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고려시기 노비세전법과 그 반동적본질​

2017-03-23   김일성종합대학 강명석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원래 나쁜 사람의 종자가 있는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좋고 나쁜 종자가 있다는것은 지난날 지배계급들이 꾸며낸 거짓말입니다.》

 

※ 다른 봉건사회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봉건통치배들도 사람에게 좋고 나쁜 종자가 있는듯이 꾸며대면서 노비세전법을 조작해내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갖은 책동을 다하였다.

 

이 글에서는 노비들에게 대대로 노비신분의 처지에서 벗어날수 없도록 고려의 통치배들이 만들어낸 노비세전법의 반동적본질을 밝혀냄으로써 고려시기 노비제도의 일면을 해부하게 된다.

노비세전법은 봉건국가가 노비상전들로 하여금 자기 노비들의 자식들까지도 몇대를 내려가면서 얽매여놓고 계속 억압착취할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여러가지 규범들과 규정들을 말한다.

 

 고려시기에 노비세전법이 법적으로 규범화된 시기는 대체로 11세기 초 이후부터였다고 인정된다. 그것은 《고려사》권85 지 제39 형법2 노비조의 기사를 통하여 알수 있다. 그 기사에는 《천인은 어머니켠을 따른다.》라고 되여있다. 그리고 경호왕(충렬왕)26년 10월에는 《천인의 부류에 속하는자는 그의 부모중에서 어느 한켠이 천인이면 곧 천인으로 된다.》라고 규정되여있다.(《고려사》권31 세가31 경호왕(충렬왕)4) 고려시기 노비세전법은 그 내용으로 보아 신분세전과 소속세전 두 측면으로 나누어볼수 있는데 노비들사이의 결혼과 신분이 다른 사람들사이의 결혼에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천자수모》(천한자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른다는 뜻)와 《일천즉천》(부모가운데서 어느 한켠이 노비이면 그 자식들이 노비로 된다는 뜻)의 원칙이 적용되였다. 노비세전법의 이러한 원칙은 1039년에 고려에서 적용된 이래 거의 전기간 유지되였을뿐아니라 그 이후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그대로 실시되였다.

 

무엇보다도 노비세전법에 어떠한 규정들이 있었는가에 대하여 보면 잘 알수 있다.

노비세전법에는 우선 노비는 무조건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고 규정되여있었다.

봉건통치배들은 조상전래의 옛 풍속에 따라 남자가 녀자집에 가고 자손은 외가집에서 자라기때문에 어머니가 노비이면 모두 노비로 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허황하기 그지없는 견해이다.

 

※ 노비세전법이 얼마나 허황한가 하는것은 우리 나라 노비제도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고 그 페단을 일정하게 비판한 실학자 류형원이 《천한자가 어머니 신분을 따르는 법은 고려 정종때부터 시작되였는데 어머니를 알고 아버지를 모르는것은 날짐승이나 길짐승의 도리인것이다. 이는 사람으로서 날짐승이나 길짐승으로 자처하는것이니 어찌 법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 법이 처음 생겨나오게 된것을 생각한다면 나라의 풍속으로 천인을 부리는데 있어서 흔히 꼼짝 못하도록 억압을 가하는데 마소나 닭, 개와 다름이 없었던것이다.》라고 실토한데서도 잘 알수 있다. (《반계수록》권26 속편 하 노예)

 

이처럼 고려시기 봉건통치배들은 노비는 무조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하게 함으로써 더 많은 노비를 확보하려고 하였던것이다.

노비세전법에는 또한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노비면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여야 한다고 규정되여있다.

원래 봉건적신분관계가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였던 우리 나라 봉건사회에서 노비들은 원칙적으로 그들사이에서만 결혼하게 되여있었다.

그러나 고려시기에 노비들이 량인신분의 사람들과 결혼하는것이 점차 많아지게 되였으며 이것은 그 어떤 법적규범과 통제로써도 막을수 없는 사회적현상으로 되였다. 고려시기 봉건통치배들은 이것을 통제하기 위하여 량인과 노비사이의 결혼을 금지시킨 법규정을 제정하였다.

