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산성, 안학궁성의 건설과 그 력사적의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유적과 유물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민족의 재보이며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발전된 문화를 전해주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은 국내성으로부터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427년부터 586년사이에 고구려의 력사와 발전된 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지난 시기 학계에서는 발굴자료에 토대하여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의 구조와 규모, 방위력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많은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것은 5세기초 고구려수도의 우수한 면모를 해명하는데서 큰 성과로 되였다.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를 연구하는데서는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의 건설과정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수도방어성과 왕궁성의 건설이 당시 고구려의 도시형성과 성곽건축의 표본이였기때문이다.

△ 먼저 대성산성과 안학궁성건설의 위치선정과 설계, 로력조직, 건설순차의 측면에서 살펴보겠다.

ㅡ 위치선정

당시 고구려사람들은 평양의 수도위치를 정하는데서 봉건적인 통치와 왕실의 안전에 유리한 조건을 중시하였다.

우선 단군조선의 수도성이였던 청암동토성주변에 도시를 형성하고 방어용산성과 왕궁을 배치하여 첫 고대국가였던 고조선과의 계승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평양(대성산주변)에 수도를 옮긴 사실을 전하면서 《평양은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다.》라고 강조한 사실과도 통한다.(《삼국사기》권 제17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

 

그러나 환인과 집안의 수도들은 고대 구려국시대의 옛 도시들이였으므로 지역적인 국가라는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수도의 위치선정에서는 또한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이 주민지대에서 올려다보이고 도시의 시작점, 기준점으로 정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하게 하였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을 도성구역의 북쪽 제일 높은 곳에 배치하고 그밑에 도시를 형성하였으며 왕궁의 정문에서 시작되는 도로를 중심축으로 하여 전반적인 도시가 전개되였다.

환인과 집안의 왕궁은 강기슭에 있었으므로 주민지구에서 내려다보이고 수도의 시작점으로도 될수 없었다.

수도의 위치선정에서는 또한 강기슭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곳에 왕궁성과 산성을 밀집시켜 배치하여 왕실의 안전을 최대한으로 보장할수 있게 하였다.

 

대동강을 넘어 외적이 침입하여도 인차 안학궁성에 접근할수 없고 대성산성의 방어이자 곧 안학궁성의 방어로 되게 하였다. 그리고 급한 정황이 조성되였을 때에는 왕실이 견고한 산성으로 빨리 들어갈수 있었다.

환인과 집안의 왕궁은 산성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하였으므로 왕이 유사시 산성으로 들어가자면 복잡한 주민지구를 통과하면서 시간이 걸리고 사방이 로출되여 안전상 허점이 있었다.

 

이러한 위치선정은 건국후 600여년동안 졸본, 국내성과 같은 기본수도와 환도, 한성, 평양 등의 부수도를 건설하고 운영하여본 충분한 경험에 기초하여 마련된것이였다.

 

ㅡ 건설설계작성

대성산성의 설계는 수도방위성으로서의 사명을 원만히 수행할수 있게 작성되였다.

우선 6개 봉우리로 둘러싸인 고로봉식지형에 성벽을 쌓고 성문과 옹성, 를 많이 설치하여 편리성과 견고성을 높였다는데 대하여서는 이미 많이 론의되였다.

대성산성의 설계에서는 또한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의 규모를 성의 방어조직과 실리적인 요구에 맞게 정하였다.

일반적으로 산성의 규모는 그안에 들어갈수 있는 인원의 수에 따라 결정하였는데 성이 너무 크면 지키기 어렵고 반대로 너무 작으면 사람들을 수용하는데 지장이 있다.

연구자료에 의하면 개모성에서는 전시에 군사 1인당 차례지는 성벽의 길이는 0.5m인데 이것은 당시 산성들의 일반적인 방어밀도로 볼수 있을것이다.

 

※ 개모성은 무순시 서쪽평지의 둘레 2 000m정도 되는 토성으로 보는데 함락되였을 때 성안에 1만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군대와 백성을 합한 수자라고 보고 원래 성안에 있던 인구수가 얼마인가를 계산할수 있다.

