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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지리지》에 반영된 실학자 한백겸의
삼한에 대한 견해분석 

2017-04-20   김일성종합대학 최연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선행학설들은 진보적인것이라 하더라도 계급적 및 시대적제한성을 가지고있기때문에 그것을 통채로 삼키지 말고 비판적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17세기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서는 실학자들에 의하여 여러 학문연구에서 성과들이 이룩되였다. 실학자들이 쓴 책들은 당시의 력사적사실과 함께 력사연구에서 이룩된 성과들에 대하여 알수 있게 하는 문화유산들이다.

이 글에서는 실학자의 한사람인 한백겸의 저서 《동국지리지》를 통하여 잘못된 삼한-삼국설을 바로 해명함으로써 삼한문제만이 아니라 고구려의 령역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밝히려고 한다.

《동국지리지》는 고조선부터 고려시기까지의 력사와 지리를 서술한 력사지리책으로서 실학자의 한사람이며 이름난 력사학자였던 한백겸에 의하여 1615년에 편찬되였고 1640년에 출판되였다.

한백겸은 임진조국전쟁이후 우리 나라 력사연구에서 새로운 학풍을 일으킨 개척자의 한사람이며 그의 저서 《동국지리지》는 당시 력사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한백겸이 《동국지리지》를 쓰게 된 동기는 오운이 쓴 《동사찬요》에서 일정한 오유를 발견하였기때문이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17세기이전의 많은 력사책들이 해당 시대의 력사지리변천을 정확히 밝히려고 노력하지 않고 종래의 사실들을 그냥 답습한데 대하여 비판적으로 대하면서 그것을 새롭게 고증하려고 하였다.

삼한은 원래 우리 나라 고대시기에 존재한 진국의 삼한을 가리킨다. 그러나 중세시기에는 삼한과 삼국을 서로 대칭시키면서 삼한-삼국설이 지배적인 정설로 되여왔다. 그러므로 삼한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삼한의 위치에 관한 문제로 그치는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령역문제까지도 포괄하고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삼한-삼국설은 후기신라의 봉건관료이며 문인이였던 최치원에 의하여 처음으로 제기되였다.

 

 최치원은 당나라의 태사시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듣건대 동방에 세 나라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였다.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이며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면서 삼한과 삼국을 서로 련관시켜보았다.(《삼국사기》권46 렬전6 최치원)

 

최치원의 삼국-삼한설은 그가 우리 나라의 력사에 대하여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바로 최치원의 잘못으로 시작된 삼한-삼국설은 그후 아무런 검토와 과학적근거도 없이 여러 책들에 하나의 정설로 굳어져 그대로 전해져내려왔다.

 

 고려중엽의 력사책인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이며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한 최치원의 설을 인용한 다음 자기 말로 《이 여러 설들이 가히 근사하다고 할수 있다.》라고 하였다.(《삼국사기》권34 잡지3 지리)  《삼국사기》에 이어 《삼국유사》에서도 저자인 일연은 최치원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쓰고 몇가지를 더 첨가하였다. 그는 《삼국유사》의 마한조, 변한 백제조 등에서 최치원의 글을 인용하면서 《지금 사람들이 혹 옛 기록에 백제가 금마산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글이 있는것을 보고 마한을 백제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고구려땅(평양)에는 원래 마읍산이라는 산이 있기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하는것이다.》(《삼국유사》권1 기이2 마한)라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구룡산(평양 대성산)의 별명이 변나산이라고도 하기때문에 고구려를 변한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도 역시 잘못이다. 마땅히 옛날 현자의 말이 옳다고 해야 할것이다. 백제의 땅에는 원래 별산이 있었으므로 변한이라고 한것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권1 기이2 변한 백제)

 

일연의 이 견해는 최치원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력사적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것이며 《삼국유사》에 인용한 사람들의 견해도 비과학적인것이였다.

고려 말엽의 봉건관료인 김경숙은 《주관륙익》(14세기 후반기)에서 삼한에 대하여 쓰면서 변한이 고구려, 마한이 백제라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삼국에 대하여 쓸 때에는 고구려는 마한이고 백제는 변한이라는 종래의 주장을 그냥 답습함으로써 모순되는 결함을 드러냈다.

