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1745-1816) ​

조선봉건왕조시기의 화가. 자는 사능, 호는 단원, 단구, 서호, 고면거사, 취화사, 첨취옹이다.

김홍도는 18~19세기를 대표하는 사실주의경향의 진보적인 화가이다. 도화서 화원으로 벼슬은 연풍현감을 지냈다.

어렸을 때부터 뛰여난 그림재능을 보여준 김홍도는 당시의 진보적인 화가였던 김응환(1742-1789)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그는 인물풍속화를 비롯하여 초상화, 산수화, 화조령모화, 판화, 종교화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모든 종류에 걸쳐 수많은 걸작들을 남겨 조선봉건왕조의 화단을 장식하였다.

특히 김홍도는 당시 실학사상의 영향밑에 도식화된 량반사대부들의 낡은 화풍을 깨뜨리면서 점차 자기 시대의 현실로부터 출발한 사실주의적인 풍속화창작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의 풍속화들은 근로하는 인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다양한 주제와 회화기법으로 그들의 창조적로동과 락천적인 생활, 순박하고 건전한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긍정하였으며 봉건관료들과 무위도식하는 계층의 부패타락한 생활을 자연스럽게 야유조소하여 당대의 불공평한 사회적면모를 재현하였다. 《대장간》, 《집짓기》, 《베짜기》, 《빨래터》, 《춤》, 《씨름》, 《고니놀이》, 《고기잡이》, 《서당》, 《활쏘기》, 《우물가》 등은 근로하는 평민들의 창조적로동과 일상생활의 일단을 진실하게 반영한 그의 대표작이며 《량반의 가비릉욕》, 《승려와 량반부녀의 비밀》, 《량반들의 투전놀이》 등은 봉건량반관료들의 부패타락성을 폭로조소한 그의 대표작들이다. 비록 소폭이지만 이 그림들마다에는 등장인물들의 신분과 직업, 나이와 성격, 그 내면세계까지 잘 드러나있으며 당시의 시대적면모가 그대로 반영되여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 성격창조의 진실성과 심리묘사의 예리성, 표현적인 구도와 독특하고 힘있는 선에 의한 소묘의 정확성으로 특징지어진다.

김홍도는 인물풍속화뿐아니라 초상화에서도 대가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조선봉건왕조 22대왕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5년전인 1771년에 그의 얼굴을 그린 일이 있으며 1781년에는 왕령을 받아 김홍도를 비롯한 3명의 화원들이 정조의 초상을 그려서 바친 일이 있었는데 그림을 받아본 정조가 사흘후에 김홍도만을 따로 불러 자기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을뿐아니라 그때부터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김홍도에게 맡겼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초상작품으로 리명기와 합작한 《서직수초상》이 있다.

김홍도는 힘있고 류창한 필치로 실경산수화의 걸작들도 남기였다. 그의 산수화들은 모두 조국산천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민족적정취, 짙은 향토미를 풍기고있으며 심오한 사색과 풍만한 시정, 자연의 아름다움속에 안기고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매혹적인 화폭으로 일관되여있다.

1788년 왕령을 받고 스승인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을 현지답사하여 그 정경을 그려 바친 일이 있었으며 1789년에도 왕령을 받고 일본지도를 그리기 위하여 떠나는 김응환을 수행하였으며 부산에서 김응환이 병으로 죽자 홀로 대마도에 건너가 일본지도를 그려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금강산사군산수도》, 《구룡폭》, 《홍류동》, 《나루배》, 《소림명월도》 등이 있다.

김홍도는 종교화도 잘 그리였다. 대표적인것으로 《군선도》를 비롯한 신선도들, 불교교리를 설교한 《부모은중경》의 삽도 원화와 그 판화들, 사찰의 벽화들, 봉건유교사상을 설교한 《오륜행실도》의 원화와 판화들을 들수 있다. 이 종교화들은 추상성과 신비성을 띠고있으나 등장인물들이 산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져있어 일종의 인물풍속화를 방불케 한다.

김홍도는 화제의 선택과 주제내용에서의 시대적 및 계급적제한성과 수묵을 위주로 그린 당대 화단의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약점이 있으나 그의 이름은 18~19세기 조선봉건왕조화단의 새로운 장을 펼쳐놓은 대가로 우리 나라 회화사에 기록되여있으며 오늘도 그의 유작들은 민족회화의 귀중한 재보로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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