료동성이 함락되였을 때 전사한 군사 1만여명, 사로잡힌 군사 1만여명, 성안에 있던 백성 4만명으로 총 6만여명이 있었다.(《삼국사기》권 제21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 4월)

이것은 성안에서 방어군의 50%정도가 전사하면 방어밀도에서 공간이 많아져서 지켜내기 힘들게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개모성에서도 군대와 백성의 비가 1:2정도이고 전투과정에 50%정도의 군대가 전사하였다고 보면 원래 성안의 군민수는 군대 4 000명, 백성 8 000명으로 총 12 000명정도로 볼수 있다.

 

건안성과 신성에서는 군사 1명당 0.1m정도의 성벽이 차례진것으로 계산된다.

 

※ 당시에 건안성과 신성에는 고구려군대가 10만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건안성으로 볼수 있는 개현의 고려성자산성은 둘레의 길이가 5 000m이상 되고 신성으로 보고있는 무순 고이산성은 4 000m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군대 1인당 0.1m정도의 성벽이 차례졌다고 계산된다.

 

이것은 방어밀도가 상당히 높은 수준인데 아마도 건안성과 신성이 해당 지역의 기둥방어성들이라는 사정과 관련되였을것이다.

고구려시기 수도방위의 무력도 건안성과 신성보다 못지 않았을것이므로 그와 같은 밀도를 가졌다고 추산할수 있다.

대성산성의 둘레길이는 7 076m인데 이것은 유사시 7만명에 가까운 군사와 14만명정도의 백성이 들어갈수 있게 설계하였다고 본다.

안학궁성은 둘레를 2 488m로 설계하였는데 국내성 성벽 2 800m보다는 작은 수자이다.

설계가들은 실리를 따져서 성의 규모를 국내성보다 약간 작게 하면서도 평면형태를 정연한 평행4변형으로 처리함으로써 시각적으로는 80여m나 크게 느껴지게 하였다.

이렇게 하면 성벽 한면의 실지 길이는 78m정도 짧지만 시각적으로는 국내성과 비등하게 보일수 있었다.

설계에서는 또한 수도방위성으로서의 사명을 원만히 수행할수 있는 요소들을 상세히 반영하였다.

수도방위성은 유사시 왕을 비롯한 통치배들과 군민이 다 들어가 일정한 기간 항전을 진행하면서 나라를 움직여나가는 일종의 림시수도로서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고구려사람들은 이 림시수도의 사명에 맞게 산성안에 기본수도에 있어야 할 항목들을 다 포함시켰다. 대성산성을 발굴한데 의하면 성안에서는 왕이 살면서 정사를 보는 행궁터, 관청, 살림집, 병영터, 창고터로 볼수 있는 각종 집자리, 장대, 많은 량의 물을 저장할수 있는 못자리 등이 발견되였다.

안학궁성의 설계에서 성문설치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남벽에는 3개, 동, 서, 북벽에는 각각 1개씩의 문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성벽의 네모서리들에는 각루를 세우고 북벽에는 대성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끌어들이고 남벽에는 성안에서 리용한 물을 뽑는 수구문들을 배치하게 하였다.

안학궁이 총 5개의 건축군을 이루고 건물들의 규모가 매우 크며 못과 조산, 기암괴석 등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정원이 있었다는데 대하여서는 많이 론의되였다.

이러한 수도설계는 당시까지 고구려는 물론 우리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발전된 수도를 건설할수 있게 하였다.

 

ㅡ 건설로력조직

축성공사를 하자면 우선 건설로력을 모집하여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천리장성축성에 대하여 《봄 2월 왕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여있다.

이런 사정은 왕궁건설공사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는데 《삼국사기》에는 봉상왕이 298년과 299년에 나라안의 15살이상 남녀를 동원하여 왕궁을 수리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성건설로력도 전국각지에서 15살이상의 백성들을 모집하여 보장하였을것이다.

