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성의 새 주인 동명

B.C. 11세기경 어느한 봄날, 아지랑이가 피여나 봄의 훈향이 자오록하게 어린 《예성》으로 멀리 중국 서주의 사신이 찾아왔다. 이들은 그보다 썩 전인 B.C. 12세기에 서주가 세워지면서 서주왕을 찾아가 축하해준데 대한 답례방문으로 온 일행이였다.

부여왕은 그들이 가지고온 국서며 교역물목들을 일일이 보고나서 틀진 목소리로 《원로에 오느라 수고많았겠소. 여기 <예성>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 바라오. 물론 우리 왕조가 여기로 망명해온지도 백여년 세월이 흘렀으니 본래 <예성>의 맛은 덜하겠지만…》하고 말하였다.

사신은 좀 얼떠름해진 모양인지 《대왕께서 망명해오신 사람들이라는건…》하며 말끝은 삼킨다.

그러자 부여왕의 옆에 허리굽혀 서있던 신하 하나가 그 사연을 설명해주었다.

100여년전인 B.C. 12세기경이였다.

수많은 탁리국사람들이 눈강류역의 초원을 질러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동명》이라고 불리우는 장대한 사나이가 그들을 지휘하였다.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아온 탁리국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였던 그가 이렇게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데는 까닭이 있었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고 어머니는 탁리국왕의 시비였다고 한다.

어느날 탁리국왕은 신하들과 군사들을 데리고 사냥하러 나갔다가 오래간만에 왕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남아있던 시비(몸종)가 난데없이 임신하였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리국왕은 대번에 노기가 등등하였다.

국왕은 섬돌밑에 무릎을 끓고있던 녀인을 당장 끌어내다 조상의 법도대로 요정내라고 펄펄 뛰였다. 조상의 법도란 행실이 음란하거나 시샘을 내여 강짜부리는 녀자들은 모두 죽여버린다는것이였다. 그다음 그 시체를 나라 남쪽의 산에 갖다버리는데 썩을 때까지 그 가족들이 가져가지도 못하게 되여있었다.

머리를 수그리고 엎드려있던 그 녀인은 변명하기를 크기가 닭알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자기에게 내려왔기때문에 그리된것이라고 하였다.

국왕은 신하의 간언도 있고 또 이 녀인의 변명도 기이하여 사형은 면해주었으며 후에 그가 낳은 아이를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내다버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돼지와 말이 혀바닥으로 핥아주고 입김으로 녹여주니 갓난아이는 죽지 않고 용케도 살아났다. 이 일이 하도 이상하여 왕은 시비의 말이 정말이였구나, 정말 하늘이 점지한 아이인게로다 하며 그 어머니에게 데려다 기르도록 허락하였다. 그 애가 바로 《동명(새날이 동쪽에서 밝아온다는 뜻)》이였다.

동명은 크면서 비록 소, 말이나 돌보는 목동으로 천역을 면치 못했으나 천성이 구김살없이 쾌활한데다 체격이 장골이여서 그 누구도 감히 괄세를 못하였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재주 또한 특이하여 궁술이 어른들을 찜쪄먹을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뽕나무활이나 당기던 동명이 강궁도 쉽게 당기게 되면서 그의 뛰여난 궁술에 온 나라 사람들이 입을 모아 감복할뿐이였다.

국왕은 그를 그대로 두었다가 화단이 될것이 두려워 은밀히 부하들을 시켜 죽이도록 하였다.

국왕의 밀령이 떨어진것을 알게 된 동명은 친구들과 의논하고 이 나라를 떠나 남쪽 부여본토로 내려가기로 하였던것이다.

동명은 장차 부여왕의 힘을 빌어 자기를 죽이려 한 탁리국왕에게 보복하리라 마음먹고있었다.

B.C. 3천년기 중엽에 단군조선의 후국으로 성립된 부여는 B.C. 2천년기 중엽에 이르러 국력이 현저히 강화되였던 반면에 종주국이였던 고조선(전조선)은 점차 쇠약해졌다. 그리하여 부여는 고조선에서 떨어져나와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되였으며 이웃 지역들에 형성되였던 소국들을 통합하여 북으로 눈강류역, 동쪽으로는 동류송화강류역, 목단강류역, 동남으로 두만강류역일대까지 차지한 큰 나라로 되였다. 눈강류역에 있었던 탁리국도 부여의 속국으로 되였다.

그러나 300여년이 지나는 사이에 부여에서는 암둔한 임금들과 귀족관료들의 어지러운 정사로 말미암아 국가통치질서가 흐트러지고 정치적혼란이 계속되였다. 그리하여 지방소국들, 정치세력들에 대한 통제기능도 약화되였고 탁리국은 부여의 통제와 구속에서 벗어나다싶이 하게 되였다. 부여안에서의 세력관계는 탁리국에 점차 유리하게 번져가고있었다.

바로 이런 때에 동명의 도착을 알게 된 부여왕은 내심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다.

부여왕이 바라보니 동명은 과시 영걸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부여국이 지금의 쇠잔한 운명에서 꼭 벗어날수 있을것같았다.

부여왕은 동명에게 나라 한쪽땅을 떼여주어 거기서 살도록 허락하였다.

그후 워낙 재주가 출중하고 통솔력도 있던 동명의 일처리가 날이 감에 따라 부여왕의 마음에 흠뻑 들었고 몇해 지나서는 나라의 대소사를 그에게 의거하여 풀어나가게 되였다.

부여왕은 자기의 딸을 동명에게 주어 그를 사위로 삼은 다음 아예 왕권을 그에게 넘겨주고말았다.

부여의 왕권을 차지하게 된 동명은 점차 국력을 강화하여 이웃에 있던 탁리국을 복속시키고 부여계통의 여러 소국들을 더 많이 통합하여 부여국을 다시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동명》이란 말도 원래 하늘에 대한 숭배사상으로 나온것으로서 종래의 부여의 시조를 동명으로 전하게 된것도 동명에 의한 왕조교체가 있었기때문이였다. 그 칭호도 그의 업적과 관련하여 신성화되여 《하늘이 낸 사람》이란 뜻을 가지게 되였다.

B.C. 3세기 초에 부여땅에서 남하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동명왕》이란 존호를 받게 된것도 이와 같은 연유에서였다.

오늘의 길림지방을 《예성》이라고 하게 된것은 본래 《예》나 《밝, 발(발, 부여)》이 고대조선사람들에 대한 호칭으로 되고있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중국의 옛 력사기록인 《삼국지》에는 《그 나라(부여)에는 오랜 성이 있어 이를 <예성>이라고 하니 대개 본래는 예맥의 땅이다. 부여왕이 거기에서 다스리고있었는데 자기를 망명해온 사람이라고 한다.》라는 기사가 실리게 되였다.

이상에서 보면 고대노예소유자국가였던 부여는 탁리국의 일부 세력이 남하하여 평화적방법으로 부여의 통치권을 차지하고 부근의 다른 여러 소국들을 통합하여 큰 고대국가로 장성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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