삼한-삼국설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계속 존재하였다.

그것은 15세기초에 편찬된 《동국사략》에서 삼한-삼국설을 주장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 서거정은 《동국여지승람》(1481년)을 쓸 때 《동국사략》의 주장을 부정하였다. 그는 《삼한에 관한 설이야 옛날 신라말기의 현자인 최치원의 정설이 있을뿐아니라 그것은 이미 삼국초부터 그렇게 되였던것이기때문에 고려의 김부식이 〈삼국사기〉 지리지를 편찬할 때에도 그 설을 따른것이다. 그런데 고려 중엽이래 잘못된 새로운 설이 점차 대두하여 마한은 백제이고 변한은 고구려이라고 하게 되였다. 그런데 원래 잘못된 이 새로운 설은 어떤 권위있는 사람이 시작했다는것도 없는데 김경숙이 이것으로 하여 혼란을 일으켰고 지어 근세의 큰 학자라고 하는 권근까지 이 설에 매혹되였으니 정말 모를 일이다.》라고 하면서 다시 최치원의 설을 따라 변한은 백제, 마한은 고구려이라고 결론지었다.

 

서거정은 고구려의 동명왕이 락랑(이 견해는 잘못된것이다.-필자)땅에서 나라를 세우고 마한 동북부의 땅을 다 가지게 되였기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하는것이고 변한은 마한의 남쪽 즉 전라도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이렇게 생각하는것은 곧 마한은 원래 54개의 소국들을 가지고있었고 변한, 진한(경상도)은 각각 12개의 소국을 가진데 지나지 않았다는 옛 기록과도 잘 부합되는것이라고 단정하였다.(《동국여지승람》권6 경기)

그가 삼한의 위치와 고구려의 령역을 나름대로 한정시킨것도 잘못이지만 특히 고구려의 동명왕이 락랑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그 자체도 력사적사실과 맞지 않는 견해이다.

동명왕이 나라를 건국할 당시 지역으로 말하면 압록강이남이 아니라 압록강이북의 옛 구려일대였다.

비록 서거정이 《동국여지승람》에서 최치원의 설의 과학성을 론증하느라고 하였지만 그것 역시 력사적사실과 부합되지도 않았으며 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한 리유자체도 납득되지 않는다.

최치원으로부터 시작된 삼한-삼국설은 아무런 과학적근거도 없고 구체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매우 비과학적인 설이다.

한백겸은 최치원의 삼한-삼국설에 대하여 비판하였을뿐아니라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권근이 《동국사략》(15세기초)을 쓰면서 마한은 백제, 변한은 고구려이라는 새로운 설을 주장한데 대하여서도 비판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삼한에 대한 문제를 정확히 해명하였다.

앞에서 서술한 삼한-삼국설을 그대로 따른다면 고구려의 령역은 마한지역으로 한정되고 나아가서 고구려의 령토가 압록강이남지역을 벗어나지 못한것으로 되고만다.

이미 연구된바와 같이 고구려는 마한지역정도가 아니라 압록강이남은 물론 압록강을 넘어 료동지역의 넓은 령토를 차지한 강대국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한이 고구려였다는 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조선봉건왕조시기까지 이어졌으므로 실학자인 한백겸으로서는 용납할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그러므로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신라이래 하나의 정설로 굳어져내려온 삼한-삼국설을 비판하고 정확한 해명을 하였던것이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삼한은 조선의 남쪽지역에 있었는데 그가운데서 마한은 후날의 백제, 진한은 후날의 신라, 변한은 후날의 가야국이 되였고 고구려는 원래부터 이 삼한과 령역상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 밝혔다.

한백겸은 우선 삼한의 지리적위치를 통하여 심한-삼국설의 비과학성을 까밝혀놓았다.