축성공사를 하자면 또한 공사를 지휘할 담당자들을 임명하여야 하였다.

고구려시기 규모가 큰 토목공사들은 높은 급의 무관이 책임지고 진행하였다.

7세기 중엽에 천리장성공사를 동부대인 연개소문이 감독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집안 천추무덤에서 나온 기와쪼각들에 새겨진 《락랑 조장군》, 《장안 호장군》이라는 글자들은 성건설과 무덤건설을 지휘한 관리들이 바로 장군들이였다는것을 의미한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의 건설은 그 규모나 중요성으로 볼 때 천리장성건설에 못지 않으므로 중앙의 무관이 지휘하도록 하였을것이다.

고대와 중세시기 성건설규모가 방대할 때에는 일정한 구간으로 나누어 담당자들을 임명하였다. 당시의 성건설구간담당조직을 보여주는 자료는 평양성의 글자새긴 성돌을 비롯한 금석문들에서 찾아볼수 있다.

평양성에서 발견된 성돌에 새긴 글자들을 해석한데 의하면 이 축성공사의 담당자는 정6품-정7품까지에 해당하는 소형, 사자(정6품-정7품)들이 11~12리씩 맡았다.

그런가 하면 그리 크지 않은 성을 한사람이 책임지고 공사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둘레길이가 1 960m인 롱오리산성의 건설은 전부 소대사자 어구루가 담당하였다.

대성산성건설구간분담은 2중성벽까지 포함한 성벽의 총길이가 9 284m이므로 대체로 2명의 소형급관리들에게 갈라서 맡겼을것이다.

안학궁성은 성벽의 길이가 2 488m밖에 되지 않으므로 1명의 소형이 책임지고 진행하였다고 볼수 있다.

축성공사에서는 또한 총공사의 규모와 공사기한에 따르는 로력분배를 정확히 하여야 하였다.

 

대성산성의 성벽을 축조하는데 든 로력공수가 73만공수가 넘는다고 본 견해는 이미 발표되였다.(《대성산의 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3년 101페지)

안학궁성의 성벽축조에 들어간 로력공수도 계산하여볼수 있는데 《반계수록》에는 평지의 토성벽축조에 1자당 47공수가 들어간다고 되였으므로 안학궁성건설에는 약 39만공수에 달하는 로력이 투하되였다고 추산된다.(《반계수록》권 제22 병제후록 성지)

 

건설공사과정에 하루에 동원시키는 인원수는 그 공사의 규모와 완공예정기일에 따라 결정하였다.

공사량이 많아도 공사완공예정기일이 넉넉하면 한번에 적은 인원을 동원시킬수 있고 반대로 시간적으로 긴박한 공사이면 비록 총규모는 작아도 단번에 많은 로력을 동원시킬수 있다.

고구려시기 둘레가 길지 않은 롱오리산성건설은 1만명이상의 인원을 거느릴수 있는 종4품 소대사자 어구루가 책임지고 진행하였다. 반대로 매우 방대한 규모인 평양성건설에서는 1 000명정도의 사람들을 거느릴수 있는 소형이나 사자들이 롱오리산성보다 훨씬 더 긴 구간의 담당자로 되였다.

 

고구려시기 벼슬등급에 따라 거느릴수 있는 인원의 수가 규정되여있었다. 《한원》고려기에 의하면 미약(말객, 중랑장급)은 1 000명을 거느릴수 있다. 소형은 정7품인데 북부 소형 고노자의 경우에서 보는바와 같이 작은 성(현급의 성)의 책임자인 재(중랑장급)로 될수 있었다. 그러므로 소형인 재는 1 000명정도까지 거느릴수 있다.

《한원》고려기에는 고구려의 무관제에서 미약우에 대모달(위장군)이 있다고 기록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북사》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백제에서 《방에는 10군이 있고 군에는 장수가 세사람 있어 덕솔로 임명하니 군대 1 100명이하 700명이상을 통솔한다.》고 기록하였다. (《삼국사기》권 제40 잡지 제9 무관) 이 장수는 거느린 군사의 수가 1 100명이하인것으로 보아 중랑장급이였다고 볼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장수들이 거느리는 인원의 수에서도 서로 큰 차이가 없었을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가장 낮은 급의 장군은 미약보다 3배 많은 수(700~1 100명의 3배이면 2 000~3 000명정도)를 거느렸을것이다.