 

※ 당시 노비의 결혼관계는 노비와 노비사이의 결혼, 노비와 량인신분을 가진 사람과의 결혼, 노비와 량반사이의 결혼관계로 구분해볼수 있다. 노비와 노비사이의 결혼도 상전을 같이하는 남자노비와 녀자노비사이의 결혼, 상전을 달리하는 남자노비와 녀자노비사이의 결혼, 관청남자노비와 개인녀자노비사이의 결혼, 개인남자노비와 관청녀자노비사이의 결혼으로 구분할수 있다. 노비와 량인사이의 결혼도 관청남자노비와 량인녀자사이의 결혼, 관청녀자노비와 량인남자사이의 결혼, 개인남자노비와 량인녀자사이의 결혼, 개인녀자노비와 량인남자사이의 결혼으로 구분할수 있다.

 

고려봉건통치배들은 이처럼 복잡한 노비들의 결혼관계를 무시하고 모든 경우에 《일천즉천》의 원칙을 적용하였다.

고려시기 노비의 복잡한 결혼관계가 어떻게 구체화되였는지는 잘 알수 없으나 노비와 노비사이에 난 자식은 두말할것없고 노비와 량인사이에 난 자식들도 《일천즉천》의 원칙이 적용되였다고 인정된다.

 

※ 《일천즉천》과 《천자수모》의 원칙이 노비는 물론 노비와 량인사이의 자식도 다같이 적용되였는데 그가운데서도 《천자수모》의 원칙이 더 중요시되였다. 왜냐하면 봉건통치배들이 녀자노비들을 사람으로가 아니라 한갖 인적재산을 불구어주는 수단으로, 도구로 여겼기때문이였다.

 

노비세전법으로 하여 노비의 수는 계속 늘어나게 되였으며 노비의 자식들은 대를 두고 노비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비참한 운명을 강요당하였던것이다.

 

다음으로 노비세전법의 반동적본질에 대하여 보면 잘 알수 있다.

노비세전법은 봉건국가가 노비상전들로 하여금 자기 노비들의 자식들까지도 몇대를 내려가면서 얽매여놓고 계속 억압착취할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반동적인 법이다.

노비세전법은 우선 노비들에게 계속 노비신분을 강요함으로써 그들이 노비신분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원래 노비들이 자기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것은 고려에서 시작된것이 아니였다.

 

※ 노비세전법은 우리 나라에서 고조선때부터 실시되여온 악법이였다. 후세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1480년 8원 사헌부 대사헌 정괄 등은 봉건국가에 낸 글에서 노비의 자녀들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신분과 소속을 그대로 이어받게 하고 그들에게 봉건적억압과 착취를 강요하게 한 노비세전법은 우리 나라에서 고조선때부터 시행되여왔다고 하였다.(《성종실록》권120 11년 8원 정사)

 

이러한 사실은 노비세전이 이미 오래전부터 실시되여왔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천인이 자기 어머니에게 속하는 법을 제정하였다.》는 고려시기의 자료는 이 시기에 봉건통치배들이 노비의 혈통과 가계만을 따져 자손들을 몇십대씩 내려가면서 노비로 만들어 억압착취하자는데 있었다.(《고려사》권25 지제39 형법2 노비)

고려시기 노비세전법으로 하여 왕족들과 중앙의 대봉건관료들뿐아니라 왕의 측근인 환관, 지방의 부호, 향리들도 량인농민들의 토지는 물론 일부 국유지까지 차지하고 각지에 수많은 농장을 설치한 후 량인농민 및 노비들의 로동력을 착취하였다.

 

※ 기록에 《권세있는자들이 전장을 널리 설치》하고 《환관의 족속과 권세있는 집들에서 토지가 비옥한 곳에 저마다 농장을 설치》하였다고 한것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고려사》권79 식회지 호구)

 

대토지소유가 확대되는 과정은 량인농민들이 많은 토지를 빼앗기고 파산령락되여 대토지소유자들의 예속노비로 전락되는 과정과 동반됨으로써 대토지소유자들의 수중에 수많은 노비들이 집중되는 현상을 초래하게 하였다.

