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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기 농업발전의 특징​

2017-04-11   김일성종합대학 김 옥

고구려시기 농업발전에 대하여 깊이있게 연구하는것은 세나라시기 우리 나라의 력사가 고구려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는 력사적사실을 과학적으로 론증하며 당시 농업발전수준을 통하여 우리 인민들이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도록 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적사실은 삼국시기 우리 나라의 력사는 신라를 중심으로 발전하여온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중심으로 발전하여왔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고구려의 농업발전은 일련의 특징을 가지고있었다.

 

고구려시기의 농업발전의 특징은 첫째로, 령토를 넓히고 부침땅면적을 늘이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과정에 농경지가 보다 확대된데 있다.

고구려는 B.C. 3세기 후반기~A.D. 74년사이에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량맥, 구다, 락랑, 동옥저, 조나, 주나 등 소국들을 병합하여 령토를 확장하였다.

 

고구려의 경계는 1세기 중엽에 동쪽은 조선동해에, 남쪽은 압록강이남지역에 이르렀으며 1세기 말에는 령토가 더 확장되였다. 98년이후 국왕이 자주 동북지방의 정치중심의 하나였던 책성지방을 순시한것을 보면 동쪽경계는 오늘의 훈춘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해주지방에까지 이르렀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서쪽경계는 태자하상류지방에 이르렀다. 그후에도 고구려의 령토확장은 계속되였다.

 

고구려인민들은 확장된 령토에서 부침땅면적을 늘이기 위한 창조적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부침땅면적을 늘이는것은 농업생산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근본조건의 하나이다.

근면한 고구려인민들은 령토가 넓어져 농업생산에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이 마련됨에 따라 철제생산도구를 가지고 황무지를 일구어 새로 부침땅면적을 늘이기 위한 창조적투쟁을 힘있게 벌리였다.

 

당시 강하천류역을 비롯하여 들판과 야산의 산림지대들에는 약간의 노력을 들이면 일구기 쉽고 부치기 좋은 비경지가 많았다. 4세기 말 이후 앞선 농사법이 보급되여 경사지대의 건조한 땅과 낮은 지대의 습한 땅에 심어가꾸는 여러가지 곡식들이 알려지고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조선반도중부일대에서 벼재배가 성행하게 됨에 따라 부침땅을 일구는 사업은 더욱 활발히 벌어져 그 면적이 부쩍 늘어나게 되였다.

 

고구려시기 농업발전의 특징은 둘째로, 쇠농기구가 다양하게 그리고 구색을 갖추고 폭넓게 발전한데 있다.

농업은 토지를 기본생산수단으로 하여 농작물의 생태적특성에 맞게 심고 가꾸어내는 생물학적과정이지만 개량되고 발전한 생산도구의 리용은 갈이와 씨붙임, 작물가꾸기에서 로동생산성을 높여주고 더 많은 수확을 거둘수 있게 하였다.

고구려인민들은 농사일에서 농쟁기를 개량하는것이 소출을 높이는 중요한 방도라는것을 알고 여기에 관심을 돌리였다.

고구려말기에 쇠농기구의 거의 대부분이 제작되여 생산에 널리 쓰이였을뿐아니라 같은 종류의 농기구인 경우에도 크기와 모양을 달리하여 여러가지 농산작업에 편리하게 하였다. 그러한 농기구로서는 쇠보습과 가래, 낫, 등을 들수 있다.

고구려의 쇠보습에는 큰것과 작은것이 있었다. 큰 보습은 논밭을 가는데 쓰인 성능이 좋은 농기구였으며 작은 보습은 후치틀에 끼워 고랑을 째고 알곡작물의 밑그루를 흙으로 덮어주는데 리용되였다.

 

고구려유적에서 드러난 삽이나 가래는 모두 쇠로 만든 후세의것과 달리 날부분만 쇠로 만든것이 특징이다. 삽날은 좁으며 큰 가래는 날의 너비가 16.5㎝, 높이가 12㎝정도이다.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에서 드러난 가래는 논밭을 고루며 뚝을 짓고 물도랑을 째는 등의 농산작업에 쓰이던 능률적인 농기구였다.

 

낫도 크고작은 두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길고 안쪽에 만곡부가 없는것은 연한 알곡그루를 베는데, 폭이 넓고 만곡부가 있는것은 굳은 알곡그루를 베는데 적합하였다. 낫이 두가지였다는것은 여러가지 종류의 알곡그루를 베는데 필요한 수확농기구가 모두 갖추어졌다는것을 말해준다.

 

고구려시기 농업발전의 특징은 셋째로, 인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육종사업이 발전한데 있다.

고구려에서는 주요알곡작물이 어느 한 지역에 편중하여 재배되지 않고 전국적으로 널리 재배되였다.