유주자사 진의 묘지명을 보면 그는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룡양장군, 료동태수, 유주자사의 순서로 승진하였다.

이것은 대형이면 위장군급이고 태수도 좌장군, 룡양장군직을 지닌 사람들이 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826년에 신라의 우잠태수 백영이 한성 북쪽 주군 1만명을 동원하여 300리 패강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좌장군, 룡양장군이 거느릴수 있는 인원(2 000~3 000명의 2~3배)과 비슷한 수자이다.

모두루묘지명에 의하면 그의 품계는 대사자이며 관직은 북부여수사였다. 고구려말기에 북부여에는 주(자사)급의 행정관리가 있었지만 이 시기의 수사는 태수보다는 높고 자사보다는 낮은 급수였던것 같다. 그것은 모두루의 무덤에는 유주자사 진의 무덤처럼 벽화를 그리지 못하였기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수급(신성태수 북부대형 고노자)보다도 높은 종4품 소대사자 어구루는 좌장군이나 룡양장군보다 많은 인원, 적어도 제일 낮은 장군이 거느릴수 있는 2 000~3 000명의 3~4배정도를 담당하였을것이다. 이것은 어구루가 거느린 인원을 1만이상으로 추산할수 있게 한다.

 

대성산성도 평양성과 같은 방식으로 축조하였다면 2 000명정도의 로력을 항시적으로 동원하여 장기적인 공사를 진행하였을것이다.

그러나 롱오리산성처럼 단시일내에 건설하였다면 적어도 수만명의 인원을 동원하였을것이다.

 

조선봉건왕조초기 총길이 5만 9 500자(1만 7 850m)인 한양성건설공사에 11만 8 070명을 600자를 단위로 나누어 배치하여 1년 남짓한 시기에 완성하였다.

 

당시 평양천도를 위한 여러가지 공사들이 많이 진행되는 조건에서 하나의 대상에 수만명정도의 인원을 집중시키기는 어려웠으므로 대성산성건설은 평양성건설과 같은 방식을 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ㅡ 건설순차

첫번째 건설대상은 수도방위성인 대성산성이였다고 본다.

수도방어성을 먼저 건설하는것은 고구려시기 수도건설에서 하나의 준칙으로 되였다.

대성산성발굴자료를 보면 제일 이른 시기의 수기와막새무늬는 2줄의 간막이선으로 막새판을 6등분하고 매 구간에 련꽃잎을 배치한 형식인데 집안의 4세기~5세기초에 해당하는 대형돌각담무덤들의 기와에서 흔히 볼수 있는 형식이다.

그러나 안학궁에서 나온 제일 이른 시기의 수기와막새의 무늬는 변형된 간막이선들로 막새판을 6등분한 기와들로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안학궁의 기와는 제작기술의 측면에서도 더 발전하였다. 암기와의 무늬는 일반 노끈무늬가 아니라 전나무잎무늬인데 이것은 대성산성의 기와처럼 노끈을 감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전나무잎무늬를 새긴 판대기를 썼다는것을 보여준다.

안학궁의 기와와 같이 막새판을 변형된 간막이로 나누는 형식은 정릉사터에서 나온 기와들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393년에 평양9사건설이 진행되였는데 이것은 4세기말에 이르러 도시건설이 대대적으로 추진되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하며 수도방어성의 건설은 기본적으로 끝났다고 볼수 있게 한다.

이렇게 놓고보면 왕이 살게 될 안학궁성과 시조왕의 무덤은 수도방어성과 도시건설도 끝내고 평양천도직전인 5세기초경에 건설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 다음은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의 건설이 가지는 력사적의의에 대하여 보겠다.

