그들의 머리속에 지배하고있었기때문이다.

 

최치원이 924년(신라 경명왕 8년)에 지은것으로 알려져있는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문》에는 《그전날의 자그마한 세개의 나라가 오늘날은 하나의 큰 나라로 되였다.》라는 내용의 글이 씌여있다. 이 자료에서 세개의 나라라고 한것은 더 말할것없이 고구려, 백제, 신라를 념두에 두고 한 말이며 그것들이 하나의 큰 나라로 되였다는것은 세개의 나라가 《통일》되여 《통일신라》시기가 온것처럼 말한것이다. 또한 그는 당나라의 태사 시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방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있었는데 신라의 무렬대왕이 당나라와 련합하여 한때 100만대군을 거느리고있던 강국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그후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곳 사람들이 무사평온한 세월을 보내게 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무렬대왕의 공적에 속하는것이라고 하였다.(《삼국사기》권46 렬전6 최치원)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최치원은 신라가 당나라와 련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림으로써 《삼국통일》이 이룩되고 《통일신라》시기가 계속되여온것으로 인식하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그는 발해와 고구려의 계승관계에 대하여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외면하였고 《신라통일론》과 같은 부당한 리론을 내세웠던것이다.

최치원의 이러한 《신라통일론》은 그 자신이 신라중심주의적립장에서 흘러나온것이지만 력사적연원을 따지고보면 이미 김춘추, 김유신 등 신라통치배들이 들고나온 《삼국통일론》에 기초한것이였다.

신라통치배들은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가 멸망한 사실을 놓고 그것으로써 저들이 《삼국통일》을 이룩한듯이 표방하였다.대동강이북의 넓은 고구려령토는 차지하지 못하고 그 이남지역만 차지하고도 신라가 마치 삼국을 다 《통일》한듯이 주장하는 《신라통일론》은 이렇게 조작되게 되였다.

이처럼 후기신라시기에는 발해가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는것을 인정하면서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에 기초하다보니 발해의 력사적지위를 정확히 해명할수 없었다.

 

ㅡ 후기신라시기 력사가들의 발해관은 고려시기인 12세기이후에도 이어졌다.

 

고려시기 봉건사가들은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생각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배제하였거나 또 선행시기의 자료들을 그대로 옮겨놓음으로써 발해의 고구려계승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나타냈다.

그러한 현상은 고려시기의 대관료였던 김부식의 발해관에서 찾아볼수 있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력사를 서술하면서 후기신라의 력사까지 포함시켰지만 후기신라와 같은 시기에 존재한 발해에 대해서는 겨우 3건의 기사만이 기록되여있을뿐이다. 그중의 하나가 최치원이 당나라의 태사 시중에게 보낸 편지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을 책임진 김부식은 고구려의 남은 자손들에 의하여 발해가 세워졌다고 쓴 최치원의 편지내용을 보았을것이다.하지만 그는 서경인민들의 투쟁을 진압한 후에 인민들속에서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국가를 세우려는 지향을 막기 위해 후기신라의 력사만을 서술하여 《신라통일》을 강조하고 동시대에 존재한 발해의 력사를 배격하였다.

 

《신라통일론》을 내세우면서 우리 민족의 당당한 주권국가였던 발해를 조선력사에서 배제한 김부식의 발해에 대한 관점과 립장은 13세기 고려의 력사가들에게 영향을 미치였다.

13세기말에 중 일연(김견명)은 자기가 편찬한 《삼국유사》에서 삼국시기와 발해,후기신라시기의 력사를 서술하였으며 특히 《말갈발해》라는 항목을 독자적으로 설정하고 발해와 관련한 자료를 서술하였다.그가 틀리게 쓰기는 하였으나 《말갈발해》라는 편명을 설정한것은 발해사에 대한 관점과 립장에서 전진한것으로 보아진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말갈발해》편에서 《신라고기》의 자료와 함께 《<삼국사〉에 이르기를 의봉 3년에 고구려의 〈잔얼〉(남은 자손)들이 한데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밑을 의지삼아 나라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라고 서술하고 마감부분에 《이상의 여러가지 글을 참고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이다.》라는 자기의 견해를 덧붙여놓았다.(《삼국유사》권1 기이2 말갈발해)

