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기의 화페​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시기에 상품류통이 발전하는데 따라 여러가지 화페가 통용되였다.

이 시기에 상품류통은 생산이 아직 단순상품생산에 그 기초를 두고있었던것으로 하여 기본적인 화페형태는 쌀, 베와 같이 사용가치가 높은 상품이 일반적등가물로 되여있었다. 특히 베는 부피나 질량이 쌀보다 적고 가벼우며 가치가 높고 운반에 편리한것으로 하여 기본적인 현물화페로 되였다. 그러나 상품류통이 더욱 촉진되고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화페형태도 발전하여 철전, 은병 등의 금속화페가 나타났으며 지어 명목화페인 저화까지 출현하였다.

고려시기의 금속화페는 996년(성종 15년)에 주조되여 한때 류통된것으로부터 그 사용이 시작되였다. 이때 주조된 철전은 개성을 중심으로 일부 지역의 음식점들에서 류통되기 시작하였다. 1097년(숙종 2년)에는 주전관을 설치하고 철전을 만들어 쓰도록 하였으며 1102년(숙종 7년)에는 서경(오늘의 평양)에 관리를 파견하여 화페류통을 장려하고 철전인 《해동통보》 1만 5천관을 주조하여 통용하도록 하였다. 그 전해인 1101년에는 고려의 지형을 본딴 한근짜리 은병이 주조되여 화페로 리용되였는데 이를 활구라고 불렀다. 봉건국가는 화페류통을 적극 추진시킬 목적으로 수도 개경에 점포들을 많이 설치하고 화페로 물건을 사고팔게 하였다.

그후에도 봉건국가는 여러차례 《삼한통보》, 《동국통보》, 《동국중보》, 《해동중보》 등을 주조하였다. 금속화페의 류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고려에서는 1331년(충혜왕 1년)에 새로운 작은 은병(은화)이 나타났으며 1356년(경효왕 5년)에는 화페제도제정문제가 토의되였고 1391년(공양왕 3년)에는 가장 높은 형태의 화페인 저화가 출현하였으나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조선봉건왕조가 섬에 따라 류통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시기에는 현물화페인 쌀과 베가 기본화페로 되여있었으며 철전, 은화 등은 제한된 범위내에서 류통되였다.

고려의 상품경제발전을 반영하여 나온 금속화페에는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착취와 수탈을 보다 강화하려는 착취계급의 리해관계와 탐욕이 반영되여있다.

당시 봉건국가는 신용가치가 빈약하거나 거의 없는 품질의 낮은 금속화페를 많이 주조하여 류통시킴으로써 인민들에 대한 수탈을 보다 쉽게 하려고 하였으며 일부 권세와 재산이 있는 자들은 은화에 동을 합금하는 방법으로 폭리를 얻으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화페의 신용가치를 더욱더 저락시켜 교환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그리하여 봉건국가가 금속화페의 통용을 강요하던 시기에도 민간에서의 주되는 류통수단은 종전과 같이 쌀, 베 등 현물화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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