우선 우리 나라는 물론 동아시아지역에서 새로운 도성제형식을 창조한 매우 의의있는 계기로 되였다.

종전까지 우리 나라의 도성제는 주로 강기슭이나 평지의 벌판에 왕궁성만을 쌓거나 그것을 방어용산성과 결합시키는 방식이였다.

단군조선시기의 왕궁성이였던 청암동토성과 고조선유민들이 세운 락랑국의 왕궁성인 락랑토성도 대체로 강변의 구릉지대에 들어앉고 도시는 그 주변에 형성되였던것으로 인정되였다.

고구려건국이후에는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졸본과 집안의 도성에서처럼 고대이래로 리용하던 벌판의 평지성과 산성을 결합시키고 그사이에 주민지대를 배치하는 형식을 창조하였다.

이러한 도성형성방식은 평양천도를 계기로 대성산성주변의 수도와 같은 방식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였다.

 

한나라때까지 중국의 도성제방식을 보면 《주례》고공기의 기록과 부합되게 《면조후시》원칙이였는데 한나라의 장안성이 그 전형적인 실례로 되였다.

501년에 건설된 북위의 락양성은 북쪽의 망산과 남쪽의 락하사이에 있었는데 궁성은 망산기슭에 바싹 붙어있고 그앞으로 뻗어나간 중심도로 좌우부분에 리방을 설치하였다.(《한당과 변강고고연구》중문 제1집 과학출판사 1994년 97~98페지)

 

이것은 427년 평양천도를 계기로 건설한 대성산주변의 도시구획과 매우 류사하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의 건설은 또한 도시의 중요거점들을 지켜 도시전체를 보위하는 새로운 수도방위방식을 창조하였다.

환인과 집안의 수도들은 중심지역에 방위산성만이 있고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험한 령길에 간단한 관성을 쌓거나 100리정도 나가서 위성들을 배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이러한 방식은 일단 적이 위성방어체계를 돌파하고 수도중심부로 들어오면 도시의 주민지구와 왕궁을 쉽게 내여주고 산성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결함이 있었다.

그러나 대성산주변의 수도는 설사 적들이 중심부까지 들어왔다고 해도 고방산성, 청암동토성, 청호동토성과 같이 가장 가까운 요충지들에서 최종방어를 조직하여 왕궁과 주민지구에 쉽게 접근할수 없게 하였다.

수도의 중심부에 대한 이러한 요점방어방식은 그 이후 평양성(장안성)단계에서 도시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싸는 방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형식으로 되였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의 건설은 또한 당시 주변국들과 당당히 겨룰수 있는 동방강국의 체모에 맞는 수도를 가질수 있게 하였다.

안학궁의 건물들이 규모와 구성에서 당시 중국의 궁전건물들에 비하여 결코 짝지지 않는다는데 대하여서는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론의되였다.

대성산성은 둘레의 길이가 집안의 산성자산성과 비슷하므로 수도의 인구수, 규모에서 얼마 차이가 없는듯이 보인다. 그러나 대성산일대의 수도는 집안의 국내성일대의 수도보다 훨씬 더 컸다. 6세기에 북위사신 리오가 고구려의 인구가 조위때보다 3배로 늘어났다고 한것은 수도의 규모와 인구증가도 념두에 둔것이라고 본다.

 

실지 전시에 대성산성뿐아니라 고방산성, 청암동토성, 청호동토성에 들어갈수 있는 인원까지 고려하면 그 수는 약 40만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중국 한나라의 수도 장안성과 장안현의 총호수는 80 800호인데 호당 인구수는 3명이였으므로 총인구수는 24만명정도이며 북위말기 락양성(락하이북)에는 10만 9천여호가 살았는데 호당 5명정도로 계산하면 락양의 인구수는 54만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한당과 변강고고연구》중문 제1집 과학출판사 1994년 59페지)

 

이처럼 큰 도시를 건설하고 그와 부합되게 방어용산성과 왕궁성을 건설함으로써 고구려는 명실공히 동방강대국의 체모에 맞는 수도를 가지게 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리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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