 

《신라고기》는 후기신라시기에 편찬된 책이며 《삼국사》(구《삼국사》)는 고려초기에 편찬된 책이다.이 책들에는 명백히 발해가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라고 서술되여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일연은 김부식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설로 굳어진 《신라통일론》에 근거하여 《삼국사기》보다 앞선 책들인 《삼국사》(구《삼국사》)나 《신라고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발해를 고구려의 후손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라는것을 알고있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하고 발해를 《말갈의 별종》이라고 강조하였다.이것은 저자 자신이 발해의 고구려계승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지 못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13세기말에 리승휴가 편찬한 《제왕운기》에는 발해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해놓고 발해의 1대왕 대조영이 고구려의 옛 장수였으며 또 발해의 멸망을 전후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서로 이끌면서 고려에로 이주해온 사실이 서술되여있다.(《제왕운기》하)

 

이것은 리승휴가 발해를 고구려의 후손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이며 더 나아가서 고구려와 발해가 고려에로 이어져온 사실에 대하여 확고히 인식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책의 신라편에서는 신라의 김춘추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였는데 김유신의 《공로》가 컸다고 서술함으로써 발해를 우리 민족사밖의 력사로 되게 하였다.이것은 리승휴가 12세기이래로부터 답습되던 《신라통일론》을 그대로 인정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이처럼 고려시기에는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과 같이 당시의 고려인민들속에서 고조되여가던 고구려를 계승한 강대한 고려를 건설하려는 인민들의 지향을 짓누르려는 목적에서 발해를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신라통일론》을 력사책들에 고착시킴으로써 발해의 력사를 말살하는 관점과 립장에 선 력사가들이 있었다. 한편 《제왕운기》의 편찬자와 같이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성을 인식하면서도 《삼국사기》의 영향으로 《신라통일론》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발해의 력사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관점과 립장을 가진 력사가들도 있었는것을 알수 있다.

이처럼 12~13세기까지 고려사람들의 발해관에 대한 력사적연원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그러나 12세기이전의 고려사람들은 발해를 동족의 나라로 우리 민족의 국가로 인정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938년 고려를 방문한 인디아의 승려 말라에게《발해는 본래 우리와 친척의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였으니 내가 공격하여 빼앗으려고 한다.》(《동사강목》권6 상)라고 말하였으며 발해가 망한 후 왕세자 대광현이 고려에 들어왔을 때에는 왕계라는 이름까지 주고 고려왕족에 소속시켰다.

 

만일 고려 태조가 발해를 동족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구태여 포로된 발해왕을 위하여 고려군사를 파견하겠다고 하지 않았을것이며 더우기 발해왕세자에게 고려왕실의 성씨도 주지 않았을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이러한 인식은 그에게만 국한된것이 아니였다.그것은 당시 고려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와 관점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1145년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에 의해 외곡되게 되면서부터 발해의 력사가 우리 민족의 력사권밖의 력사로 취급되게 되였다.

우에서 본바와 같이 발해관에 대한 력사적연원을 종합해보면 한마디로 말하여 후기신라와 고려의 력사가들은 발해가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라는것을 인정하면서도 발해의 력사를 배제하는 관점과 립장에 서있었다는것이다.

발해에 대한 그들의 견해의 부당성은 첫째로,《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과 같이 신라만을 인정하면서 발해를 우리 나라 력사에서 완전히 배제한것이고 둘째로,《제왕운기》의 편찬자 리승휴처럼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것을 륜적으로 인식하고있었지만 후기신라와의 관계속에서 발해가 차지하는 력사적지위를 포착하지 못한것이다.

이렇듯 발해의 력사적지위는 12세기 중엽이후 완전히 배제당하거나 편찬자들자체의 인식상부족으로 해명될수 없었다.

온 겨레는 봉건사가들에 의하여 외곡되였던 조선력사를 주체적립장에서 연구분석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더욱 빛내여나가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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