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설의 실체​

고조선은 아시아대륙 동북부에서 가장 일찌기 성립된 고대국가였으며 매우 발전된 문화를 가진 우리 나라 최초의 노예소유자국가였다. 이것은 슬기롭고 재능있는 우리 선조들이 자신의 힘으로 문명을 개척하고 발전시켜왔다는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지난 시기 고조선의 문명이 다른 나라 사람에 의하여 시작된듯이 력사를 외곡한 이른바 《기자조선》설이 전하여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옛날 사대주의에 물젖은 일부 어용학자들은 〈기자〉라는 다른 나라 사람이 몇백명의 기술자를 데리고 조선에 와서 나라를 세웠으며 그들이 우리 나라의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꾸며놓았습니다.》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설은 중국 한나라초에 복생이 쓴 상서대전에서 처음으로 전하였다. 그에 의하면 서주가 은나라를 정복하고 감옥에 갇혀있던 《기자》를 놓아주었는데 그는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왕실의 용서를 받은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조선으로 달아났으므로 이 소식을 들은 주나라 무왕은 그를 조선후로 임명하였다는것이다.

그밖에 B.C. 1세기초에 사마천이 쓴 《사기》의 송미자세가에서는 기자를 은나라 마지막왕 주의 친척이라고 하면서 무왕이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하였고 《한서》에서는 기자가 조선에 와서 그 백성들을 례의로써 교화하고 농사와 길쌈 등을 배워주었다고 하였다.

《위략》에서는 B.C. 323년경의 고조선왕을 기자의 후손으로 묘사하였고 《삼국지》의 예전에서는 고조선왕 준을 기자의 40대 후손으로 썼다.

이러한 중국의 옛 력사기록을 그대로 믿은 우리 나라의 력대 봉건왕조시기의 봉건유학자들속에서는 《기자》숭배사상이 널리 퍼졌다.

사대주의에 물젖은 고려와 조선봉건왕조의 통치배들은 중국의 옛봉건통치배들에 의하여 후세에 날조된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류포시켰다.

고려시기에 편찬된 《삼국사기》 년표에서는 《기자》가 주나라 왕실에서 조선후로 봉하여졌다고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왕실에서는 1102년 10월에 례부의 제의에 따라 《기자》의 무덤을 찾게 하고 사당을 세웠으며 1325년에 평양에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유교가 성행한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유학자들속에서 《기자》숭배사상은 더욱 고조되여 《기자지》, 《기자실》, 《기자고》 등 《기자》의 이른바 사적과 관련한 책들이 편찬되였으며 《진단통기》에서는 《기자》가 난해, 조선에 온해, 죽은해, 왕으로 있은 해수와 산 나이까지 상세히 꾸며냈다.

지어는 평양의 모란봉에 거짓 《기자묘》까지 만들어놓고 조선사람들을 《기자》의 후손들이라고 떠벌였다. 《기자묘》가 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날조된 거짓이였다는것은 해방후 《기자묘》를 발굴할 때 거기에 벽돌쪼각과 사기쪼각 몇개밖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로서 뚜렷이 밝혀졌다.

 

 

그러나 《기자》를 우리 나라 력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로 서술하느냐 하는 점에서는 《기자》가 처음 조선에 가서 나라를 세운것처럼 쓴 중국의 옛 력사기록과는 달리 우리 나라 옛 기록에서는 단군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처음 세웠고 《기자》가 와서 단군에 뒤이어 왕으로 된것으로 서술한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이야기는 대국주의적인 옛 중국의 봉건사가들에 의하여 조작된것이다.

우선 중국의 옛 력사책들중에서 B.C. 3세기 이전의 옛 기록에는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있다.

만일 《기자》가 조선에 왔다면 이른시기 중국기록들에 그것이 밝혀졌을것인데 《상서》 이전의 《기자》에 대하여 전한 여러 기록들에는 그와 같은 기사가 전혀 없다. 《론어》 미자편에는 미자, 기자, 비간 등이 은나라 마지막왕 주에게 그릇된 정치를 그만둘것을 요청하다가 미자는 왕의 곁을 떠나고 비간은 죽음을 당하였으며 기자는 거짓 미친척하고 중으로 되였다고 하였다. 또 《죽서기년》 주기 무왕조에서는 은나라 주왕이 비간을 죽이고 《기자》를 옥에 가둔것으로 전하였고 《상서》의 주서 무성편이나 《산시외전》 무왕조에서는 주나라 무왕에 의해 옥에 갇혀있던 《기자》가 석방되였다고 하며 《상서》의 주서 홍법편에서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복한후 13년에 《기자》를 찾아가 홍법을 들었다고 한다. 또 라전에는 주나라 무왕의 아들이 당에 봉을 받았으며 그 봉지가 반드시 번성할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 어디에나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기록은 전혀 전하지 않고 반면에 의연 중국에 그대로 있었다는것을 이모저모로 알수 있게 한다.

다음으로 《기자조선》설을 전한 기록들자체에도 모순이 있다.

상서대전에서는 《기자》가 스스로 달아났다고 하였는데 사기에서는 주나라 무왕이 그를 조선후로 임명하였다고 하였고 《기자》가 조선에 간 시기를 말함에 있어서도 상서대전에서는 그가 주나라 무왕에게 홍법을 가르쳐주기 이전시기라고 하고 사기에서는 가르쳐준 후라고 한다. 《기자》가 무왕에게 홍법을 가르쳐주었다면 그가 자기 왕실을 정복한 무왕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조선으로 왔다는것은 거짓말로 되며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면 무왕에게 홍법을 가르쳐주었을리 없다.

또한 주나라가 아직 황하중류의 중원지방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당시의 형편에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며 또 고조선에 강한 군사력이 존재하였던 조건에서 망명객인 《기자》가 그 세력을 전복하고 왕노릇을 하였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기자조선》설의 허황성이 내외의 력사학계에서 공인된 지금에 와서 중국사람인 《기자》를 동이계의 《기자》족으로 변신시키고 이들이 오늘의 중국땅에서 동쪽 평양지방으로 이동하면서 선진문화를 전파하였다는 《설》이 새롭게 제창되고있으나 그 역시 《기자조선》설의 하나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이처럼 《기자조선》설은 전적으로 날조된 거짓으로서 우리 나라의 첫 노예소유자국가였던 고조선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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