고구려에서 벼와 콩, 조는 따뜻한 지역에서뿐아니라 비교적 추운 지방에서도 널리 재배되였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육종법이 발전하여 추위에 견디는 힘과 바람에 견디는 힘이 센것 등 여러가지 알곡작물종자를 얻어냈다는것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상서로운 벼이삭》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인민들이 품종을 개량하는 과정에 소출이 높은 벼의 새 품종을 얻어낸것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벼만 보아도 기후가 따뜻한 곳에서 심는 품종과 추운 곳에서 심는 품종이 서로 달랐다.

고구려인민들은 농사경험을 부단히 익혀나가는 과정에 절기에 맞추어 씨를 뿌리고 가꾸었을뿐아니라 해당 지역의 기후풍토에 맞는 곡식의 품종을 선택하고 건조한 땅에는 주로 조와 기장을, 습한 땅에는 수수와 콩과 같은 곡식을 심었다.

고구려에서 주요작물인 벼, 콩, 조 등이 모든 지방에서 널리 재배되였다는것은 육종사업의 발전을 떠나서 생각할수 없다.

 

고구려시기 농업발전의 특징은 넷째로, 알곡작물과 과일, 남새재배, 집짐승기르기 등 농업에서 기본을 이루는 여러 부문들이 모두 발전한데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오곡이라는 표현이 여러곳에 있다. 광개토왕릉비에도 오곡이라는 표현이 있다. 특히 고구려에서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발전하였다. 548년에 압록강북쪽에 위치한 환도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는것으로 보아 이 지방에서 추위에 견디는 우량종벼가 적지 않게 재배되였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리고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벽화무덤의 묘지명에 무덤을 만드는데 수만공수가 들었으며 날마다 소와 양을 잡고 흰쌀밥이 너무 많아 다 먹을수 없었다고 한것도 벼재배와 관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이다.

 

고구려에서는 콩, 조, 보리도 많이 재배하였다.

 

덕흥리벽화무덤에 씌여있는 글에 《…장을 담그어먹었는데 한창고분이나 먹었다.》라고 한 사실, 645년에 당나라침략군이 안시성에 쳐들어왔을 때 고구려군이 성안에 군량으로 조를 저장한 사실, 《삼국사기》권17 고구려본기 서천왕 3년(272년) 4월조에 《서리가 내려 밀을 상하게 하였다.》라고 한 사실들은 당시 고구려의 농업발전수준을 잘 보여주고있다.

 

외적의 침입을 자주 받은 고구려인민들이 여러 요새들을 굳건히 지키고 적들을 물리칠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의 하나가 충분한 군량저축에 있었다.

고구려의 농업에서 과일나무와 남새재배, 집짐승기르기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복숭아와 추리에 관한 문헌기록으로서는 이른 겨울에 꽃이 핀 이상현상과 평양지방의 귀틀무덤에서 껴묻거리와 함께 복숭아씨가 나온것을 보고 알수 있다.

《삼국사기》 권19 양원왕 2년 2월조에 《수도의 배나무가지가 서로 어울려붙은것이 있었다.》라고 한것을 보면 고구려에서도 배재배가 널리 보급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평양지방에서 밤이 많이 재배되였다는것은 대성산 안악궁앞 청호동으로부터 휴암동에 건너놓은 고구려 평양주교의 재목이 밤나무이며 평양부근의 락랑유적에서 드러난 귀틀나무곽무덤의 재료가 밤나무라는 사실을 놓고서도 잘 알수 있었다.

고구려시기 재배된 남새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전해지고있는것은 부루에 대한 기록이다.

 

《해동역사》 권26 물산지 채류에 인용된 《천록지여》에는 《수나라사람들이 그 채종을 얻기 위하여 후하게 값을 물었다. 때문에 천금채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부루이다.》라고 씌여져있다. 이처럼 고구려의 이름난 부루는 이웃나라에까지 퍼졌다.

 

고구려에서 기른 집짐승은 말, 소, 돼지, 개, 양, 닭 등이다. 그가운데서 가장 많이 기른 집짐승은 말이였다.

고구려의 《과하마》는 몸체가 좀 작지만 힘이 세고 날래여 짐마나 군마로 널리 사용되였다.

 

※ 고국원왕릉(안악3호무덤)과 춤무덤을 비롯한 벽화무덤들의 행렬도나 수렵도에서 보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말을 탄 장면, 세칸무덤의 개마무사들의 그림과 덕흥리무덤의 말타고 활쏘기경기를 하는 장면 등은 고구려에서 말기르기가 매우 성행하였던 사실을 반영하고있다.

 

고구려의 말종자는 매우 좋았다. 특히 《신마》라고 불리운 이름난 말에 관한 대목이 대무신왕조에서 나오는데 《신마》가 없어졌다가 부여말 100마리를 끌고 돌아왔다는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소와 돼지기르기도 널리 보급되였다.

고구려에서는 제사에 쓸 돼지를 기르는 관청이 있었고 장생이라고 하는 관리들이 배치되여있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농업은 높은 수준에서 발전하였으며 동족의 나라들과 후세봉건국가들의 농업생산에 많은 영향을 주고 그 발전을 촉진시킬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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