 

 1391년 10월 랑사가 올린 상소문에서 《노비를 가지는데서 본래 제한이 없고 또 개인의 재산이라고 하여 이러저러한 분쟁이 토지를 다투는 페단보다 더욱 심한바가 없었다.》라고 한것은 당시 노비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잘 알수 있게 한다.(《고려사》권85 지제 형벌2 노비)

고려시기에 봉건통치배들에 의하여 노비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새 왕조를 세운 조선봉건왕조의 관리들까지도 《왕씨왕조로 내려오는 500년동안 임금의 집안과 권세있는 가문들에서 노비를 많이 가지고있었는데 지어는 1 000여명에 달하기까지 하였다.》라고 하면서 노비변정사업을 주장해나선것은 결코 우연한것이 아니였다.(《태조실록》권 1 원년 8월 기사)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시기 봉건통치배들이 노비세전법을 강요하여 노비로 된 사람들이 영원히 노비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악랄하게 책동하였다는것을 그대로 실증해주고있다.

또한 노비들에 대한 가혹한 예속과 착취를 강화하여 저들의 기생충적생활에 필요한 물질적부를 마련하였다.

고려봉건사회에서 노비는 최하층신분으로서 최악의 빈궁과 무권리, 극도의 차별과 멸시, 최대의 학대와 모욕을 받으면서 《말하는 도구》로 살아야 하였다.

 

※ 상전들은 자기 소유의 노비들을 토지와 함께 매매되는 한갖 물건으로, 재산을 늘구어주는 수단으로 간주하였으며 아무때나 노비를 남에게 뢰물로 주었다. 고려시기 사노비들의 매매자료는 봉건통치배들이 노비들을 한갖 물건으로 간주하고있었다는것을 잘 알수 있게 한다.

 

이 시기 봉건통치배들은 사노비를 사거나 팔기도 하였으며 협잡군들은 사노비를 유인하여 돈을 받고 도망치게 하거나 다른자에게 팔아넘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봉건국가는 량반관료들이 사노비를 유인하여 도망치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판 자를 처음에는 온 가족을 고향으로 추방하며 다시 그런짓을 하였을 때에는 평민으로 만든다는 처벌규정까지 제정하였으나 그것은 한갖 기만에 불과한것이였다.

 

 당시 노비는 소나 말보다 눅게 매매되였는데 그것은 《노비가 아무리 천하다 하여도 역시 사람인데 보통재물과 같이 쳐서 공공연히 사고 팔며 혹은 마소와 교환하는데 말 한필에 두세명씩 주고도 모자라니 이는 마소를 사람의 생명보다 중하게 여기는것으로 된다.》라는 자료를 통하여 잘 알수 있다.(《고려사》권85 지제3 형법2 노비)

 

기록에서 보는것처럼 봉건통치배들은 노비의 가격을 말이나 소보다 눅게 정하였는데 특히 말 한필값이 2~3명의 노비값보다 더 비쌌다는것은 노비를 얼마나 천대하였는가 하는것을 가늠하게 해준다.

또한 노비제도를 반대하여나서는 노비들을 마음대로 처형함으로써 저들의 계급적지배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노비들을 제 마음대로 처형하였다는것은 봉건통치배들이 소유하고있던 사노비들의 처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량반상전들은 시중드는 사노비들이 조금이라도 잘못하거나 비위에 거슬리게 행동하면 마구 욕하고 때리군 하였으며 지어 달군 쇠꼬챙이로 온몸을 지지고 얼굴에 락인을 새기는 등 무서운 악형을 들씌웠다.

 

 도망치려던 노비에 대하여 1039년 기사에서는 《공사노비로서 세번 도망한자는 얼굴에 먹물을 새겨 주인에게 돌려준다.》라고 하였다.(《고려사》권85, 지제39 형법2, 노비 문종3년) 또한 1136년 기사에서는 《공사노비가 주인을 배반하고 원한이 있어 자신이 목매여 죽었을 경우에는 그 죄를 주인에게 묻지 않는다.》라고 되여있다.(《고려사》권85, 지제39 형법2, 노비 인종 14년)

 

이러한 사실만 놓고서도 당시 사노비들은 량반상전들의 가혹한 형벌의 대상으로 되여있었으며 그들은 상전들에 의해서 억울한 죽음을 때없이 당하여야 하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이처럼 노비세전법은 봉건통치배들이 노비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강화하고 영원히 노비신분에서 벗어날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조작해낸 악법이였으며 이러한 악법으로 하여 노비들은 인간이하의 착취와 무권리속에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