 

※ 한백겸은 《후한서》한전과 우리 나라의 여러 기록들을 참고하여보면서 삼한과 고구려가 령역상 전혀 련관이 없다는것을 밝혔다. 그는 《동국지리지》에서 《고조선은 북쪽에 있었고 고조선이 망한 다음에 그 령역은 고구려가 통합하였다. 고조선의 남쪽은 삼한땅이였다. 그리고 옛 기록에는 마한은 서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변한은 남쪽에 있다고 명백히 적혀있다. 그런데 그가운데서 서쪽에 있는 마한땅에서는 후에 백제가 일어나서 결국 마한을 멸망시키였고 동쪽에 있다는 진한의 6부에서 신라가 일어나서 후에 그 전부를 통합하였으며 나머지 남쪽에 있다는 변한은 결국 어디로 되겠는가. 변한에 대해서는 옛 문헌들에 …신라 유리왕 19년〈A.D.42년〉에 수로왕이 가락에서 나라를 세워 진한의 남쪽령역을 차지하고 또 그밑으로 5형제가 서로 린접하여 각기 나라들을 세웠다가 훨씬 후에 다 신라에 통합되였으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바로 변한이다. 삼한땅의 북쪽한계는 똑똑히는 알수 없으나 한강일대이상으로는 넘어서지 못하였을것이다.》라고 하였다.(《동국지리지》고대조선)

 

이 자료는 삼한의 땅이 한강이남지역이였으며 마한지역에서 백제가, 진한지역에서 신라가, 변한지역에서 가야가 세워졌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결국 한백겸은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의 령역이 북쪽이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놓았다.

한백겸은 또한 고구려가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은 사실을 통하여 삼한-삼국설의 부당성을 까밝혀놓았다.

 

※ 한백겸은 《고조선이 북쪽에 있었고 후에 그것이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 망한 다음에 현도군의 속현의 하나인 고구려현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고조선땅을 회복하였는데 이때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령역이 삼한땅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것은 〈한서〉, 〈후한서〉등 옛 기록들에 명백하다. 이것들의 령역이 과연 마한이나 변한 땅과 무슨 인연이 있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삼한이 고구려와 령역상 전혀 인연이 없다는것을 명백히 하였다. (《동국지리지》고대조선)

 

물론 한백겸은 대국주의사가들이 써놓은 《한서》,《후한서》의 외곡된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다보니 일부 잘못된 리해를 가지고있었지만 그속에서도 고구려의 땅이 남쪽의 삼한과 인연이 없는 북쪽지역이였다는것을 증명하였다.

한백겸이 리용한 《고조선이 북쪽에 있었고 후에 그것이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 망한 다음에 현도군의 속현의 하나인 고구려현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고조선땅을 회복하였다.》라는 자료는 력사적사실과 맞지 않는 외곡된 자료이다.

 

※ 한무제는 고조선이 무너진 다음 고구려사람들속에서 그 지역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 세차게 벌어지자 어떻게 해서라도 현도군을 고구려땅에 두려고 망상하면서 현도군의 군현(군소재지)을 고구려현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한나라통치배들이 고구려지역까지도 다 차지한것으로 꾸미기 위해서였다.

 

《후한서》의 편찬자 범엽은 한무제의 동방침략이후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소속시켰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고구려에 5부5족이 있었는데 왕이 있으며 자체의 고유한 통치기구가 있었고 고구려가 옥저, 동예를 다 복속시켰다고 쓴것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말이다. 후세사가들은 범엽의 말을 아무런 의심도, 분석도 없이 그대로 믿고 현도군의 령역을 터무니없이 넓게 잡는 착오까지 범하게 되였다.

 

그러나 력사적사실을 보면 고구려는 한나라침략군이 고구려의 서북변방에까지 침범하기때문에 즉시 현도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였으며 얼마 안되여 현도군은 무순지방으로 쫓겨나게 되였다.

물론 한백겸은 고구려현에 대한 정확한 해명이 없이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기는 하였지만 고구려의 령역이 마한지역이 아니라 료동일대의 넓은 지역이였다는것을 명백히 밝히였다.

그러나 한백겸의 견해는 일정한 제한성도 가지고있다.

그것은 우에서 본 고구려현문제를 비롯한 여러가지 문제들에 정확한 해명을 주지 못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그러므로 실학자들이 내놓은 견해들에 대하여 주체적립장과 력사주의원칙에서 정확히 분석평가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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