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린석(1842-1915)​

유생출신의 반일의병장. (호는 의암)

위정척사운동의 대표적인물인 리항로(1792-1868)의 사상적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자신이 이 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894년 우리 나라에 대한 일본침략자들의 무력침공이 시작되자 격문을 발표하여 사람들을 반일투쟁에로 불러일으키고 1895년말부터 제천반일의병대의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지휘한 의병대는 이듬해 2월(음력 1월) 충청도의 정치군사적중심지였던 충주에 진출하여 일본침략군을 격파하고 여러 고을의 친일주구들을 처단하였으며 거의 한달동안이나 충주를 방어하였다. 이해 가을 중국 료동지방으로 건너갔으며 그후 자주 국내에 들어와 사람들에게 반침략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1904년초 일제가 로일전쟁을 도발하고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을 더욱 강화하자 국내에 들어와 평안남북도의 30여개 군에 유교단체의 이름을 단 《총유계》를 내오고 그것을 통하여 의병투쟁을 준비하였다. 류린석이 반일의병투쟁을 벌릴것을 호소하자 그의 영향밑에 있던 사람들이 의병투쟁에 떨쳐나섰다. 그는 태천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일대에서 반일의병투쟁을 벌려 일본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1907년 가을 로씨야 연해주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의병규칙》, 《관일약》 등 반일의병들의 활동규범과 관련한 글들을 써서 발표하였다. 1910년 5월 13도 의군도 총재가 된후 주체3(1914)년에 남만 관전현으로 옮겨와 그곳에서 반일활동을 하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류린석은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한것을 보고 민족적격분을 가지고 반일투쟁에 나섰으나 봉건적《충군애국》사상에 기초하고있었으므로 반인민적인 봉건적신분제도를 비롯한 봉건제도와 봉건왕권을 옹호하고 근로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민족적지조를 견지하고 반일투쟁에 몸바치려고 애쓴데 그의 애국적측면이 있었다.

저서 《의암집》과 《소의신편》에 실린 력사자료들은 류린석의 반일애국사상과 반일의병투쟁사연구에서 참고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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